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by 배고픈 애벌레

비 오는 날을 좋아합니다. 드넓은 세계에 떨어진 빗줄기는 강이나 바다에 빠르게 융화되고 잔잔한 물결이 되어 흘러갑니다. 그러나 좁디좁은 흙담 밑 웅덩이에 떨어진 빗방울은 요란하게 파문을 일으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작은 웅덩이도 더 많은 빗물이 담겨 유연하게 가련한 물방울을 받아 안습니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와 타닥타닥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비밀의 문이 열리는 것만 같습니다. 귀로는 들을 수 없었던 꿈 많은 소년의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녹록지 않았던 삶의 쓰린 기억들이 빗물에 녹아내립니다. 고르지 못한 땅에 물이 고이듯 빗물은 내 안에 고여 많은 상념을 낳기도 합니다.


비가 내립니다. 비는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이 답답한 이들을 대신해 울어줍니다. 누가 시켜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데 나는 이곳이 너무 낯설어 자꾸 멈춰 서게 되고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큰 물결에 휩쓸려 쉽게 흘러가도 좋으련만 그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서늘한 공기와 쓸쓸한 빗소리가 텅 빈 나를 채웁니다. 침묵 가운데 흐르는 빗물이 어깨 한쪽을 타고 흐르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 줍니다. 홀로 아픈 게 아니라고, 지금까지 쏟아부은 노력에 대한 소득이 없다고 해서 그 수고가 헛된 것은 아니라고. 처음 가는 길이라서 힘들었던 것이지 그것이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놓쳐서는 안 되었던 소중한 것들을 뒤로하고 외면했던 무모함에 대해서도 질책하지 않습니다.


창밖으로 비가 내립니다. 굵었던 빗줄기가 다시 가늘어집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양손으로 감싸 쥐고 비와 음악에 취해 봅니다. 가슴 뛰던 그날의 사랑했던 기억들이 되살아납니다. 햇살 가득한 익숙한 거리를 무덤덤하게 걸어 다닐 수 있었던 그날을 추억해 봅니다. 망설임 없이 하고 싶은 일들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그날의 자유와 용기를 떠올려 봅니다. 인생은 비처럼 흘러 후일에는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날씨와 같습니다. 서툴고 미숙해서 놓쳐버린 순간을 후회하기보다는 오늘과 다가올 날을 기대하자 생각합니다. 쓸모없는 감정이 씻겨 내려가 마음에 여백을 만들고, 꼭 다물고 있던 입술을 떼어 놓습니다. 잊힌 사람들을 불러내 진심으로 괜찮다고, 미안했다고,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해 봅니다.


종일 비가 내리는 날,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진 빛바랜 날들이 되살아납니다. 힘겨웠던 삶의 무게가 가벼워집니다. 쉬어 갈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햇살 눈이 부신 날이 비 오는 회색빛 날보다 더 외로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험하고 먼 길을 쉼표 없이 가야 한다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빗속에 멈춰 서서 인생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고 이만하면 괜찮다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지친 몸을 누일 어머니의 품이 그리울 때 나는 비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 비가 오늘 내려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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