수화 김환기의 그림이 전해준 메시지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재미있게 본 일본 드라마의 제목이다.
취업 준비로 힘들어하던 한 여성이 독신남의 집에 가사도우미로 취업하게 된다. 우연한 계기가 맞아 두 사람이 각자의 이득을 위해 계약 결혼을 하게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이다.
부모까지 속여가며 평범한 결혼인척 하는 것이 도망치는 것이라 말하는 여주에게 남주가 헝가리 속담을 하나 말해준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도망쳤어도, 어쨌든 잘 넘기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 나름의 위로를 전해준다.
도망치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으로부터, 늙어가는 부모에 대한 봉양의 의무로부터, 불안한 미래로부터.
도망치는 건 부끄러운 일이고, 현실을 직면하며 맞서는 것이 덕목이라고 배우며 자랐다. 물론 지금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부끄러움 없이 삶이 있을까? 우리가 살아 온 삶의 대부분은 아마 이불킥의 순간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그때 그 말을 하지 말껄.'
이런 크고 작은 무수한 후회들이 뒤섞어 성찰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부끄러움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어야 할 부분이다.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부끄러워도 된다.
인생의 힘든 순간을 만날 때마다 내가 선택했던 방법은 도망치는 일이었다.
20살, 첫사랑에 실패한 후 학교가는 방향을 틀어 고속 버스터미널로 가서, 아무 버스나 잡고 버스에 올랐다. 강촌가는 버스에서 창밖을 보며 지금 내게 놓여진 현실로부터 최대한 멀어졌다. 강촌이 엠티촌인줄 모르고 가서 재미있게 놀고 있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초라해졌지만, 이때의 선택은 지금까지도 자주 기억된다. 그날 바로 학교에서 가서 실패한 첫사랑을 또 봐야했다면, 견디기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15년 뒤, 아주 오랜만에 방향을 틀었다. 시험관 이식 날짜를 잡으러 간 날, 피검사 수치가 너무 안좋아 일정이 미뤄졌다.
"피 검사 결과 풍진 수치가 너무 떨어졌어요. 풍진에 걸리면, 기형아를 낳을 위험이 높아요. 예방주사를 맞는게 좋겠는데, 대신 한달 피임을 해야합니다."
작년 7월 시험관으로 만났던 아이가 임신 17주 만에 떠났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느라, 자궁근종 수술을 받느라 다시 시도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그런데 또 다시 예기치 않은 현실로 밀린 것이다.
임신의 모든 과정이 예기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현실들을 마주하니 견디기가 어려웠다. 임신 중간에 조기양막파수가 일어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음주 중에 시술 날짜가 잡히겠거니 예상하며 갔는데, 평소 잘 나오던 피검사 수치가 이렇게까지 떨어졌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예기치 못한 현실을 마주하자, 아이를 잃어갔던 과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카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다가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평소 가고 싶었던 환기 미술관에 다녀오기로했다. 장마라던데, 하늘은 비를 억수로 뿌리려고 준비하고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 나는 내 현실로부터 도망칠 곳이 필요하다. 부암동 길을 걷는데, 예상대로 비가 억수로 오기 시작한다. 길을 걷다보니, '환기 미술관' 앞에 섰다. 다행인지 비가 많이 와서 미술관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미술관을 혼자 전세낸 것 같았다.
마침 환기 미술관은 시청각 장애인을 위한 전시를 시도 중이었다. 김환기 그림을 바탕으로 만든 음악과 그의 그림을 보며 느껴지는 향기를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김환기의 그림을 보며, 억수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김환기 그림의 음악을 들으며, 김환기 그림의 향기를 맡으니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그의 노년기의 그림 앞에 선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유명한 그의 전면점화 앞에서 한참을 앉았다. 무수의 점을 찍으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표현하려해도 표현하지 못하는 그림의 한계를 느끼며, 그는 보이는 것 너머의 진짜 의미를 알고자했던 것 같다. 인간의 한계가, 그러나 변치 않는 인간의 꿈과 희망이 그의 그림에 점으로 나타났다.
3층에가니 그의 노년기 작품이 많았다. 오른편엔 점면점화들, 반대쪽엔 그 직전에 그린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두 그림을 비교해서 보니 도화지가 다르다는걸 깨달았다. 전면점화 직전의 그림들은 캔버스에 그린 것들이었고, 전면점화는 모두 천에 그린 것이었다. 천에 점을 찍으니 물감이 자연스럽게 퍼지면서 또 다른 색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한 가지의 색이었지만, 물감이 퍼져나가 다른 물감과 만나다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색처럼 보였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다른 색은 그의 그림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애쓰지 않고 만들어낸 색은 자연스럽다. 점만 찍어도 물감은 알아서 퍼져나가 또 다른 색깔을 만들어낸다. 가만히 앉아 그림의 메시지를 듣는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한 방울의 점이 퍼져나가 다른 색과 만나듯, 너의 노력과 존재가 한 방울처럼 작아보여도, 괜찮다. 너만의 색을 만나게 될테니. 그것은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너만의 색이 될테니 말이다.
또 다시 억수의 비를 뚫고 지나가는 길. 가라앉은 마음 그대로 안고 간다. 대신 뿌연 나의 도화지에 퍼져있는 잉크가 느껴진다. 오늘도 어김없이 희미하고 작은 한 방울 뿐이지만, 다른 잉크와 만나 자연스럽게 다른 색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나만의 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