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청해에 내린 은검

하늘의 검이 바다에 닿는 순간, 세상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by 묘월



검은 비단 깃발이 천천히 바람에 젖혀졌다.


천휘국 수도의 궁성은 은빛 기와로 덮인 지붕마다 햇살을 반사하며 눈부셨다. 그 아래, 흑색의 기둥이 하늘을 거울같이 비추는 기와를 단단히 떠받치고 있었다.

재상 위중현(魏仲賢)의 눈이 서신을 따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잠시 후 그는 서신을 가져온 신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송림국과의 교류는 끊지 않는다. 사절은 한 명으로 한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단호했다.

신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허면, 사절은…?”

위중현은 답했다.

“월연.”

“…! 천계파 내부에서 이견이 있을 것이옵니다.”

“천휘검법 직계 검맥. 계승자의 이름을 붙이면 무림도 납득할 것이다.”

그는 흔들림 없는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다. 창밖의 흑색 깃발이 천천히 고개를 젓듯 펄럭였다.



***



비단 흑기(黑旗)가 송림국 운해문의 연무장 한켠에 걸려 조용히 나부꼈다.

두웅—

북소리가 울렸다. 연무장에 모인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월연 사절의 천휘검법 뵙기를 청하오!”

월연이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더니 홀연, 몸을 띄워 연무장 중간에 살포시 내렸다. 은빛 허리띠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들자, 칼날이 번쩍였다.


그녀는 한마디 말도 없이, 발끝을 가볍게 굴러 검세를 풀어냈다.


첫 동작은 마치 새벽하늘을 가르는 햇살 같았다. 한 발로 바닥을 딛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쭉 뻗은 어깨와 팔 끝으로 이어진 선이 곧았다. 몸은 기울었으나 균형을 잃지 않았다. 검끝이 허공을 가르자 찰나의 빛이 반원의 궤적을 그렸다.

두 번째는 바람결을 타고 흩날리는 구름 같았다. 허공에 남은 첫 궤적을 따라 몸을 비틀며 원을 그리더니, 검끝을 낮게 휘돌려 옆으로 흘렸다. 소매가 바람을 갈라 흩날리고, 발끝이 돌바닥을 스칠 때마다 얕은 파문이 퍼졌다.


검세가 이어지며 허공을 그을 때마다 검끝에 비치는 빛이 공기 중에 은가루를 뿌리듯 흩어졌다.


그녀의 몸은 흘러가되, 검은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고요한 흐름에, 보는 이들마저 숨을 죽였다.


‘……!’


그러던 순간,


“이야, 정말 빛이 나는군!”


장내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여안이었다.
그는 봉을 가볍게 들며,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걸었다.

“사절의 검세를 가까이서 배워도 되겠습니까?”

잠깐의 정적.
월연이 시선을 들어 여안을 보았다.
여안의 발끝이 돌바닥에 닿았다.

이윽고 철챙—!
여안이 장난스럽게 휘두른 봉을 월연이 가볍게 흘려내렸다.


“장난은 위험합니다.”


월연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칼끝은 이미 여안의 어깨께를 노려왔다.


여안이 미소를 머금은 채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진지하게 배워보죠!”


챙챙—!
검과 봉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그는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강한 힘을 느꼈다. 여인의 체구에서 어떻게 매 검세마다 이리도 묵직한 기운이 벼려있는지 내심 놀라웠다.


‘하… 검이 저리도 무겁게 내리 꽂히는데, 힘은 전혀 실리지 않은 것 같군.’


구경하는 이들은 여안이 받아내는 검이 얼마나 육중한 무게로 내리누르는지 가늠하지 못할 것이었다.

월연의 검세가 회오리처럼 몰아치자, 그는 봉으로 그 궤를 따라가며 공기를 갈랐다. 봉과 검이 허공을 돌며 궤적을 그리고, 그 속에서 두 사람의 기운이 교차했다.

찰나의 몇 합이었으나, 연무장은 숨조차 쉬기 어려운 긴장으로 잠겼다.

그때, 장문 현해가 가볍게 손가락을 들어 북을 가리켰다.

두웅—

북이 다시 울렸다.
월연과 여안은 동시에 무기를 거두었다.
여안의 상기된 얼굴이 월연의 눈에 잠시 머물렀다.


***


운해문에 당도한 지 이레째 되던 날 새벽, 운무가 백악절벽 봉우리를 감싸며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


수십 필 말이 마당에 도열했고, 청해파에서 준비한 선물이 보따리와 짐수레에 나뉘어 실렸다. 사절단 일원들은 운해문에서의 일주일을 뒤로하고, 천휘국으로 돌아갈 준비로 분주했으나, 새벽 어스름의 하늘빛은 고요하고 바람은 차분했다.


월연은 말곁에 서서 허리띠를 매만지던 중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돌아보니 은색 도포를 정제하게 차려입은 자운이 조용히 걸어오고 있었다. 가늘고 긴 눈의 자운이 너그러운 얼굴로 월연을 향해 미소 지었다.


“길 위에 서면 반드시 함께 걸어주는 이가 있기 마련이네. 사절의 짐이 무겁다 하여도 혼자만의 무게로 여기지 마시게.”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월연은 자운의 덕담에 어쩐지 마음 깊숙한 곳이 눌리는 것만 같았다. 자운은 담담히 웃으며 다른 일행을 챙기러 걸음을 옮겼다.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천계파의 깃발과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고, 운해문에는 이제, 이국의 여인이자 단 한 명의 천휘국 천계파 무인, 월연만이 남았다.



***



“이제 더는 땀만 흘리다 끝나는 수련은 아니겠지?”


“사형들이 하던 걸 우리도 이제 해보겠네!”


“내가 오늘 봉 끝에 올라서 하늘 찍는다!”


“아서라, 경공 기초도 삐끗하는 놈이. 하하. 떨어지지나 마라.”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경쾌하게 흘러가고, 3대 제자들이 연무장으로 줄지어 들어섰다. 그들의 눈은 긴장과 설렘이 뒤섞여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연무장 한가운데 월연이 미리 와 서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입던 은색 옷과 은빛 액대를 벗고, 청해파의 푸른 도복을 입고 있었다. 제자들은 월연을 보고 흠칫 놀랐으나, 서로 눈빛만 주고받다 말없이 그녀 곁에 도열하여 섰다.


이윽고, 조뢰와 여안이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조뢰가 먼저 나섰다. 봉을 들어 돌바닥을 툭 짚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부터 봉을 무기로만 쓰던 습관을 버려라!”
조뢰는 말을 이었다.


“강물에 띄우는 나룻배 한 척! 초원을 달리는 말 한필! 이제, 봉이 그 모든 것을 대신한다!”


제자들이 웅성거리자, 여안이 나섰다. 봉을 땅에 가볍게 짚고 발끝으로 몸을 봉 위에 실으며 균형을 잡았다.


“먼저는 봉에 몸을 싣는 감각부터다. 봉이 땅이 되고, 발판이 된다. 한 호흡, 두 호흡 버티는 게 우선이다.”


그는 단정히 봉을 딛고 잠시 정지했다가 부드럽게 내려왔다. 제자들의 눈이 커졌다. 조뢰는 피식 웃더니 봉 끝을 땅에 세게 짚었다. 탁 소리와 함께 봉으로 몸을 튕겨 공중으로 띄우고 허공에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봉을 짚고 착지하였다.


“이래야 구름 위를 걷는 거다!”


몇몇 제자들은 감탄을 터뜨렸고, 몇은 긴장한 듯 봉을 더 꽉 쥐었다.


“자, 이제 기본자세부터 해봐라.”


여안이 봉을 건네주며 손짓했다.


한 제자가 덤벼들었으나, 봉 끝에 발을 올리자마자 중심을 잃고 몸을 휘청거렸다. 경공으로 버티려다 발이 미끄러지며 옆으로 굴렀다.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봉을 믿어라.”


여안이 다시금 시범을 보이며 말했다.


“아니면 봉이 널 버린다. 그땐 나도 못 구해.”


웃는 말투였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제자들은 저마다 봉을 한 손에 잡고 발끝으로 올라타 균형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월연은 여안의 자세를 유심히 살피더니 봉을 세워 잡았다. 팔을 뻗어 봉 끝을 돌바닥에 대는 자세부터 묘하게 균형이 느껴졌다. 그녀는 발끝으로 바닥을 밀어 올려 봉 위에 가볍게 올랐다. 중심을 잡는 동작이 매끄러웠다.


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내공 운용에 도가 텄군.’


지난번에 그녀의 검과 몇 합을 나눌 때 느낀 바 그대로였다. 자유자재로 기를 조절하고, 단숨에 원하는 방향으로 모은 힘을 내지르던 검법.


월연은 다섯 호흡을 버티고 내려왔다. 바람이 한 줄기 스쳐 지나갔다.


조용히 착지하는 그녀의 동작을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감탄도, 호기심도 아닌 무언가를 꿰뚫어 보려는 듯 빛을 내며.



청해록(靑海錄)

운해문편(雲海門篇) 기묘년(己卯年)


천휘국 천계파 사절단은 사절 한 명만 남기고 운해문에 당도한 지 이레째 되는 날 돌아갔다.

그 사절의 이름은 월연(月淵)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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