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히바
기차에 타기 전엔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침대칸이라고는 하지만 야간 버스와 큰 차이가 없을텐데 열 몇시간을 좁은 공간에 갇혀 달려갈 일이 아득했다. 그런데 막상 기차에 올라 자리를 확인하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천장이 좀 낮긴 해도 염려했던 것과 달리 쾌적했던 것이다.
기차 안에서는 침대마다 뽀송뽀송한 침구커버를 나눠준다. 새하얀 커버를 씌워 이부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누우니 호스텔이 부럽지 않았다. 한 칸에는 일층에 세개, 이층에 세개씩 총 여섯개의 침대가 있었다. 우리 셋의 자리는 모두 이층이었다.
사디크의 아래층 자리에는 한 우즈벡 청년이 탔다. 우린 통성명을 하고 금방 친해져 자기 전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친구는 타슈켄트에서 공과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한국대학에 다닌다고 해서 처음엔 무슨말인지 어리둥절했는데, 들어보니 정말 한국의 '인하대'에 다닌다고 했다.
"우와, 인하대 캠퍼스가 우즈베키스탄에도 있었구나. 우리나라에서도 공과 전공으로 유명한 대학인데 그곳에 다닌다니 대단하다."
아직 열아홉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친구는 곧 결혼을 앞둔 약혼자까지 있다고 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선 남녀가 스무살을 전후로 결혼하는 일이 흔하며 특히 시골에선 더욱 그렇다. 혼사는 모든 걸 남자의 집에서 준비하는 것이 관례인데, 집안 형편이 아주 풍족한 편은 아니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결혼식을 조금 간소하게 하면 어떠냐고 물었더니 맏아들이라 최대한 갖추어서 식을 진행하게 될 것 같다고 한다. 어딜가나 결혼 준비는 녹록치 않은 일인가 보다.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잠에 들었는데 한번을 깨지 않고 아주 푹 잤다. 열차 침대칸이 고가의 비행기 좌석보다 훨씬 편했다. 안타깝게도 사디크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리 크지 않은 침대는 사디크의 장신을 모두 받쳐주기엔 역부족이어서 그는 밤새 새우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부족한 잠을 채우기 위해 우린 숙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히바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구시가지는 '이찬칼라'라고 불리는 오래된 성 안에 있다. 히바에 있으면서 이찬칼라에 해가 진 후, 한낮, 그리고 해질녘, 이렇게 세번을 다른 시간대에 들어갔는데 나는 그중 밤에 보는 이찬칼라가 가장 좋았다. 조명을 받아 신비롭게 빛나는 흙벽, 투명한 빛을 뿌리는 환한 달 아래에 고고하게 서있는 미나렛 사이로의 고요한 밤산책은 꿈속을 걷는 것 같았다.
이찬칼라 안 대부분의 건물은 모스크이거나 '마드라사'라 불리는 이슬람 학교이다. 우즈베키스탄의 모스크마다 거의 공통적으로 있는, 둘레가 거대하고 높게 솟은 특유의 미나렛을 이곳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높이는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 꼭대기가 간신히 보일 정도이다. 그에 비해 들어가는 문은 사람의 보통 키보다 조금 낮은 편이다.
"왜 이 문들이 높이가 낮은 줄 알아?"
사디크가 물었다.
"음.. 글쎄? 왜지?"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면서 겸손한 마음가짐을 갖도록 하는 뜻이래."
"아, 그런 의미가 있었구나."
인적 드문 옛성 안을 거닐면 그 옛날 페르시아에서 왜 걸출한 시인들이 많이 배출돠었는지 알 것만 같다. 적당히 스산한 겨울 사막의 밤공기 속에서 밤 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있자면 절로 사랑하는 누군가의 별을 닮은 눈이 떠올랐을 것이다. 사디크도 그랬는지 갑자기 나직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우와.. 너무 듣기 좋다. 한번만 다시 불러줄 수 있어? 영상으로 남겨두고 싶어서."
그렇게 해서 위의 동영상을 찍게 되었다. 대학시절 음악을 전공한 사디크라서인지 우리가 페르시아 말을 알아듣진 못하지만 그 감동이 음율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사디크는 배우자 사랑이 지극하다. 그도 우리 부부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여 아내와 같이 산지 서너해가 되었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을 지나 카자흐스탄을 거쳐 러시아의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것을 목표로 한 사디크는 이 여행에 아내와 같이 오고 싶었지만 추위에 약한 아내는 집에 남았다. 시베리아 여행을 마치면 이란으로 돌아가 아내를 데리고 따뜻한 남쪽의 스리랑카로 가서 해수욕을 즐길 거라고 했다.
사디크는 하루에도 몇번씩 아내와 문자를 주고받고 매일 빠짐없이 통화를 한다. 특별히 오늘은 이찬칼라의 야경을 배경으로 낭만적 가사의 노래 한 구절을 불러 아내에게 보내기로 했다.
다음 날 낮에 다시 찾은 이찬칼라는 좀더 선명하게 얼굴을 드러냈다. 하나하나 쌓아 올려진 성곽의 벽돌, 짚과 진흙을 섞어 곱게 바른 가옥들의 외벽, 투박한 나무를 켜고 다듬어 그려낸 기둥의 부드러운 곡선. 값비싼 보석 하나 박아넣지 않았는데도 도시 전체에 예스러운 기품이 서려있었다.
노을이 지는 이찬칼라를 둘이서만 보기 아까워, 몸살 기운이 있어 숙소에서 내내 쉬던 사디크를 어쩔 수 없이 깨워서 데리고 나왔다. 아프지만 않았으면 사디크가 오늘도 노래 한 가락을 불렀을 테지만 아쉽게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우린 어느 카페의 옥상에서 성벽 뒤로 넘어가는 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곁에 있는 누군가에겐 애정을 더하고 멀리 있는 누군가에겐 그리움을 더하는 그런 풍경이었다. 척박한 사막의 한가운데에 핀 꽃같은 도시 히바에서의 하루도 그렇게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