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감기

by 반짝반짝 민들레

감기몸살에 꽤 단단히 걸렸다. 월요일 오전에 애들 먹을 걸 챙겨줘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질 않아서 겨우겨우 바나나를 잘라 한접시씩 두었더니 평소 바나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야야는 다 비우고, 평소 바나나를 좋아하는 냐냐는 반만 비웠다. 너무 성의없는 아침식사라 다 비워준 야야에게도, 절반을 비워준 냐냐에게도 고맙고 미안했다.

어찌저찌 등원을 겨우 시키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평소 주사를 끔찍이도 싫어하지만 '아... 오늘은 주사 각인데..' 싶었다. 역시나였다. 수액을 맞으면 금방 나을거라는 걸 잘 알지만 바늘을 팔에 꽂고 한참 버틴다는 것 자체가 공포였기 때문에 대충 주사만이라도 맞고 나왔다.


집에 도착해 죽을 먹었다. 주사를 맞으면 왠지 죽을 먹고 약을 먹어야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어릴때 부터 해왔다.

아무튼, 잘 챙겨먹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젠 춥기까지 했다. 다행히 애들아빠가 내 상태를 듣더니 반차를 쓰고 와서 애들 하원과 소아과 투어(?)를 든든하게 해결해 주었다.

그렇게 무난하게 하루가 간 듯 했지만..


이렇게 지독한 감기는 아이들에게 옮은 것이었고, 아이들도 하필 코가 빽빽한 코감기에 계속 걸려있었기 때문에 새벽에 잠을 계속 설쳤다. 결국 냐냐가 답답한 코를 못이기고 짜증을 내며 야야까지 깨우고 말았다.

어차피 아이들이 다 깼으니 난 화장실이나 들러야지, 하고 거실로 나가는데 야야가 따라나왔다. 그러더니 거실 창문 밖을 내다보고는 소근소근 중얼거렸다.

"야야, 지금 뭐라고 하는거야?"

"엄마, 달님이에요. 달님이요!"

나는 야야와 같이 새벽하늘의 하얀 달을 보았다. 얼마전의 보름달에서 조금 갸름해진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빛나는 하이얀 달.

"너무 예쁘다. 이 새벽에 달님을 보니 기분이 좋구나?"

"하늘이 너무 깜깜해서 달님이 우리 지켜주려고 빛을 내고 있나봐요."

야야의 애니미즘(?)적인 말이 귀여웠다. 그래서 "야야, 엄마는 야야를 제일 사랑해." 하고 껴안아주었다.

같이 방에 들어와서 잠을 청했다. 나와 야야를 깨운 냐냐는 그 후로 잠이 들었고, 야야와 나는 2시간 이상을 자지 못했다. 야야가 잠이 와장창 깼는지 심지어는 새벽 3시반에 "엄마, 나 거실 나가서 놀아도 돼요?" 라고 물어봤다가 나한테 혼이 났다.

"나가서 놀아. 도깨비가 이 새벽에 어이쿠 친구왔구나, 하면서 좋아할거니까."

야야는 나가기를 포기하고 잠을 청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한시간 이상을 못 자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그 후에 또 냐냐가 깨서 코가 답답하다고 짜증을 냈다..)


이렇게 새벽 난리브루스를 겪고 잠을 제대로 못 자니 감기가 나을리가..


화요일 오전에도 그냥 방전상태였다. 신체의 무기력증이 바닥을 관통해 지하 밑바닥까지 친 상태였다. 남편은 내게 눈물의 새우라면을 끓여주고 (첫번째 라면냄비를 엎었다..) 나가서 당근케익과 말차라떼를 사다주었다. 달다구리가 들어가니 기운이 좀 나는 것 같았다. 먹고 쉬면 괜찮겠지 싶었고 실제로 좀 쉬다 일어나니 아주 약간은 괜찮아진 것 같았다. 아이들 하원하기 한시간 전부터 씻고 집을 치운 뒤 하원하러 갔다.

"야야 가방메자. 이리와봐."

그러자 힘들다며 싫다는 야야. 가방에 마스크 한 개, 비타민 한 게, 빈 약병 두개만 있는데.. 그냥 메지.

"냐냐는 가방 멨잖아. 너도 네 가방 네가 메야지."

그러자 냅다 우는 야야.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눈물 저리 가!!" 하면서 서럽게 우는 야야.

나도 몸이 좋지 않으니 그 모습이 평소라면 귀여울텐데 오늘은 화가 났다. 그래서 조금 실랑이를 하다가 모르겠다, 싶어서 냐냐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집에 가기 전에 돌멩이로 소꿉놀이를 하고 싶던 야야는 또 울었다. 마침 주문해 둔 밥이 있어서 "이모랑 엄마 밥 얼른 먹고 다시 나와서 돌멩이 가지고 놀자" 하고 설득한 뒤 집에 돌아왔다. 근데 동생(아이들 이모)이 사 온 스티커북 스티커가 매우 얇아서 야야가 자꾸 찢어진다며 짜증을 동반한 울음을 터트렸다. 내 컨디션이 그걸 받아줄 여력이 없어 애먼 동생한테 왜 저런 걸 사왔냐고 혼을 냈다.

그때, 야야가 나에게 다가와 울면서 말했다.

"엄마, 왜 냐냐는 잘 하는데 나는 이렇게 못하는 걸까요..? 나는 왜 잘하지 못하는 걸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에 확 꽂혔다. 계속 몸이 아픈 상황에서 나는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해서 짜증도 나고 화도 나는데, 야야는 마치 자기객관화를 통한 자기성찰을 하고 있는 듯했다. 나보다 훨씬 나은 모습에 정말 반성이 됐다. 그래서 이 아이가 자책을 하지 않도록 스티커가 잘 안 뜯어지는 이유를 다른데서 찾아줘야 했다. 얼른.

"야야 새벽에 두 시간이나 못 잤잖아. 원래 누구나 피곤하면 잘 하던것도 잘 안 되는거야. 야야가 피곤해서 그렇지, 안 피곤하면 잘 할 수 있을거야."

그러자 야야는 "그럴까요..?" 하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의 힘이 참 큰 것 같다.

이제 나흘 있으면 40개월이 되는, 아직은 작은 아이들이지만 요즘 슬슬 걱정이 된다. 아이들의 생각이 아주 많이 자랐다는 느낌이 확 들어서, 내가 어떻게 해야 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이 된다.


잘 시간이 되어 거실을 소등하고 아이들 방에서 책을 읽다가 눕기 직전에 거실에 뭔가를 가지러 나갔는데 요 강아지들이 쪼르르 따라왔다.

"엇, 거실이 왜 이렇게 깜깜하지?"

나는 혼잣말을 하면서 물건을 찾았고, 아이들이 "엄마, 너무 깜깜해요." 하길래 "응, 엄마가 아까 거실 등을 다 꺼서 그래." 하고 부리나케 애들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러자 야야의 그 다음 말.

"그런데 왜 아까 '거실이 왜 이렇게 깜깜하지?' 라고 말했어요?"

순간 아차, 싶었다. 아, 이 정도로까지 나의 말을 흘려듣지 않는구나. 정말 조심해야겠다.

당황해서 "어.. 엄마가 거실 불 껐던 걸 순간 까먹었나봐. 하하하" 얼버무렸지만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말은 힘이 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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