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가로지르는 이들이 쥔 생명이라는 큰 선물
-스포일러 있습니다 [로마] - [그래비티] - [라라랜드]
후기 알폰소 쿠아론 감독 영화의 키워드는 생명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쿠아론은 생명이라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어머니라는 존재와 부합시키는 내러티브를 통해 관객들에게 접근하고 있다. 그의 전작 [칠드런 오브 맨]과 [그래비티] 또한 그렇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는 P.D 제임스의 모계사회적 구조를 그린 디스토피안 문학 장르를 빌려 어머니라는 존재를 <종교적 장치>와 결합해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이처럼 그의 영화에서 나오는 상징성은 생명과 존재에 대한 고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로마]에서는 '기억'이라는 장치가 추가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이라는 매개체는 '시간'이라는 개념과 짙은 연대가 있다. 다른 모든 예술 형식과는 달리, 영화는 시간의 흐름을 포착하고, 그것을 멈추게 하며, 무한히 소유할 수 있게 한다는 타르코프스키의 말이 이 영화를 잘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로마]라는 영화 속 알폰소 쿠아론의 시간, 즉 그의 기억은, 강렬한 상황들을 포착하고 있으며,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을 통해 시간을 멈추게 하고, 삶이란 존재의 경외와 그에 따르는 그리움으로 시간을 무한히 연장시키며 소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로마]는 황금사자상과 골든 글로브를, 아카데미에서 외국어 영화상과 감독상 등을 수상했다.
영화의 배경은 멕시코의 초기 '1970'년대를 그리고 있다. 간략히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자면 영화는 1971년 6월 10일에 일어났던 알코나소 민주화 운동을 축으로, 민주주의를 되찾고자 시위하던 학생들과 시민들이 탄압을 겪게 됐던 상황을 그린다. 이 사건은 실제로 쿠아론 감독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그에게 처음으로 사회의식을 갖게 해 준 사건으로 그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쿠아론은 이 작품을 머릿속으로 그려나가기 시작할 때부터 영화는 전적으로 '흑백'으로 연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만 그는 종횡비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1:1 정사각형을 고민하던 쿠아론에게 그의 절친이자 다수 전작의 촬영감독인 임마뉴엘 루베즈키는 다른 포맷을 생각해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이에 상응하여 그는 최종적으로 2.39:1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결정하게 되었다. 1:1은 객체, 즉 '인물'이 강조되겠지만 2.39:1은 맥락, 즉 '배경'이 더 강조되기 때문에 이러한 쿠아론의 선택은 영화에 방향성에 대해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전작들과 달리 쿠아론은 이번 작품에서 직접 카메라를 잡기로 선택했다. 항상 함께 작업해왔던 촬영감독 임마뉴엘 루베즈키는 아쉽게도 함께 촬영할 수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로마]는 쿠아론이 직접 카메라를 들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루베즈키의 현장감을 강조하는 현란한 카메라 워킹의 롱테이크가 아닌 보편성을 강조하는 패닝 기법을 활용한 롱테이크, 즉 카메라를 좌, 우로만 움직이는 연출을 통해 작품의 중력을 전적으로 객관성에 부여했다. 예를 들어 민주화 운동을 임마뉴엘 루베즈키의 방식으로 연출했다면 카메라가 현장 '내부'안으로 뛰어들어 격렬한 흔들림과 혼돈을 포착하려 하였겠지만, 쿠아론은 이러한 상황을 현장 내부가 아닌, 현장 '외부'의 공간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되는 '객관적' 시점으로 담아냈다.
그는 맥락, 즉 배경으로 상황을 대체시키며 객관성을 강조하게끔 연출한 것이다. 또한 카메라를 상, 하로 움직이는 틸팅 기법을 오프닝과 엔딩에만 응용하여 설계한 구조적 조응은 카메라에 담긴 쿠아론이 어머니처럼 사랑했던 리보(극 중 클레오)에 대한 시선으로서 탁월한 영화적 언어를 선사한다.
개인적으로 쿠아론은 [로마]를 통해 그가 생각하는 객체와 맥락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 그의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어떤 전작보다도 완성도 높게 표착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는 클로즈업, 즉 '인물'을 근접한 공간에서 강조하게 되는 촬영기법과, 롱샷, 피사체와 거리가 먼 시점에서 '배경'을 강조하게 되는 촬영기법의 조화를 통해 어떤 식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했는지 관객들에게 말했다고 볼 수 있겠다. 본격적인 해석을 시작하기 앞서 그가 이루고자 했던 목적과 방향성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쿠아론은 향수를 유발하는 흑백 특유의 고전적인 작품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고 얘기했다. 그는 50년, 60년대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닌 현재 세상을 '흑백'이란 렌즈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런 작법을 추구했을까? 개인적으로 객관성과 주관성에 문제라고 생각한다. 색을 사용하면 인물을 배경이나 다른 인물들로부터 차별화할 수 있는 이점이 생긴다.
예를 들어 영화 [라라랜드]는 [로마]가 차용한 영화적 작법의 대척점에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작품 내내 [라라랜드]의 감독 '다미안 차젤레'는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만 의상의 색을 조응하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이 둘의 색상을 의도적으로 조응시키지 않는다.
꿈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사랑에 빠졌을 때:
이런 접근성으로 영화를 만들게 되면 주관성을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게 된다. 하지만 '객체'와 '맥락' 중 맥락을 선택했던 쿠아론은 영화의 축을 객관성으로 설정했으며 이러한 작법은 작품에게 있어 보편성이라는 큰 특성을 부여하게 했다. 그는 클로즈 업을 배재하며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트랙킹 샷을 활용했고 인물들의 아픔을 사회적인 공동체의 아픔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 구절은 쿠아론이 로마에 대하여 이야기했던 구절 중 한 구절이다. 개인적으로 왜 그가 특정 방법을 고수하여 [로마]를 완성했는지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관적인 시각으로 특정 인물을 따라가지 않았어요. 클레오도 중심인물은 아니에요. 이 드넓은 세계에 존재하는 인물 중 하나일 뿐이죠. 이 영화는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고, 인물은 그 세상을 가로지르는 인물일 뿐이에요."
- Alfonso Cuaron -
[로마]는 현실적인 가부장적 사회의 시선을 담아냄과 동시에 여성들의 아픔과 그들이 해야 했던 대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주어로 활용하여 하나의 문장을 완성시켰던 아버지의 자리를, 자동차를 부수족인 요소로 내몰며 ‘누구’와 함께하며, ‘어디’를 가는지에 중점을 맞추는 어머니라는 존재로 대체하며, 차를 긁히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라는 인물의 특성을, 차를 긁어버리고, 바꿔버리는 어머니라는 인물의 특성으로 대조하여 조명한다.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점에서 감독이 말하는 객체와 맥락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는 더할 나위 없이 강조된다. 쿠아론의 전작인 [칠드론 오브 맨]처럼, 극 중 클레오는 혼돈 속에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상항에 처하게 된다. 양수가 터져 산부인과에 가게 된 클레오를 보통 영화라면 감정적, 육체적으로 극에 달한 인물의 심리적 상태를 표현하고자 클로즈업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쿠아론은 롱샷을 통해 이야기를 확장시키기로 한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의 입장에서 어떤 인물이 클레오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되며, 모든 산모들을 비추는 작법을 통해 '보편성'을 강조한다. 그렇게 우리는 클레오라는 특정 인물이 아닌 산모라는 '어머니'의 존재의 상황을 따라가게 된다. 역시나 이런 작법은 작품에 내재된 '보편성'을 의도적으로 확장한 감독의 의도를 내포하는 좋은 예시 중 하나이다.
이 영화는 이분법적 관점을 기반으로 한 프레이밍, 더 나아가 하나의 영화라는 예술적 매체 안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역설을 담아내고 있다. 예를 들어 감독은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전경과 후경을 나누어 '집'이라는 하나의 공간 내에 존재하는 계급사회를 표현했으며, 사람들, 즉 생명이 죽어가고 있는 학살의 현장 속에서 생명을 낳아야 하는 클레오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이러한 방식의 연출이 계속해서 나오게 되는데, 예를 들어 아버지가 떠나는 상황과 이를 지켜보는 클레오와 페페가, 영화관에 버려진 클레오와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그리고 화재 한가운데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족 중 한 인물 정도가 있을 것이다. 플롯상에서 이러한 부분들을 조명하자면 강인할 거라고 생각했던 페르민은 나약한 폭군이었고, 생명의 상징이라고 생각됐던 클레오의 아이 또한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진정한 가장이라고 믿었던 아버지(남성성)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고 진정한 가장은 어머니와 클레오(여성성)였다는 것이 되겠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쿠아론 감독은 한 줄기의 빛 같은 역설을 담아낸다. 그것은 바로 클레오에 대한 역설이다. 가정부라고 여겨지며 살아왔던 클레오가 자신의 '아이'를 잃고서야, 그녀도 자신이 속해있던 '가족'의 진정한 어머니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로마]는 개인의 아픔에서 소규모 공동체의 문제로(토지분쟁), 그리고 거기서 더 큰 국가적인 상처로(민주화 운동) 확장시키는 구성을 띄고 있다. 이를 동일선상으로 [로마]는 영화라는 매개체를 끌어들여 풀어나가고 있다. 클레오는 3번 영화관에 간다. 첫 번째로 그녀가 영화관에 갔을 때는 영화를 직접 보기도 전에 공원을 가자는 페르민의 말을 듣고 페르민과 관계를 가지게 된다.
이는 영화의 서두에 존재하는 첫 번째 개인의 아픔(클레오의 아픔)을 야기시키는 문제점이 된다. 두 번째로 클레오가 영화관을 갔을 때는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그녀의 아픔(아이가 생기자 홀로 버림받음)을 전경에, 그리고 사람들의 환호를 후경에 담아낸다. 이 쇼트를 기점으로 영화는 역설적인 모순에 대해서 담아내며 이는 소규모 공동체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세 번째로 클레오가 영화관을 갔을 때에는 이분법적인 작법을 넘어 [우주 탈출]이라는 쿠아론 감독의 전작인 [그래비티]를 연상시키는 영화의 프레임이 독자적 쇼트로서 스크린 전체에 담기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화의 존재감은 점점 크고 깊게 확장된다. 이 특정 연계는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알코 나소 대학살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는 상황을 그리며, 영화 내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일들에 대한 빌드업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클레오의 아픔(개인적인 아픔)으로 시작할 때 영화의 존재감이 작으며, 사회적인 상처로 확장되었을 때 그 존재감이 확대되듯이, 감독은 어쩌면 가장 광범위한 사회적 상처도 결국 개인의 아픔과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로마]는 사실 3번으로 그치지 않고 총 5번에 걸쳐 영화라는 매개체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이 오프닝과 엔딩으로 조응하듯이 첫 번째와 마지막으로 영화라는 매개체를 담아내는 쿠아론의 방식은 클레오라는 인물의 신분과 지위의 변화를 내포한다.
첫 번째는 말 그대로 영화의 오프닝 샷이다. 어떤 것도 비출수 없는 바닥에 물을 뿌리니, 물은 하늘을 비추고 그 안에 프레임이 생겨 땅만 주시하던 우리는 하늘을 보게 된다. 즉, 이 장면은 땅만 바라보며 사는 낮은 지위를 가진 누군가가 물이라는 영화(알코나소 민주화 운동, 그리고 개인의 아픔과 치유)를 체험하고, 여태 보지 못했던 하늘이라는 자유에 눈을 뜨게 된다는 영화 자체에 전조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여기서 밀려 들어오는 물의 소리와 물이 부서지는 이미지는 육지를 향해 들어오는 파도의 소리와 포말을 연상시킨다. 이 연출은 영화의 클라이맥스 위치에 다시 한번, 구조적으로 다섯 번째 영화를 담는 장면으로서 재현된다.
위에서 말했듯이 [로마]에서 영화라는 매개체의 존재감은 후반부를 향해 나아갈수록 더욱 실질적으로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처음에는 영화관이 아닌 바닥에 비친 스크린이 프레임으로 보이는 방식, 두 번째는 영화관을 입장하기 전, 세 번째는 영화관의 구조를 이분법적 방식으로 나누어서, 그리고 네 번째에는 독자적 쇼트로써 말이다. 이 기점에서 관객들은 [로마]에서의 영화라는 매개체는 과연 어떻게 독자적 쇼트를 뛰어넘어 존재감이 확대될 수 있냐는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다섯 번째로 영화라는 매개체를 담아내는 쿠아론의 방식은 스크린을 넘어 현실의 클레오를 담는 영화 [로마] 그 자체를 찍는 것이다.
영화는 더 이상 가상적인 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현실이 된다. 알폰소 쿠아론의 경이로운 연출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결국 관객들이 땅만 보던 고개를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앞서 얘기했듯, 클레오가 땅에 물을 뿌리게 되고 화면에는 물이 휩쓸려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는 그 물을 통해 바닥은 하늘 위에 떠있는 비행기를 텅 빈 스크린에 영화가 비치듯 비추게 된다.
감독은 이 장면을 카메라가 바닥을 바라보는 시점으로 표현한다 즉,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리고 이어져 이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다시 배치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는 변화가 생긴다. 아이를 잃은 클레오가 수영을 못함에도 불구하고 파도에 뛰어들어 아이들을 구해오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더 이상 바닥이 아닌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고, 그렇기에 태양이 정확히 바다와 맞물리는 시간에 찍었을 것이다. 관객으로서 우리는 이제 고개를 "들고", 정면을 응시한다.
강아지의 똥을 치우던 작은 인물 클레오는, 생명을 살리게 되는 큰 인물, '어머니'가 된다.
아이들을 살리고 바다로부터 나온 장면이다. 이 장면은 출산을 연상시킨다. 개인적인 해석이다: 쿠아론의 전작 [그래비티]에서 딸을 잃은 우주 정비사 라이언이 마지막에 지구를 향해 귀환할 때 우주선의 본체가 조금씩 부서지며 바다를 향해 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영화 [그래비티]에서 극 중 인물 라이언은 태아로 표현된다, 즉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상태로 말이다.
그리고 이 두 번째 프레임은 라이언이 전에 살았던 삶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정자(우주선의 파편)와 양수(바다)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를 기반으로 [로마]의 파도 장면을 해석해본다면 바다에서 죽어가고 있는 아이들을 구한 클레오는 전 상황에서 죽었던 자신의 딸과 달리 직접 바다(양수) 안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무사히 구해내 "출산"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바다에서 나와 함께 부둥켜안고 우는 진정한 가족의 모습은 영화계에 남을 명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엔딩에서의 카메라는 클레오가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틸팅 하여 프레임에 담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더 이상 바닥도, 정면도 아닌 결정적으로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있고, 우리는 영화가 시작할 때 땅바닥에 배치된 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바라봤던 비행기와 하늘을 영화의 엔딩에서 직접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클레오는 더 이상 바닥만 응시하는 인물이 아니다, 개의 똥을 치우기 위해 물을 뿌리지 않아도 그녀의 눈에는 이미 하늘이 담겨있다. 영화는 민주주의를 외쳤던 다른 시민들의 바람처럼, 클레오의 주권은 이제 그녀 자신에게 있다고 이야기하며 맑은 하늘을 끝으로 영화는 종장에 이른다.
한 줄 평: 생명은 위대하다, 고로 인생은 아름다우며, 존재는 혁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