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천개의 시선, 수 천개의 삶
불타는 빌딩을 보여주며 영화가 시작된다. '아, 방화범이 괴물인가?' 명확한 가해자가 있을 거라는 상상. 그런데 어째 영화가 자꾸만 다른 데로 간다. 남편과 사별 후 홀로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 사오리는 어느날 부턴가 아들의 이상행동을 감지한다.
'돼지의 뇌가 이식된 사람은 사람이야? 돼지야?'
라는 이상한 질문을 시작으로 어느날엔 물통에 흙이 담겨 있고, 비오는 날 밤엔 공포스럽기까지 한 터널에 아들이 홀로 있다. 이상한 혼잣말을 되뇌면서. 아들을 달래고 오는 길, 아들이 갑자기 차에서 뛰어 내린다. 사오리는 아들을 추궁한다.
'너 도대체 왜 이러니? 무슨 일이 있었니? 누가 널 괴롭히는거니?'
'호리 선생님이 그랬어.'
엄마의 추궁에 아들 미나토는 담임인 호리 선생의 이름을 내뱉는다. 사오리는 곧장 학교에 찾아가지만, 교장과 선생들의 태도가 너무 이상하다. 감정이 없는 로봇같다.
'당신은 인간입니까?' 사오리는 감정 없는 로봇처럼 행동하는 교장에게 묻는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 마저도 로봇같다. 사오리는 점점 미처갈 지경이다. 과연, 사오리는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있을까?
괴물은 누구일까?
영화는 세 사람의 시점으로 같은 장면을 보여준다. 처음엔 엄마 사오리의 시점, 두번째는 담임 호리 선생의 시점, 그리고 마지막은 아들 미나토의 시점. 영화를 보는 내내 '괴물 찾기'에 한창이다. 과연 빌딩에 불을 지른 사람은 누구지? 미나토를 괴롭한 괴물은 누굴까? 특히나 교장이 의심스러웠다. 운전을 하다 실수로 손녀 딸을 치어 죽였다는 교장. 그마저도 남편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그녀에 대한 소문 때문만은 아니다. 홀로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 마트에서 뛰어다니는 아이에게 아무도 모르게 발을 걸던 그녀의 모습. 모든 상황들이 그녀가 괴물은 아닐까 의심스럽게 한다.
시점이 변할수록 약간의 짜증이 올라왔다. '그래서 괴물이 누군데?' 알려줄듯 말 듯 하면서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감독은 왜 괴물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주지 않고, 주변만 빙빙 돌고 있는거지?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거지?
우리의 질문은 마지막, 미나토의 시점 앞에서 털석 주저 앉는다. 미나토와 같은 반에는 '요리'라는 아이가있다. 이 아이는 같은 반 남자아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다. 미나토는 자기도 모르게 요리에게 끌리지만, 자신도 왕따를 당하게 될까 두려워 학교에선 요리를 아는 척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만의 공간에선 두 아이는 자유롭다. 엄마에겐 공포의 공간이었던 폐 터널은 사실 미나토와 요리의 세계를 이어주는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폐기차 안에서 자기들만의 세계를 창조하며, 자유롭게 그리고 자기답게 표현한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아이들의 세계는 다르다. 푸르고 싱그러운 사랑과 자유가 존재하는 공간. 그 세계 앞에서 괴물을 찾아 헤메던, 괴물에 대한 답을 빨리 주지 않는다며 지루해하던 나의 민낯과 마주했다.
우리는 명확한 선과 악을 좋아한다. 명확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를 제대로 응징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삶에 명확한 선과 악이 존재하던가?
에크하르트 톨레는 그의 책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 인간의 '정상적인' 마음 상태에는 기능장애 또는 광기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강한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정상'은 사실 '정신이상'과 같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정상'의 범주 안에 있길 원한다. 그런데 무엇이 정상인가? 집단의 다수에 속에 있으면 정상인가? 우리 사회에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의 수가 훨씬 많으니 비장애인은 정상이고, 장애인은 비정상인가? 이성애자는 정상이고, 동성애자는 비정상인가? 그렇다면 세계 부의 80%를 차지하는 20%의 사람들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20% 나눠 갖는 80%의 사람들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신의 광기를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온전한 정신의 등장이며, 치유와 초월의 시작이다.
톨레는 말한다. '정상'이란 없다고, 인간은 모두 에고의 늪에서 허우덕거리며 불안과 두려움을 가진 정신이상의 존재라고. 인간이 자신의 광기를 알아차릴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고.
영화 '괴물'은 '괴물'에 관심이 없다. 명확한 가해자와 피해자 따윈 없다. 선과 악을 모두 가진 정신이상의 '사람'만 있을 뿐이다. 호리 선생은 사실 아이들을 정말 좋아하는 초임 교사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사오리의 엄마는 남편의 외도를 겪었지만, 여전히 아들 미나토가 '정상 가정'을 꾸리길 바란다고 말한다. 미나토와 같은 반 친구들은 순수하지만, '남자답지' 못한 요리를 괴롭힌다. 이 아이들이 요리를 괴롭히는 모습을 보면, 때묻지 않은 순수한 괴물들 같다. 미나토는 요리를 좋아하지만, 학교에서는 절대 요리를 아는 척 하지 않는다. 괴롭힘 당하는 요리를 못본 척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얽힘은 그의 거짓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요리... 단지 꽃을 좋아하는 여린 아이일 뿐이데,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 일찍 깨달았을 뿐인데 학교와 가정에서 표적이 되어버렸다. 영화의 시작, 불타는 빌딩은 이 아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가? 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인가?
인간은 너무도 연약해서, '정상'이라는 절대 다수의 범주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외부에서 오는 안정이 진짜 안정일까? 진짜 안정은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부터 나온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것, 이미 존재 자체로 완전한 나를 알아차리는 것이 진짜 힘이고, 안정이다. 영화의 후반부 태풍을 통과한 아이들이 서로 묻고 답한다.
'우리는 다시 태어난걸까?'
'그럴 리는 없어. 우린 그대로야.'
'그런가? 그럼 다행이고.'
우린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다. 존재 자체로 이미 완전하다. 정상의 범주에 속할 필요도, 비교할 필요도, 빼앗길까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정상은 없다. 수 천개의 시선과 수 천개의 삶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