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Chinese sacred lily

by PAPUA




사계절 중 내가 가장 기다리는 계절은 단연코 봄이다. 해가 바뀌고 1월이 되면 벌써 봄이 곧 올 것 같은 기분이다. 기온이 조금이라도 올라가는 날이면 아직 ‘사온’이 찾아온 것일 뿐 코앞에 ‘삼한’이 대기하고 있음을 알지만 그래도 봄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것이라 믿으며 길고 긴 겨울을 보낸다.


그리고 가끔 꽃시장에 가서 미리 찾아온 봄을 만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이때 꼭 사는 식물 중에 구근 식물을 빼놓을 수가 없다. 구근 식물들은 빨리 성장하고 꽃도 예뻐서 집에서 미리 봄을 느끼기에 안성맞춤이다. 특히 이번에는 내가 참여하는 그룹 전시에서 구근 식물을 주제로 그리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수선화 구근을 평소보다 많이 사서 집안 곳곳에 놓아두었다.


수선화 구근은 빠른 속도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나는 식물이 성장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틈틈이 스케치를 해두었다.


내가 그리는 수선화는 꽃대 끝에 여러 개의 작은 꽃이 모여 달리는 귀여운 종류의 수선화이다.


수선화의 꽃, 씨방, 알뿌리(비늘줄기)

보타니컬아트를 하다 보면 그리고자 하는 그림의 스타일에 따라 식물의 구조까지 자세히 살펴봐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구조를 알고 나면 식물학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좀 더 그 식물 본연의 모습을 이해하고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식물의 성장 속도가 빠른 만큼 나의 마음도 덩달아 조급해졌다. 나는 평소 야생화를 즐겨 그리는 편이라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식물을 눈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이다. 꽃이 지기 전에 그림도 함께 완성하고 싶었다.


그러나 뭐든 내 뜻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경우는 잘 없지! 고백하자면, 이전에 그리던 그림을 포기하고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모델로 삼았던 수선화는 따뜻한 거실에 두어 제일 먼저 피어난 꽃이었는데, 그런 이유에서인지 꽃대가 과도하게 휘었다는 사실을 베란다에 둔 다른 수선화들을 보며 뒤늦게 깨달았다. 꽃대의 긴 곡선이 마음에 들었지만 튼튼한 일반적인 모습의 수선화가 아니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과감히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도 찜찜한 부분을 고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식물 그림을 그리다 보면 예상치 못한 감동의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빽빽하게 겹쳐진 잎들이 헷갈려 냅킨으로 뒤쪽을 살짝 가렸을 뿐인데 그 냅킨에 비친 그림자에 한눈에 반해버린 순간, 도화지에 깊이 드리워진 꽃 그림자가 너무 예뻐 넋을 잃고 바라보던 순간… 나로 하여금 잠시 그림 그리던 붓을 놓아두고 식은 커피를 마시게 만든 기분 좋은 기억들이다.


평소 사진을 찍을 때 옆에 둔 식물의 그림자가 그림에 드리워질 때면 항상 다른 곳으로 식물을 옮겨 두고 깨끗하게 찍는 편이다. 그렇지만 수선화 그림자는 유독 예뻐서 나도 모르게 그 그림자까지 함께 화면에 넣어 사진을 찍은 적이 여러 번 있다. 수선화의 속명인 Narcissus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결국 물에 빠져 죽은 그리스신화 속 청년 나르키소스(나르시스)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는데, 수선화는 신화 속 주인공 이름을 이어받을 만한 진정 아름다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식물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의 세부 모습


길쭉길쭉 나란히 자라난 잎들도 서로 겹쳐진 형태에 실수가 없도록 유의하며 조심조심 색을 입혔다


하나씩 하나씩 채워 나가다 보니 아무것도 없던 흰 도화지가 어느새 예쁜 수선화로 가득하다


그림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이 정도 그림이 진행되면 완성한 그림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나지만 마지막까지 서두르면 안 된다.


그림에 처음 붓을 델 때의 설레던 마음과 똑같이 그저 흙색 물감이 알뿌리에 예쁘게 스며드는 순간을 즐기고 풍성한 수염뿌리도 한 올 한 올 정성껏 그린다.


그러다 간혹 가슴이 답답해질 때면 얽힌 실타래를 다 풀었을 때의 쾌감을 기대하며 식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다. 수선화 비늘줄기의 단면과 텅 빈 줄기 속을 그리고 나니 왠지 내 마음도 텅 빈 듯 공허하다. 예전에는 그림 한 점을 완성하고 나면 숙제를 끝낸 것 같은 해방감이 컸는데,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작품이 끝나면 그동안 손에 꼭 붙들고 있던 소중한 것도 놓아줘야 한다는 상반된 감정이 일어 온전히 즐겁지가 않다. 나르시시즘이 아닌, 수선화를 향한 ‘너르시시즘’에 빠졌던 시간들! 그 설레던 순간들을 다음 작품에서도, 또 그다음 작품에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김지영 作

수선화 Chinese sacred lily

Narcissus tazetta L.

Watercolor

305×455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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