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사상가, 철학자들은 세상에 메시지를 던졌다. 이상 국가의 사상을 설계하고 혁명의 이론을 만들고 더 나은 사회의 청사진을 그렸다. 하지만 세상은 철학자들의 생각대로 바뀌지 않았다. 바뀌었다 해도 그들이 의도한 방식은 아니었다. 철학은 밝게 하는 학문이다. 철학은 어둠 속에 빛을 비추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는, 질문하지 않던 것을 질문하게 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밝힌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문제를 인식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진리를 안다고 해서 진리대로 살지 않는다.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게 인간의 조건이다.
철학은 무전제의 사유다. 아무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검토하고 다시 묻는다. 순수하고 아름답지만 동시에 무력하다. 세상은 전제 위에 세워져 있고 사람들은 의심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유는 글 또는 말로 표현된다. 하지만 얼마나 불완전한 전달인가. 머릿속 고양이를 상대방의 머리에 전하는 작업. 내가 본 고양이와 당신이 이해한 고양이는 같은가. 아니, 같을 수 없다.
내 머릿속 고양이는 특정한 색깔, 질감,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 내가 어린 시절 키웠던 고양이의 기억, 골목길에서 마주쳤던 길고양이의 인상, 책에서 본 고양이 사진들이 모두 뒤섞인 복합체다. 하지만 내가 고양이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머리에 떠오르는 건 당신의 고양이다. 당신의 경험, 당신의 기억, 당신의 연상으로 만들어진 고양이 같은 단어지만, 다른 존재다.
고양이가 아니라 우주라면, 정의, 자유, 사랑, 진리 같은 추상적 개념이라면 전달의 불가능성은 더 커진다. 같은 말을 하지만 다른 것을 생각한다. 같은 책을 읽지만, 다른 것을 이해한다. 그래서 사유는 또한 침묵 속에 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기에, 글로 다 담을 수 없기에, 사유의 가장 깊은 부분은 침묵으로 남는다. 말해지지 않은, 쓰이지 않은 전달되지 못한 것. 이 침묵이 사유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철학자는 글을 쓴다. 하지만 그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글자와 글자 사이의 침묵 속에 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 속에 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후의 정적 속에 있다. 그 침묵이 시공에서 살아남아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수백 년 후, 수천 년 후, 전혀 다른 언어 , 문화 속에서 누군가가 그 침묵을 듣는다면 그때 가능성이 생긴다.
2500년 전 아테네에서 한 사람이 질문했다. “너는 네 자신을 아는가?” 그 질문은 수많은 글로 기록되었지만, 질문의 진짜 힘은 글 밖 침묵 속에 있다. 답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순간의 충격 그건 전달되지 않는다. 각자가 스스로 경험해야 한다.
영원한 침묵 속에서 미래 미지의 존재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이 그 질문과 마주친다. 그들도 같은 당혹감을 느끼고 같은 충격을 경험한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침묵은 침묵에게 전해진다. 이게 철학이 살아남는 방식이다. 하지만 감히 그게 가능하리라는 상상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은 침묵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말해지지 않는 생각들, 기록되지 않은 사유들, 전해지지 못한 통찰들, 역사 속에서 사라진 수많은 목소리. 이 거대한 침묵 속에서 철학은 너무나 작은 침묵이다. 한 사람의 평생을 건 사유도, 한 권의 책에 담긴 통찰도, 우주적 규모의 침묵 앞에서는 작은 속삭임에 불과하다.
침묵이 들릴지 전해질까 살아남을지 알 수 없다. 대부분은 사라질 것이다. 소음 속에 묻히거나 시간에 씻겨 나가거나 무관심 속에 잊힐 것이다. 단 하나의 질문, 통찰이 먼 미래에 닿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적이다.
철학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가장 작은 게 가장 오래 남는다. 거대한 침묵 속에 작은 침묵을 놓아두듯, 언젠가 어딘가에서 누군가 그 침묵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가능성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