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청조해안의 파문

잔월죽림의 바람, 청조해안의 숨

by 묘월



백악절벽의 여섯 번째 봉우리 잔월죽림(殘月竹林)에 바람이 스치자 대나무 숲이 일렁였다. 대나무 줄기들이 파도처럼 흔들릴 때마다 은은한 초록빛이 잎끝에 스쳤다.


이른 아침의 촉촉한 안개가 낮게 깔린 죽림에서, 청해파 제자들이 모여 약초 채집을 준비했다. 백선은 한참 동안 바람의 결을 살피더니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제6봉의 죽림에서 야생 운초와 해이초(海耳草)를 채집할 것이오. 죽림은 늘 길이 바뀌니, 서로 시야를 놓치지 마시게.”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제자들 사이에서는 사뭇 긴장이 감돌았다. 잔월죽림의 길은 돌연 바람결에 사라졌다 나타나고, 이어지다 끊어졌다. 그곳에서 길을 잃는 일은 결코 드물지 않았다.


백선을 따라 제자들은 죽림 안으로 줄지어 들어갔다. 태양이 점차 높게 뜨며, 빽빽한 대나무 사이로 밝은 빛이 비집고 들어섰다.


죽림의 깊은 곳에 이르자 작은 연못이 나왔다. 연잎이 가득한 수면에 푸른 연꽃이 군데군데 피어있었다. 연못가에 서서 백선은 조를 나누어 흩어진 뒤, 두 시진 후에 다시 모이라고 하였다.


“야생의 풀은 그 향기가 사람을 미혹하니 조심하시오”


백선은 약초에 능한 여안이 3대 제자들과 월연을 데리고 동쪽으로, 2대 제자들과 조뢰는 서쪽으로 다녀오라고 하였다. 제자들은 연못에서 동서로 나뉘어 대나무 숲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갔다.


마뜩잖게 서쪽으로 향하던 조뢰가 돌연 몸을 훽 돌리며 말했다.


“서쪽은…시시해. 거기 별로 캘 것도 없고. 아무래도 동쪽으로 간 녀석들이 고생할 것 같아서 말이야.”


조뢰는 2대 제자들에게 잘 다녀오라고 하고 성큼성큼 달려가 동쪽 일행을 따라붙었다.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에 여안이 고개를 돌렸다.


‘저 녀석 요새 왜 저러는 거야?’


여안은 일행들에게 잠시 멈추자고 하고, 허리춤에 작은 약낭을 고쳐 매었다.


“동쪽이 훨씬 위험한데 말이야, 사제들 데리고 혼자 가면 고생스럽지!”


조뢰의 말에 여안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동쪽 길은 확실히 경사가 급하고, 절벽에 가까운 쪽이라 바람 따라 길도 자주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제자들은 여안을 놓치지 않으려고 바삐 따라가면서도, 이런저런 약초를 캐 죽통에 담았다.


“해이초 찾았다!”


곳곳에서 기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야생의 운초는 아무도 찾지 못했다.


월연은 약초 캐는 일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으나, 이 기회에 백악절벽의 기운을 자세히 살펴볼 생각이었다. 월연은 죽림과 절벽 아래 바다가 주고받는 미세한 파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운초다!”


잔월죽림의 동쪽 끝과 하얀 절벽이 맞닿은 곳에서 누군가 외쳤다. 모두들 소리 나는 곳으로 뛰어갔다. 과연, 하얀 절벽 틈에 구름 한 조각이 걸린 듯 운초가 피어있었다.


“멈춰!”


운초의 향기에 이끌려 제자 한 명이 위태롭게 몸을 수그리자, 여안이 날카롭게 막아섰다.

바로 그때, 조뢰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제자의 손목을 잡아채 뒤로 밀어내고, 발을 굴러 경공으로 솟아올랐다. 절벽 틈에서 가까스로 튀어나온 위태로운 가지 끝에 몸을 실은 그는 운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운초가 손 끝에 닿을 듯 말 듯하였다. 그가 다시 한번 발을 구르며 손을 뻗자, 운초의 향기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며 내공이 휘청 흐트러졌다.


그때, 여안이 들고 있던 나무 지팡이를 조뢰에게 던지듯 내밀었다. 조뢰가 지팡이를 붙잡고 균형을 찾았고, 그 순간 발아래 가지가 툭 부러졌다.


그는 지팡이로 몸을 받쳐 다시 경공을 가다듬으며 절벽을 타고 오르며, 한 손으로는 끝내 그 운초를 절벽에서 뽑아냈다.


“이야! 사형!”


“역시 해내시네요!”


제자들이 환호했다. 조뢰가 의기양양하게 운초를 쥔 손을 들어 올렸다. 우쭐한 얼굴로 사제들을 둘러보는데,


“어?”


월연이 보이지 않았다.





월연은 어느새 홀로 죽림 어딘가에 있었다. 바다 깊은 곳의 파문이 바람에 실려 오는 것을 느끼며 걷다가 어느새 일행과 멀어졌던 것이다.


‘이건 바다의 바람이 아니다.’


염분과 온기를 품은 바다 바람과 달리, 그녀가 느끼는 기류는 묘하게 서늘하고 맥이 이어지다 끊기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일행과 너무 멀어진 것 같아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어떤 힘이 손목을 잡아당기는 듯한 기류에 이끌려 다시 발을 옮겼다. 그렇게 어느새 죽림이 끝나고, 제5봉 청조해안(靑潮海岸)에 이르렀다.


절벽 아래로 물결이 부딪혀 터지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바다와 맞닿은 틈새에 푸른 동굴이 하나 열려 있었다.


월연은 동굴 입구 옆의 바위를 손끝으로 쓸었다. 차갑고 축축한 결 사이로 희미한 문양이 잡혔다. 그 문양은 그녀가 어릴 적 아버지의 검맥에서 느꼈던 기운과 닮아 있었다.


“… 이건, 뭐지.”


그녀는 동굴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따라 들어오며 푸른 안개를 길게 끌고 들어왔다. 안쪽에서 마치 바다가 숨을 쉬는 듯한 낮은 울림이 들려왔다.

여안과 조뢰 그리고 제자들은 세 조로 흩어져 월연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5봉 쪽으로 가볼게.”


여안은 곁에 있던 사제들에게 말을 남기고, 서둘러 절벽길을 따라 달렸다.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물안개가 얼굴에 부딪히며 흩어졌다. 청조해안에 다다르자 동굴 입구가 보였다. 잠시 멈춘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동굴 안쪽에서 푸른 안개가 은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안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동굴에 가까이 다가가니, 바다의 짠내와 해조 냄새 사이로 희미하게 운향당의 향기가 섞여 있었다.


‘봉인 구역… 왜 여기에’


그는 숨을 한번 고르고, 조심스레 동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천장에 군데군데 난 틈으로 하늘의 빛이 가늘게 들어와, 동굴 안을 희미하게 밝혀주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서자,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절벽 위 하늘은 빠르게 색을 잃었고, 짙은 먹구름은 어느새 세차게 비바람을 쏟아냈다. 동굴 입구에 물이 점차 차올랐다.

동굴 안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다 막다른 길이 나왔다. 월연은 길 끝을 막고선 동굴 벽을 손으로 짚어보았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 않는 기류가 회오리치며 몸 안의 내력을 휘감았다. 그녀는 즉시 기를 돌리려 했지만, 무언가 낯설고 묵직한 파동이 맥을 막아섰다. 몸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기혈이 흐트러졌다.


“이상하군…”


월연은 낮게 중얼거렸다. 막다른 동굴 벽 너머에서 희미한 빛이 번져 나왔다. 그 빛은 벽면에 흐릿한 문양을 드러냈다. 그녀가 손끝으로 그 문양을 더듬자 가벼운 전율이 퍼지고 다시금 내공이 흔들렸다.


몸은 멀쩡했지만 기혈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가쁜 숨을 내쉬며 바위에 몸을 기대는 순간, 내공이 요동쳤다.


풍덩-


월연은 바위 아래까지 차오른 물에 빠졌다.

여안은 오르막 길을 따라 오르다가 동굴 깊은 곳에서 ‘풍덩’하는 소리를 들었다.


“거기 있나요-!”


그의 외침에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돌아왔다.


“여기요.”


천장의 틈새로 흐른 한 줄기 빛 아래, 월연이 바위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잠깐… 미끄러져서”


그녀는 담담히 말했지만 숨소리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여안이 급히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하늘이 갈라지며 천둥이 울렸다. 폭우가 더욱 거세게 쏟아지자 물살이 동굴 입구를 막았지만, 다행히 안쪽은 높게 솟아 있어 물이 그곳까지 닿지는 않았다.

그녀의 곁에 여안이 털썩 앉으며 말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잠시 기다리죠.”


그가 월연 쪽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어찌 이 깊은 동굴…”


어둠 속에서도 가느다랗게 스며드는 빛에 월연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바닷물에 젖은 머리칼이 귀 밑으로 흘러내렸고, 축축해진 천은 동그란 어깨에 달라붙어 은근한 굴곡을 드러냈다.


흠뻑 젖은 옷 너머로 비치는 살결이 옅은 빛 속에서도 또렷했고, 그 부드러운 윤곽에 여안은 하던 말을 잇지 못했다.


찬 기운도 잊은 채 잠시 시선이 머물러버린 그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자마자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을 돌려 겉옷을 벗더니, 그녀의 어깨 위에 툭 올리고는 몇 걸음 떨어져 앉았다.


동굴 천장의 돌틈 사이로 물이 뚝뚝 떨어졌고, 한참 동안 그와 그녀의 호흡만이 물소리 사이로 섞여 들었다.






청해록(靑海錄)

운해문편(雲海門篇) 기묘년(己卯年)


잔월죽림에서 약초 채집 중 천계파 사절이 길을 잃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신시(申時) 경 맑던 하늘에 갑자기 비풍(飛風)이 일어 절벽 아래 바다가 짧게 요동쳤으나 곧 잠잠해졌다.




#무협 #장르문학 #연재소설 #서정적소설 #세계관소설 #관계서사 #감성서사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