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무지의 놀이

by 도윤

‘나는 모른다’를 실패로 여긴다. 학교, 직장, 사회에서 모른다고 말하는 건 무능의 표시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아는 척한다. 확신하는 척한다. 모르면서도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모른다는 실패가 아니라 시작이다. 진정한 사유의 출발점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질문을 멈추고 생각하지 않는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확정된 답이 없기에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다. 정답이 없기에 모든 방향으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 철학과 사유가 놀이가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놀이는 목적이 없다. 승패도 없고 이익도 없으며 생산성도 없다. 그저 놀이 자체를 위해 논다. 순수한 즐거움, 순수한 호기심, 순수한 탐험이다.


아이들이 “만약에 말이야”로 시작하는 상상 놀이를 하듯이. “만약”이라는 뜰 안에서 답을 구하기 위함이 아닌 상상하는 즐거움 자체를 위해 뛰어놀 수 있다. 철학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만약 자유의지가 환상이라면, 만약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이런 질문들에 확정적인 답은 없다. 그리고 답이 없기에 더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다. 닫힌 방이 아니라 열린 공간, 담장은 있지만 하늘은 열려 있는 곳 상상의 뜰은 그런 곳이다. 상상도 그렇다. 완전한 무질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격한 규칙 없이 놀 수 있는 공간이다.


그 뜰에서 우리는 이상의 날개를 펼친다. 현실에는 없지만 상상할 수 있는 것 아직 도달하지 않았지만 그려볼 수 있는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꿈꿀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이상이다. ‘나는 모른다’라고 인정할 때 우리는 이상을 꿈꿀 자유를 얻는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없기에 ‘이렇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상상이 가능하다. 현실에 묶이지 않고 가능성을 탐험한다. 질문과 응답은 논쟁의 구조다. 내가 묻고 당신이 답하고 내가 그답에 반박하고 당신이 다시 방어한다. 이기고 지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가리는 전쟁의 언어다. 하지만 순수한 물음은 다르다. 답을 요구하지 않는 질문 상대방을 시험하지 않는 질문 그저 함께 궁금해하는 것. “정말 그럴까”, “어떻게 생각해”, “우리 같이 생각해 볼까”.


이런 물음 속에서 피어나는 것은 상상과 이상의 놀이다. 논쟁이 아니라 대화 경쟁이 아니라 협력 공격이 아니라 탐험 함께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모험이다.


논쟁의 쟁(爭)은 다툼이다. 두 손이 서로를 향해 뻗어 잡으려 하는 모양이다. 빼앗으려 하고 이기려 하고 굴복시키려 한다. 논쟁에서는 상대방이 적이다. 설득해야 할 대상이고 이겨야 할 상대다. 하지만 놀이에서는 상대방이 파트너다. 함께 놀아줄 사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사람. 상대방 없이는 놀이가 성립하지 않기에 서로 존중한다.


소통과 존중 이것이 ‘나는 모른다’에서 시작하는 대화의 특징이다. 내가 모르기에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당신도 모르기에 함께 탐험하자 제안한다. 누구도 정답을 독점하지 않기에 모두가 평등하다. 이런 대화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인정한다. 당신의 관점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구나’라고 배운다. 다름은 위협이 아니라 풍요다.


‘나는 모른다’라는 겸손임과 동시에 용기다.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 더 어렵다. 확신 없이 살고 답 없는 질문들과 함께 걸어가는 건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견딜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정답에 얽매이지 않고 권위에 의존하지 않으며 독단에 빠지지 않는다. 알 수 없음 속에서 우리는 가장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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