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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콜드부루 Nov 24. 2024

K의 하루

12.  별거 중인 가정의 아이들의 삶

새로 구한 직장은 쉽게 구해진 이유가 있었다. 곧 망해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처참한 상황에서 계약만기 일까지 버텨 줄 IT 업체의 한 운영프로젝트의 PM (프로젝트 매니저) 자리였다. 

아침 9시 출근해 6시 퇴근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기뻐했던 K는 출근한 지 사흘 만에 자신에게 맡겨진 일의 실체를 제대로 보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어!' 하는 절박함이  일을 시작하자마자 줄 야근이 이어졌다. 

잘못된 부분을 찾아서 고치는 일은 막노동판에서의 노동자나,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 밤늦도록 일하는 IT 노동자나 매한가지라는 걸 사람들은 알까? 


두뇌를 풀가동하고, 온 눈이 충혈되며, 척추와 경추의 디스크라는 만성질환과 맞바꾸며 모니터 앞에서 몇 달이고 앉아 일해야 하는 지독한 고단함은 더할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1년이 다 될 무렵 K의 노력은 프로젝트를 살리고 위약금을 물어 내야 할 IT 업체에 몇십억짜리 추가 프로젝트를 수주하게 될 기회를 얻게 해 주는 빛나는 결과를 맺었다. 


안정을 찾게 되자 정말로 여름밤 해가 다 저물기도 전에 퇴근하는 때가 온 것이다. 


남편과의 별거에 들어가고 다행히 벌이는 나쁘지 않아서 오피스텔 월세를 내고도 충분한 돈이 차곡차곡 통장에 쌓여 갔다. 


큰 딸아이와 둘째 아들과 가끔은 연락하였고, 때로는 혼자 사는 오피스텔로 데려와 맛난 것을 먹이며 떨어져 지낸 시간을, 속상하고 괴로운 마음과 그리움을 연신 종알거린다. 


오피스텔의 위치는 비밀로 해 두자니 원래 살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임에도 아이들은 동네로 크게 돌아 집으로 되돌아갔다.   아빠는 몰라야 해..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은 피폐해졌다. 

엄마가 없이 두 아이를 건사해야 하니, 지칠 대로 지쳐서 생활은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밤에는 반주로 시작된 술이, 마지막 잔이 비워지면 또다시 검은 봉지를 들고 들어와 거실을 점령한 채 낄낄거리며 TV를 보다 그대로 잠이 드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아빠가 무서워 눈치만 보던 아이들은 아빠와 떨어져 있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학원 다녀야 했다. 

학원을 마치고 지쳐 집에 들어오면 벌써 술 한 병을 다 마시고 새로운 한 잔을 기울이는 아빠의 술에 취해 몽롱해진 눈빛이 무섭다.

'잘못 했다가는 또 끔찍한 밤이 올 거야!' 

아빠가 시켜 준 치킨을 먹고는 대충 씻고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남편 J는 점점 더 심한 무기력증에 빠져들어 갔다. 가게는 이제 나가도 그만, 안 나가도 그만...   통장에 있는 돈이 점점 떨어져 가도 무얼 해 볼 의지가 하나도 없었다.  


집안은 온통 쓰레기와 밀린 빨래들로 엉망이 되어갔다. 

더 이상 신을 양말과 속옷이 없을 때면 한 번씩 빨아 입는 일도 너무나 귀찮은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쓰레기를 버리는 일도 그렇다. 

처음엔 20리터 봉투를 몇 개를 쌓아 놓다가 한꺼번에 가져다 버리곤 하였는데 이제는 더 귀찮아져서 100리터짜리 봉투를 발밑에 쫙 펼쳐 두고 잠을 자고 곁에서 밥을 먹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내고 보니 집안은 점점 정체 모를 작은 벌레들이 낮이고 밤이고 윙윙 날아다닌다.   싱크대와 화장실은 형형색색의 곰팡이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다. 


아이들에게 듣는 J와의 삶은 '끔찍하게 더.러.웠.다'.  

당장 아이들을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얘들아, 엄마와 함께 살자.' 


엄마와 살면 매일 가는 학교 길이 멀기는 하지만, 깨끗하고 아늑하니 엄마의 품이 훨씬 안정적이고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J가 당구장으로 간 틈에 아이들은 K에게 연락하였다. 

'엄마, 지금 올 수 있어요? ' 

K는 아이들의 연락을 받고 집으로 가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건과 옷들을 황급히 챙겨 오피스텔로 되돌아왔다. 


'드디어 우리가 다시 함께 사는구나!' 뭉클하고 울컥한 심정으로 K는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아웃백 식당으로 가서 배가 부르도록 맛난 음식을 먹였다. 아이들도 K도 편안한 안도감을 느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K의 둘째가 K에게 말했다. 

'엄마, 나는 학원 다니는 게 너무 싫어요, 가장 불행했던 시간이 그때 같아요.  ' 

부모를 잘못 만나 아이들이 고생이 많다는 죄책감에 K는 또 속으로 눈물이 흐른다. 


K의 직장이 안정될 때까지 아이들은 엄마 품을 그리워하며 스스로 밥을 차려 먹고 학교 숙제를 하다 잠이 들었다.   다행히 예전과 같이 K의 부모님이 K의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아이들의 등교를 살펴주러 와 주었다.


'그래도 지금은 엄마도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함께할 수 있으니 너무 좋아요. 행복해요!' 


얼마 만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들어보는 것이지? 

뜻밖의 선물처럼 아이들의 입에서 '행복'이라는 말을 들으니, K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소중한 감정이 가슴에 꽉 차오른다.


'너희들에게 좋은 것만 해 줄게! 이제부터!

평범한 가정의 자식으로 살지 못한 너희들에게 이제 정말 좋은 것만 해줄께!'


아이들을 품에 앉고 K도 깊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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