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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Sep 21. 2023

보이는 나와 보이지 않는 너 중 누가 구원받아야 할까?

영화 '블라인드'가 말하는 보이는 세계


아름다운 영화 한편을 보았습니다.

네덜란드 영화 '블라인드'(2007)입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든 네덜란드의 겨울에 시각장애인 청년 뤼번이 살고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그는 마음의 문을 닫은 채 난폭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를 씻겨주기 위해 고용된 하녀들은 하루를 못 버티고 떠날 지경이었죠.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고용합니다.

어두운 뤼번의 세상과 대비되는 온 몸이 하얀 '마리'였습니다.

그녀는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 쓴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얼굴과 온 몸엔 유리로 베인 상처가 가득했거든요.

그녀는 어렸을 적, 못생겼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 학대를 받았습니다. 학대의 상처는 오래도록 남아 그녀를 꽁꽁 얼어 붙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눈의 여왕처럼요.



역시나, 뤼번은 마리에게도 난폭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마리는 뤼번에게 지지 않습니다. 단숨에 뤼번을 제압하며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저항하던 뤼번도 아름다운 마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갑니다.

아름다운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록 궁금해집니다. 그녀에 대한 모든 것들이요.

'어떻게 생겼어? 머리는 무슨 색깔이야?'

'빨간색.'

'눈은? 무슨 색이야?'

'초록색'

온 몸에 아무 색도 아무 감정도 없던 그녀는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맙니다.

그녀도 모르게 그에게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만져야만 세상을 볼 수 있던 뤼번은 조금씩 마리를 만지며 그녀를 상상합니다.

'내가 상상했던 거랑 다르네, 훨씬 아름다워.'



처음으로 나를 아름답다고 해준 사람.

마리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행은 행운의 옷을 입고 찾아옵니다.

뤼번이 눈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뤼번이 눈을 떠서 자신을 보게 된다면 어떡하나요?

그녀는 자신이 없습니다. 뤼번과 함께 도망칠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행복해하는 뤼번 앞에서 그녀는 마음을 접습니다.



뤼번에게 편지를 남긴 채, 사랑한다는 한 마디 말을 전한 채 그녀는 얼음 속으로 사라집니다.

눈수술을 받고난 후 뤼번은 그제야 마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생전 처음 겪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지만 그녀의 흔적은 어디서도 느낄 수 없습니다.

천천히 시력을 회복한 후 처음 마주한 건, 죽은 어머니와 흔적 없는 마리였습니다.



마리에게 배운대로 면도를 하려고 하지만, 면도 날이 너무 무서워 차마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눈을 가린채 면도를 합니다. 마리의 온기를 느끼면서요.




시간이 흐르고 뤼번은 완전히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뤼번은 도서관에 들려 '안데르센'의 책을 찾습니다.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던 마리는 뤼번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뤼번은 마리를 알아보지 못했죠. 그녀에게 '안데르센'의 책을 찾아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녀에게서 책을 건네 받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상처 투성이인 그녀의 얼굴을 보고 뤼번은 흠칫 놀랍니다다.

뤼번의 눈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감각은 그녀를 단숨에 알아봅니다.

그녀의 향기 속에서 그는 마리의 흔적을 느낍니다.



가려는 마리를 붙잡으며, 책을 좀 읽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녀가 책을 읽기 시작하자, 그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말합니다.

'집으로 돌아가자.'

마리는 눈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보라고 말합니다.

'내가 아름다워?'

'아름다워.'

'거짓말. 나는 동화를 믿지 않아.'

마리는 도망치듯 또 다시 사라집니다.


마리를 놓치고 집으로 돌아온 뤼번은 그제야 마리가 남긴 편지를 손에 얻습니다.

"내 사랑 뤼번. 이 편지를 읽을 쯤이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보이겠지.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건 네 손끝으로 본 세상일거야.

내 사랑, 나를 기억해줘. 네 손끝, 네 귓가에 남은 나를..

너로 인해 난 놀라운 사랑을 봤어. 가장 순수한 사랑.

진실한 사랑은 보이지 않아. 그것은 영원해."

마리의 편지를 읽은 뤼번은 그제야, 마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했다는걸 깨닫습니다.

도서관에서 마주쳤을 때, 흠칫 놀라던 뤼번을 본 마리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눈을 마주친 마리의 마음이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뤼번은 밖으로 나가 뾰족한 고드름 두 개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다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제야 뤼번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랑해 마지 않았던 마리를 마주합니다.

사랑해. 보고 싶었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 중 누가 더 불행할까요?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묻습니다. 정말 보이는 것이 더 행복한거냐고.

사람들은 모두 마리의 얼굴을 보며 흠칫 놀랍니다. 심지어 마리를 사랑했던 뤼번 마저도요.

그러나 보이지 않는 뤼번은 마리와 사랑에 빠집니다.

상처 뒤에 숨어 있는 마리의 진짜 아름다움을 뤼번은 찾을 수 있었죠.


모두가 상처투성이인 눈의 여왕을 멀리했지만, 뤼번은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녀가 얼마나 다정하게 피아노를 치는지,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해주는지, 그녀가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지녔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마리를 다시 만났을 때도, 눈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죠.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뤼번에게 눈이 떠지는 구원이 필요한게 아니라, 눈이 보이는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한게 아닐까...

우리는 철저히 비장애인중심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보이는 세상에 갇혀버린 줄도 모른 채 말이지요. 우리는 보이는 세상에 갇혀버렸습니다. 매일 아침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신경씁니다. 살이 찐 것 같아 몹시도 괴롭습니다. 저 사람의 시선이 자꾸만 거슬립니다. 저 이는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짜증이 납니다.


뤼번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날아 다닙니다. 뤼번의 마당에는 기린이 뛰어 놀고, 사랑하는 마리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소리를 냅니다. 누가 더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가요?


성서에는 예수께서 맹인을 고치신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외치면서 예수를 뒤따라 왔다.

예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셨는데, 그 눈 먼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그들이 "예, 주님"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마태복음 9:27-30a


정말 예수에게서 받은 구원이 눈이 보이게 되는 것이었을까요?

겨우 그 정도 일까요? 

성서에는 '그들의 눈이 보였다'가 아니라, '그들의 눈이 열렸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서마저 비장애인 중심적인 사고에서 해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어쩌면은요. 눈이 보이게 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보이고 말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진짜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마리가 뤼번에게 쓴 편지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아. 그 사랑은 영원해.


정말 중요한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 덕분에 살려지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에 갇힌지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원 받고 싶습니다. 눈의 여왕에게 있는 따스한 마음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보이는 네가 더 불행하냐 보이지 않는 네가 더 불행하냐는 질문 앞에 섭니다.

보이건 보이지 않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를 보지 못하는 이들이 더 불행하지요.



당신은 오늘, 무엇을 보며 살아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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