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국의 밤에 붉은 달이 뜨고
밤이 깊었으나, 소국(邵國)의 내시부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총감 내시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드리웠다. 하얀 머리카락이 등불에 비치고, 주름진 손에는 붉은 달 문양이 새겨진 목패가 쥐여 있었다. 그의 입가가 흥분으로 파르르 떨렸다.
그는 목패를 뒤집어 행(行)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때가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총감 내시는 내시부를 나와 궁정 내원으로 향했다.
내원 연못 한가운데 섬처럼 세워진 누각에 소국왕이 홀로 서 있었다. 물결 위로 부서지는 달빛을 보며 왕은 작은 술병을 손목으로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전하”
총감 내시가 조심스레 누각으로 올라섰다.
“천휘국이 조용한 것이 영 불안하구나.”
소국왕이 소회를 털어놨다.
천하를 다스리는 여덟 나라 가운데 송림국과 천휘국이 양강을 이루었고, 소국은 현국(玄國), 악국(嶽國)과 함께 천휘국의 편에 서왔다.
송림국 진영에 맞서 팽팽한 균형을 이어온 세월이 어느 덧 팔십년이었다.
타고난 성정이 괄괄하고 야심이 큰 소국왕은 천휘국의 고압적인 태도와 요구들이 못마땅했다.
더구나, 천휘국 명문가 출신인 왕비는 그 얼굴이 제 아비를 닮아, 볼 때마다 늘 묘하게 짓눌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회임 가능하다는 날에 합방을 해왔지만, 왕비는 그가 여덟 첩을 두고, 왕자 다섯에 공주 열둘을 볼 동안 한 명도 생산하지 못했다.
“어차피, 숨길 수도 없는 일. 송림과 동맹을 맺었으니, 천휘 것들 함부로 쳐들어오지도 못할 것이야….”
총감 내시는 소국왕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왕이 돌리던 술병을 입에 갖다대고 한 모금 마셨다.
총감 내시는 왕의 기색을 살피더니 천천히 입을 떼었다.
“…왕비에게…사내가 있다 하옵니다.”
“…!”
총감 내시는 조용히 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증좌를 확보하라.”
***
다음날 새벽, 시녀 한 명이 총감 내시 방에서 나와 왕비의 침전으로 향했다.
쨍그랑- 찻잔 깨지는 소리가 침전에 드리운 휘장 속 적막을 갈랐다.
왕비는 떨리는 두 손을 움켜잡았다.
“…전하가…눈치를 챈 거 같다고…?”
왕비의 옥빛 옷자락이 한참동안 침전 바닥을 이리저리 불안하게 쓸고 다녔다.
그러다, 옷자락 아래 꽃신이 탁 하고 멈춰섰다.
“…소국의 달이 붉어지리라!”
***
소국왕은 늘 자신의 성탄(聖誕) 연회를 이레 간 열었다. 그 중에서 마지막인 일곱번 째 날 만찬 연회가 가장 화려했다.
왕은 왕비와 후궁, 왕자와 공주, 중신들을 모두 모아 놓고 날이 새도록 가무를 즐기고 술을 마시곤 했다.
“아야… 배가 너무 아파요…”
소국왕의 막내 왕자는 어미 품에 안겨 아프다고 난리였다.
“왜 하필 아바마마 만수절에 이런 야단인게냐… 불손하다 노하실까 걱정이네.”
왕의 총애를 잠시 입은 후궁 하나가 일곱살 짜리 아들을 침대에 누이며 말했다.
밖에서는 만찬 연회가 곧 시작될 참이었다. 나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후궁들과 중신들도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못 위로 걸린 장방형의 누각에 홍등 수십 개가 기둥마다 매달려 있었다. 바람에 스치는 붉은 불빛이 물결 위에 일렁였다.
누각의 천장은 금빛 도료로 그린 용문양으로 가득했고, 용의 비늘마다 박힌 옥이 반짝이며 불빛을 흩었다.
기름 향과 술 향이 뒤섞인 공기가 누각을 가득 채웠고, 만찬상에는 은빛 접시 위에 말린 해삼, 제비집, 복어포, 그리고 산간의 버섯과 사슴고기, 철새의 혀까지 진미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왕자들과 중신들의 자리에는 술병이 하나씩 놓였다. 왕의 호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왕자들의 술잔 위로 실낱 같은 기름막이 돌았으나 눈치채는 이는 없었다.
무녀들이 누각 가운데서 춤을 췄다. 가느다란 손끝에 매달린 분홍색 비단이 공중에서 꽃잎처럼 펼쳐졌다.
피리와 비파, 북이 울리고 가무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몇 차례 술잔이 돌고, 왕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애주가인 첫째와 둘째 왕자는 연거푸 술을 들이키더니 곧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요의를 느끼며 뒷간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첫째가 뒷간으로 달려간 사이 둘째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궁성 담벼락 아래의 수풀을 찾아 들어갔다.
호위무사는 두명씩 첫째와 둘째를 따라 흩어졌다.
“아, 어디까지 따라올거냐!”
둘째 왕자는 호위무사들에게 소리치고는 급하게 허리끈을 풀며 돌아섰다.
“아이씨, 술 좀 먹었다고 웬놈의 소변이 이렇게…”
왕자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투둑 투두둑
멸심침(滅心針)이 호위무사들의 다리와 목덜미에 날아 꽂혔다.
호위무사들의 눈빛이 멍해지더니 눈 앞에서 왕자의 등 뒤로 가까워지는 칼을 보고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움직일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왕자의 등에 피가 튀기고, 핏물에 적셔진 칼이 거꾸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데도 그들은 칼을 꺼내들고 싶지가 않았다.
샤악- 스윽-
두번의 칼 놀림으로 호위무사들이 맥 없이 쓰러졌다.
검붉은 그림자들은 호위무사들의 몸에서 멸심침을 뽑아내고 시체의 근처에 왕비의 정부(情夫) 가 쓰던 단도를 놓아두었다.
만찬 연회장은 한껏 흥이 달아올라 있었다.
소국왕은 모든 번민과 불안을 잊어버리겠다는 듯 시작부터 술을 진창 마시더니, 무희들 사이에 들어가 춤을 추고 있었다.
왕비는 늘 그렇듯 연회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버리고 없었다.
소국왕은 실컷 춤을 추고 나서, 비어 있는 왕비 자리에 애첩 하나를 불러 앉히고 다시 술을 마셨다. 거나하게 취한채로 앞을 보니 빈자리들이 눈에 띄었다. 첫째부터 넷째 아들까지 모두 자리에 없었다.
“꺼억- 이…이 불경한 것들! … 딸꾹, 어디 간거야! 배은망덕한 놈들…”
***
왕비의 내전, 검붉은 그림자 여덟이 왕비 앞에 드리웠다. 왕비는 숨을 삼켰다.
“무…무엄하다! 내 아비가 누구인지 알 터!”
몇발짝 물러서다 쏘아붙였다.
바람이 내전의 문을 활짝 열어 제쳤다.
검붉은 도포에 검은 삿갓을 쓴 아홉번째 그림자가 들어와 천천히 왕비를 향해 다가섰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큭큭 거리며 괴기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큭큭 하하하. 적월단을 이용하시겠다?”
남자는 가소롭다는 웃음을 돌연 뚝 그치더니 서늘하게 말했다.
“갖고와라.”
왕비의 정부가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들어왔다.
핏물 속에서 그가 눈을 떴다. 왕비의 심장이 짓뭉게졌다.
버드나무 가지처럼 축 늘어진, 처연한 사내의 모습에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왕비는 이제 곧 명을 달리할 것을 직감하였다.
“왕자를 생산하든 정치를 하든!”
남자는 비웃듯 낮게 내뱉었다.
“소국이 송림으로 붙는데 사랑 놀음이라니. 쯧.”
적월단 단주 야소(夜沼)의 손짓에 시퍼런 칼끝이 사내의 등을 수욱 파고들었다가 천천히 빠져나왔다.
청해록(靑海錄)
소국편(邵國篇) 무인년(戊寅年)
소국(邵國)에 난이 일었다. 소국왕 왕비 성씨가 정부(情夫) 유씨와 함께 내란을 꾀하여 왕자 넷을 죽였다. 다섯 왕자 중 막내 한 명만이 병상에 있어 화를 면하였다. 도망가려다 실패한 유씨는 호위무사에게 주살(誅殺)되고, 왕비는 자결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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