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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암막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

23년의 모든 것이 지나가고, 지금 여기 남아 있는 '나'에게

by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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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첫 아침이다. 암막 커튼 사이로 미세하게 들어오는 밝은 햇살을 본다.

'제게도 2024년을 허락하셨네요. 감사합니다.'


2023년의 마지막 날을 보낸 것이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득히 먼 옛날 처럼 느껴진다. 해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2023년을 돌아봤다. 1월에는 자궁근종 수술했다. 생각보다 아팠고 서러웠다. 4월에는 담당 의사로부터 '이제 다 괜찮다. 병원에 또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6월에는 시험관 시술 전 마지막 여행으로 시부모님과 첫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7월에는 시험관 시술이 어그러지고, 말할 수 없는 상실감에 빠졌다. '에라 모르겠다'하는 마음에 지난달 갔던 해외여행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다시 끊었다. 사실 6월의 여행은 혼자가고 싶었다. 왠지 당분간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아서. 혼자보단 시부모님과의 여행을 선택했다.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생긴 것이다. 기대했던 기회가 날라가고,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혼자 여행이다. 4년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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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마쓰의 쇼도시마라는 작은 섬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 에어비앤비를 운영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이 가족은 저녁마다 나를 초대했다. 간장 국수, 오코노미야끼.. 소박한 밥상에는 정성이 담겼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주 4회 오픈, 그마저도 12시-4시까지 운영하는 이상할 정도로 느린 카페다. 자기들만의 속도로, 조급하지 않게 살아간다. 서울에서 온 나로선, 생경했고 꿈꿔왔던 삶을 어떻게 실현하며 사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살아야겠다. 외부의 에너지가 아닌, 나의 에너지로 살아야겠다'


2023년의 반이 지난 시점에, 나의 삶의 에너지가 전환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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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시험관 시술을 진행했다. 튼튼하고 어여쁜 아기가 무럭무럭 자기의 속도로 성장하는 중이다. 17주까지 불면의 연속이었다. 불면의 바닥엔 온 몸으로 겪은 불안이 자리잡고 있었다. 작년 7월 17주의 아기를 보내야했다. 손 쓸 틈 없이 양수가 터졌던 그날의 기억, 태아를 배출하고 오열하던 그날의 기억이 몸 속 구석 구석에 새겨져있었다. 23년, 찾아온 아기와 17주를 지나는 동안 몸이 기억하는 불안을 견뎌야했다. 무사히 17주가 지나고 20주를 넘기며 불안은 사그라들었다.

'이것이 트라우마라는 것이구나. 온 몸에 새겨진 기억이란 것이 이것이구나.' 새로운 경험이었다.



23년의 끝자락에서 한 해 나의 굵직했던 사건들을 돌아봤다.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수치심에 치를 떨기도 했으며, 기쁜 소식을 듣고 행복했고, 불안을 통과하느라 지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지나갔다. 그 모든 사건과 생각과 감정 중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난 뒤의 '나'만 여기 남아 있다.



아, 그렇구나. 그때의 그 사건과 생각과 감정은 내가 아니다. 그것과 나를 동일화 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엔 그것이 영원할 것만 같았고, 그것이 나 인줄만 알았다. 그러니 많이 아팠겠구나. 힘들었겠구나.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난 뒤의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좀 더 깊은 곳엔 아득한 우주가 있다. 그 우주 안엔 사랑하는 신이 있겠다. 그 신이 나의 2023년을 함께 지나왔구나. 모든 고통과 눈물과 열등감과 수치와 행복과 즐거움 속에 그 신이 함께 있었구나. 내가 몰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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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의 아침에 암막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을 마주한다. 햇살은 늘 그자리에 있었다. 암막커튼을 친건 그 누구도 아니고 '나'다. 암막커튼을 치건, 활짝 열어 재끼던 햇살은 거기에 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총이다. 온 몸과 마음을 열어 햇살을 받아들이고 싶다. 아니,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 공짜다. 암막 커든을 닫을 때도, 열 때도 햇살은 공짜다. 그 햇살은 우리 안에서 동일하게 비추고 있다. 내가 나도 모르게 쳐 놓은 암막커튼을 열기만 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 24년, 마음을 열어야겠다. 암막커튼을 활짝 열고 쏟아지는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겠다. 또 어떤 사건과 생각과 마음이 나에게 찾아올지 알 수 없지만, 괜찮다. 모든 것은 지나갈테니. 그리고 늘 그자리에 있는 신이 나와 동행할테니. 나는 그저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면 된다. 끊임없는 에너지로 사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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