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구건, 꽃밭이건 나는 그저 민들레.
나는 어디까지 될 수 있을까?
당신은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습니까? 반대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나요?
나도 모르게 사람들의 반응에 기분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왜 기분이 상했는지 다시 생각해보면, 거의 대부분 '내가 무시 당했다'는 감정과 마주합니다. 내 제안이 거절당했을 때, 상대방에 나를 쉽게 생각하는 것 같을 때... 대부분 '너와 내가' 분리된 관계에서 찾아오는 감정이지요.
반대로 칭찬 받을 때 몸둘 바를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온 몸이 가렵고, 괜시리 민망합니다. 그럴 땐 나에게 집중해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내가 잘한 일이 맞는데도 콕 집어서 칭찬을 하면 참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사라질까봐' 혹은 '높은 곳에서 떨어질까봐' 두려운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낮은 곳과 높은 곳 사이,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요?
작년 봄, 산책 길에 한 민들레를 마주했습니다. 민들레가 제 아무리 길 위를 가리지 않고 피어난다지만, 하수구에서 피어난 민들레는 처음 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앉아 민들레를 들여다봤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꽃인데, 왜 하필 거기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을까?' 돌아오지도 않을 질문을 괜시리 던져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답이 돌아왔습니다.
'어디에 있던, 나는 민들레야. 나는 똥도 될 수 있고, 신도 될 수 있어. 나는 민들레니까'
밀란 쿤데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양극단에 있는 것들이 사실 가장 가까이에 있다고 말합니다. 신의 아들로 칭송받던 스탈린의 아들은 전쟁이 발발한 후 독일군의 포로가 됩니다. 다른 포로들은 그를 더럽다고 비난합니다. 가장 고상한 비극과 가장 일상적 사건이 이토록 현기증 날 정도로 근접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주와 특권이 더도 덜도 아닌 같은 것이라면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사이의 차이점은 없어질 테고, 신의 아들이 똥때문에 심판 받는다면 인간 존재는 그 의미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제착 될 것이라고요. 결국 스탈린의 아들은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습니다.
그렇다. 인간 존재의 극과 극이 거의 닿을 정도로 서로 가까워져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천사와 파리, 신과 똥 사이에 더 이상 아무런 차이점이 없게 되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하여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달려가 매달린 스탈린의 아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443)
극과 극은 어쩌면 서로 맞닿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사라질까봐' 두려운 것도, '높은 곳에서 떨어질까봐' 두려운 것도 둘 다 존재를 잃을까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으니까요. 모두 존재를 인정 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품고 있으니까요.
다만, 내가 민들레라는걸 분명하게 알고 있다면, 거기가 하수구던, 꽃밭이던 그게 무슨 상관일까요. 내가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고, 내 안에 참 자아가 있다는 걸 분명히 아는 사람에게 똥이건 신이건 무슨 상관일까요. 불경한 생각일 수 있지만, 하느님도 사실은 똥으로 온 것 아닌가요? 신이 인간으로 왔습니다. 그것도 아주 무력한 아기로 왔어요. 아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똥, 오줌도 혼자 가누지 못합니다. 인간은 다른 짐승들보다 더 오래 무력한 시간을 견뎌야합니다. 180g으로 태어난 푸바오도 1-2년 만에 100kg이 넘게 성장하는데, 인간은 훨씬 오래 연약하고 무력한 시간을 견뎌야합니다. 세상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신이,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가장 연약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왔습니다. 양극단이 하나가 되는 순간입니다.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지만, 똥밭에 구르고 싶진 않습니다. 똥들과 어울리고 싶지도 않고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내 존재가 똥이 될까봐서요. 그러나 개똥 밭에서 신나게 구를 수 있는 자만이 신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느냐에따라 내 존재가 정해지는게 아닙니다. 내가 무얼 입고, 무얼 먹고, 어디에 사느냐.... 거대한 성과 같은 아파트에 사느냐, 허름한 빌라에 사느냐가 내 존재를 결정 짓는게 아닙니다. 어떤 명품백을 들었느냐, 에코백을 들었느냐가 나를 말해주는게 아닙니다.
나는 하수구에 있던, 꽃밭에 있던 민들레입니다. 내 안의 '참 나'는 어떤 외형으로도 정해지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있으니까요. 신은, '참 나'는 모든 것도 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으며, 모든 존재 안에 있습니다. 그 존재가 내 안에 있고, 내 존재의 근원이 됩니다. 지금 여기가 하수구던, 꽃밭이던 개의치 않고 '민들레'인 나를 발견하고 싶습니다. 명료한 의식으로 '참 나'를 마주하고 싶습니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집을 바꾸고, 옷을 바꾸고, 만나는 사람을 바꾸려 애쓰지 말고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