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면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 쉽다. 그래서인지 늦은 시간에 상담을 원하는 분들이 많다. 새벽 한두 시는 기본이요, 심지어는 동이 틀 때까지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 적도 있다. 내담자들은 늘 죄송스러워하며 고마움을 표하지만 사실 그럴 때마다 머쓱해진다. 캐나다에 사는 내게 그들의 새벽은 환한 대낮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설명을 하기 거시기해 “아이구, 아닙니다. 편히 주무셔요. 선생님” 하고 전화를 끊는다. 거짓말한 건 아니지만 괜히 마음이 찜찜하다.
캐나다에 온 지 햇수로 9년 차다. 그전에 다른 나라에서 지낸 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이십여 년을 외국서 떠돌았다. 절이 싫은 중이 떠나듯 시작한 외국 생활이지만 중도 가끔 절이 그립다. 왜 내가 외국에 나와 살게 됐는지를 설명하려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누구에게나 불행한 가족사가 있다. 나 또한 아직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해 차마 자세히 적기 어려운, 가족에 관한 슬픈 기억이 많다. 그 중심에는 늘 아버지가 있다. 미워하고 미워하고 또 미워한 나머지 기억에서 잊고 지냈던 사람. 언젠가부터 내 삶에 가족이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며 살았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며 별의별 악랄한 사람들에게 시달리다 보니, 아버지라는 사람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가 그리 잘못한 것도 없다. 배다른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렸을 때 우리를 굶긴 적도 없으며 중학교 고등학교도 다 보내줬다. 이만하면 아버지 노릇은 제대로 한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 즈음, 명리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아버지의 사주를 보게 됐다. 아버지는 나보다 더 무더운 여름에 태어난 보석 같은 사람이다. 내가 예민한 것도, 사회생활을 힘들어하는 것도 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였다. 아버지의 초년은 불지옥처럼 뜨거웠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 밑에 자라던 그 시절이 무척이나 괴로웠으리라.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할아버지 또한 아버지 삶에 또 다른 괴로움으로 보인다. 마음 둘 곳 없는 아이의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예술을 하고 싶었던 청년의 방황, 열정적이다 못해 격정적이어서 좀처럼 마음 잡지 못하는 어른의 모습 또한 아른거린다. 시간 여행을 하듯, 아버지의 삼사십 대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연민의 감정이 생겼다. 이 사람도 많이 힘들었구나. 나약한 사람이었구나. 그렇게 아버지의 미래까지 보고 오니 이번 생에 우리가 함께 할 시간이 그리 길어 보이지 않는다.
올해 말, 시간을 내 한국에 가기로 결심했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보고 싶었던 친구도 만나고, 엄마랑 지겹도록 수다도 떨다가 더는 할 일이 없어지면 그때는 아버지를 만나야지. 내 기억 속 젊은 아빠는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까.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라도 두 눈에 담아 두고 싶다. ‘잘사주’라는 이름에 걸맞게 길일을 택해 비행기 표를 검색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어째서 내가 고르는 날마다 항공권 가격이 비쌀까? 한류가 유행이라더니만 에어캐나다 사장이 사주를 사업에 활용하기라도 하는 건가? 사장님, 사주 보실 때 팍팍 할인해 드릴 테니 저도 어떻게 좀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