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흑백의 세(勢)

구름을 가르는 태양, 물결 아래 용솟음

by 묘월



연무장의 회색 빛깔 돌바닥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연무장을 둥그렇게 둘러싼 돌계단의 한쪽 끝에, 허리를 곧추세운 채 단단히 선 자의 어깨 위로, 태양의 빛이 환하게 내리쬐었다. 그 어깨너머로 제자들이 숨을 모아 터뜨리는 기합 소리가 돌바닥을 울렸다.


“하-!”


“허엇-!”


교두(敎頭) 송건은 2대 제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넉 달 차이로 나란히 지도사가 된 두 제자, 조뢰와 여안이 펼치는 봉세를 바라봤다.

조뢰가 봉 끝을 위아래로 사납게 떨며 발을 굴렀다. 이어서 탓-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허공에서 봉이 휘어지며 힘찬 기운이 길게 갈라졌다.


한 바퀴 회전한 몸이 내려앉기도 전에 봉 끝이 연속으로 두 번, 공기를 베어 터뜨리며 쾅-쾅- 울림을 냈다. 그의 봉세는 마치 폭풍을 삼킨 구름처럼 거칠고 화려했다. 마지막 동작에서 그는 한쪽 무릎을 꿇듯 몸을 낮추었다가, 다시 봉의 탄력을 이용해 허공으로 치솟았다.


월연은 그 기세를 가만히 눈으로 좇았다.


‘구름을 가르며 내리쬐는 대서(大暑)의 태양 같구나.’


조뢰가 마지막 회전을 끝내고 착지하자, 송건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봉 끝이 지면을 스치며 남긴 깊은 자국을 본 그는, 잠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미묘한 기색을 월연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여안으로 옮겨갔다.


여안이 봉으로 땅을 툭 짚어 몸을 가볍게 띄웠다. 그의 발끝은 돌바닥을 스칠 뿐, 모래 한 톨도 일으키지 않았다. 허공에서 전진하며 좌우로 번갈아 봉을 긋자 웅-웅-웅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실선이 그어졌다.


그가 한 바퀴 돌자 푸른 실선이 겹치며 잔회오리가 피어올랐다. 그의 매 동작에는 경쾌한 절도가 묻어있었고, 마지막으로 땅에 내리는 기세는 잔잔한 수면을 스치는 바람처럼 가볍고, 유연했다.


‘비단처럼 흐르는 물결, 그 아래 용솟음이 숨었구나.’


월연의 눈길이 여안에게 머물렀다. 그가 착지하며 일으킨 바람결이 월연의 목덜미를 스치고 갔다. 여안이 봉을 거두며 고개를 들다, 무심결에 그녀 쪽으로 시선이 흘렀다. 둘의 눈빛이 짧게 맞닿았다.


“이야…”


월연 곁에서 여안의 모습을 보던 제자 몇몇이 조용한 감탄을 내뱉었다. 그 소리에 여안은 시선을 거두고, 다시 담담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안이 땅에 닿자, 송건의 눈매가 조용히 누그러졌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고, 멀리서 두 제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안은 꼭 마지막 한 수를 망설이고, 조뢰는 끝이 지나치게 모질다.’


동갑내기의 두 제자는 그렇게 바둑판의 흑돌과 백돌처럼 같은 모양을 하였으되, 전혀 같지 않은 것이었다.


‘들숨과 날숨이 함께 생명을 이루는 법. 무공 또한 그러할진대… ’


둘을 오래도록 지켜봐 온 송건은 이들을 각기 다른 길에 세우기로 하였다.


***


열다섯 남짓 되어 보이는 하얀 피부의 앳된 소년이 운해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백악절벽의 흰 바위와 푸른 기와가 맞닿은 풍경은 마치 하늘 아래 다른 세상이 열리는 듯했다.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기합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소년은 작은 숨을 고르고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손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운해문이라… 여기가 맞겠지.’


그때, 푸른 도복을 입은 또래의 사내아이가 대나무 통에 물을 한가득 담아 어깨에 짊어진 채 지나쳐 갔다. 도복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아이의 두 팔은 햇빛에 검게 그슬려 있었고, 두 눈의 단단한 빛은 시정의 예사 아이 같지 않았다.


“저기! 잠깐만.”


까무잡잡한 소년이 휙 돌아보자, 물통의 물이 출렁였다. 대꾸는 하지 않은 채 눈빛으로 ‘뭐야? 바쁜데.’하고 말했다.


“너… 운해문 문도야?”


물통을 진 아이가 위아래로 한번 그를 쓱 훑어보더니 다시 제 갈 길을 가려하자, 그는 길을 가로막고 다시 말을 붙였다.


“보아하니, 운해문 문도이고, 또래 같은데. 나도 입문하러 왔어.”


“보아하니, 운해문 기웃대는 꼬맹이 같은데. 입문은 아무나 하나.”


“꼬맹이라니, 나 열다섯이다.”


“그래서?”


물통을 멘 소년이 퉁명스레 대꾸하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자 흰 얼굴의 소년이 성큼 다가서며 선언하듯 말했다.


“나도, 입문할 거야. 언젠가 하늘을 나는 봉을 쓸 거다.”


“하늘을 나는 봉, 그건 장문님이나 하는 거야.”


톡 쏘아붙이고 가던 길을 가려던 소년은 입문하겠다는 소년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잠시 멈춰 섰다. 그 눈빛에는 어딘가 간절한 빛이 섞여 있었다. 그가 문득 물었다.


“이름이 뭐야.”


“여안.”


“나는 조뢰.”


짧은 침묵이 흘렀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조뢰가 물통을 내려놓고, 턱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물 긷는 거나 좀 도와주던지. 입문 안내 정도는 해줄 터이니.”


여안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소년은 물통을 함께 들었다. 나란히 맞댄 어깨 사이로 바람이 불자, 물통 속의 물결이 햇빛에 반짝이며 흔들렸다.


여안은 잠시 옆의 소년을 바라봤다. 또래인 듯 보였으나, 눈빛 어딘가 서슬이 서려 있었다.


“너는 언제 운해문에 입문했어?”


“나는 훨씬 일찍. 내 인생의 칠 할을 운해문에서 살았다!”


“그렇게 빨리? 어찌해서?”


“… 무학의 길을 걷고자, 태어난 거지!”


입술을 떼기까지, 아주 짧은 망설임이었지만 그 순간, 송건이 손을 내밀던 기억이 조뢰의 머릿속을 스치고 갔다.


하늘이 말라붙어 거둘 곡식이 없던 들판, 아이들의 메마른 울음소리, 그을음 가득한 부엌의 불탄 냄새. 도적떼에 목숨을 빼앗기던 부모를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열 살의 몸.


몇 날 며칠, 주린 배를 움켜잡고 아궁이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가 기척이 들리자 냅다 달려들었다. 언제 잡아들었는지, 떨리는 손에는 칼이 쥐여있었고, 까닭 모를 눈물이 맺혀 앞을 잘 분간할 수 없었으나, 팔을 움켜쥔 것은 묵직한 온기가 느껴지던 송건의 손이었다.



***



송건이 조뢰와 여안을 불렀다.


“여안, 사제들과 천계파 사절을 계속 가르치도록 하고. 조뢰는 동문들을 돕도록 하자꾸나.”


송건은 여안이 3대 제자와 월연에게 청운봉법을 가르치도록 하고, 조뢰는 2대 제자들의 청운봉법 교정을 맡도록 하였다.

늦은 오후, 수련을 마친 사제들은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었다. 여안은 서둘러 밥을 털어 넣고 자리를 일어났다. 다음 날 있을 운향당 수업에 앞서, 지난번에 조뢰가 채집한 야생 운초의 생장을 관찰해 볼 참이었다.


“아차차. 급하게 나온다고 깜빡했네.”


여안은 조뢰에게 야생 운초에 기를 불어넣었는지 물어보러 다시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식당 안에서는 제자들이 조뢰를 둘러싸고 시끌벅적했다.


“사형 봉세는 기백이 넘칩니다!”


“맞아요! 상대와 겨루면 어쨌든 승부가 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끝을 봐야죠.”


조뢰가 사제들의 말을 웃으며 들어주고 있었다. 문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여안이 되돌아 나가려던 찰나, 그중 한 제자가 허공에 봉을 들어 올리는 흉내를 냈다.


“이래서 사형이 멋지다니까요! 봉이 번개 같아요, 번개!”


그러자 여안이 문간에서 가볍게 손뼉을 쳤다.


“오, 번개라! 그럼 너희는 천둥이겠구나. 떠들썩하니 말이야.”


제자들이 순간 굳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 떠들고, 내일 새벽엔 번개처럼 일어나라. 오늘처럼 천둥만 울리지 말고.”


여안은 그저 웃으며, 인사하듯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그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월연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여안은 숙소에서 나와 조용히 회랑을 따라 걸었다. 깊은 하늘에 걸린 반달이 그의 걸음을 천천히 따라왔다. 어쩐지 절로 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때였다. 어두운 밤, 시야가 흐린 가운데, 갑자기 저 멀리 서쪽 객방에서 그림자가 쓱 지나가는 것 같았다. 여안의 발이 절로 멈춰 섰다. 가슴께가 미세하게 조여왔다.


‘지금… 누가?’


여안은 숨을 죽인 채 본능적으로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 움직임의 흔적은 운해문의 암도(暗道)로 이어졌다.


‘이곳으로 나가면 9봉인데…’


여안은 흔적을 따라 어둠 속으로 몸을 기울였다. 암도로 빠져나온 바깥은 텅 비어 있었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만 귓가에 스칠 뿐 거기서부터는 아무런 흔적도, 자취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막 지나간 듯, 땅의 기운만 희미하게 뒤흔들려 있었다.


‘… 착각은 아닌데.’


그는 천천히 돌아서며 걸음을 옮기다가 괜히 한번 뒤를 돌아봤다. 밤은 고요했고, 하늘의 달빛은 하얗게 빛났다. 운해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밤이 저물고, 먼 봉우리 위로 희미한 새벽빛이 번져 들었다.





청해록(靑海錄)
운해문편(雲海門篇) 기묘년(己卯年)


교두(敎頭) 송건, 지도사 조뢰에게 2대 문도의 청운봉법 세밀 교정을 담당하게 하고, 지도사 여안이 3대 문도와 천계파 사절에게 청운봉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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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