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높고 바다는 멀다
깊은 밤, 바람이 들지 않는 창문 틈에서 붉은빛이 조용히 새어 들어왔다. 월연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세상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달빛이 젖어든 호수 위로 길게 울리는 누군가의 비명 소리. 월연은 그 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찢긴 옷 사이로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솟구치고, 손 끝을 벗어난 멸심침은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궁성 가득 차오른 연기, 불타는 냄새, 공포로 흔들리는 눈… 날카로운 바람은 살결을 베어내듯 차가웠다.
“적월단을 이용하시겠다?”
동굴같이 어둡고 텅 빈 야소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월연은 비명을 삼키며 번쩍 눈을 떴다.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창문 너머에서 하얀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으윽…”
월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꿈속에서 움켜쥔 힘이 풀리지 않은 것처럼 온몸이 저릿했다. 그녀는 손끝을 바라보았다. 피 한 방울 없이 깨끗하고 하얀 손. 낯설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힘주어 움직여 보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한참을 물끄러미 손을 바라본 뒤에야,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운해문의 아침이었다.
안개가 봉우리 사이를 천천히 흘렀고, 마당에는 이른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여안은 시험에 쓰일 봉들을 하나씩 들어 올려 살폈다. 봉 끝의 다듬새, 감촉, 미세한 균열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제자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새의 울음과 바닷소리만이 가볍게 들려왔다.
오늘은 청운봉법 1차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여안은 마지막 봉을 들어 올리며 미세하게 숨을 고르더니, 햇살 아래 번지는 자신의 그림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때, 회랑 쪽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려왔다.
“야, 오늘은 송건 교두님이 직접 본다며?”
“아침부터 그렇게 말하지 마라, 손에 땀나잖아.”
“평소 실력대로 하는 거지- 긴장 하긴 짜식.”
“어제 제일 늦게까지 휘두른 사람이 누구더라? 잠도 뒤척거리더만.”
한 제자가 낄낄 웃으며 봉을 돌리다가 옆 사람의 어깨를 툭 쳤다.
“적당히 해라- 너 어제 봉 몇 개나 부러뜨렸냐?”
“딱 봐라, 오늘은 네 머리 위로 날아가줄 테니까.”
웃음과 장난이 뒤섞인 채 제자들이 마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햇살이 수련복 위로 흘러내렸고, 돌바닥에는 먼지가 가볍게 일었다.
여안은 봉을 들고 서서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봉 끝으로 나무틀을 탁 하고 두드렸다. 순간 웃음이 멎었다.
그는 사제들을 향해 말했다.
“기합은 몸으로 모아라. 입으로 모으는 게 아니다.”
“예, 지도사님!”
제자들의 대답이 힘차게 울려 퍼졌다.
여안은 봉을 내려두고 시선을 회랑 쪽으로 옮겼다. 아직 오지 않은 이가 있었다. 잠시 후, 회랑 끝에서 발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월연이 총총히 걸어오고 있었다. 푸른 수련복 위에 가느다란 안개가 걸린 듯, 유난히 창백한 낯빛이었다. 밤새 잠을 설친 기운이 옅게 감돌았으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월연은 고개를 숙이며 짧게 말했다.
“폐를 끼쳤습니다.”
그 말에는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었다. 여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봉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시작하겠다.”
연무장 한가운데, 제자들이 각자 여섯 자 길이의 봉을 들고 반원형으로 섰다. 제자들을 마주 보고 송건이 팔짱을 낀 채 앉고, 양옆에는 여안과 조뢰가 두 팔을 뒤로 하고 섰다.
제자들의 발끝은 언제든 움직일 듯 긴장으로 곧게 서 있었다. 월연은 그들과 약간 떨어진 회랑 그늘 아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푸른 기운이 공기를 따라 번지고, 봉의 그림자들이 서로 교차했다.
“봉을 들어라.”
여안의 탄탄한 목소리가 또렷이 울렸다.
서른 개 남짓한 봉이 동시에 움직였다. 모든 제자들이 동시에 허리를 낮추고 마보(馬步)를 굳혔다. 봉은 오른쪽 어깨에 곧게 붙였고, 왼손은 봉의 중간을 받치고 오른손은 끝을 움켜쥐었다. 바로 청운봉법의 초식,청운탁월(靑雲托月)이라 불리는 기본자세였다.
“허리와 엉덩이는 힘을 빼되, 주저앉지 말 것. 두 발끝은 바깥쪽으로 삼십 도. 봉은 세워 들고, 코끝, 봉끝, 발끝을 이은 선이 직각을 이루도록 한다. 향 하나가 다 탈 때까지 자세 유지다. 봉이 세 치 이상 흔들리면 탈락, 발뒤꿈치가 들려도 탈락이다!”
여안이 제자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며 시험규칙을 읊었다. 기초 동작은 단순했지만,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락되지 않았다.
제자들의 손끝은 하얗게 질렸지만 미동조차 없었고, 봉 끝에는 이슬 한 방울이 맺혀 떨어지지 않았다. 향이 거의 다 타들어 갈 때쯤 되자, 어떤 제자는 어깨가 떨려 봉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조뢰가 자로 손목을 툭 쳤다.
“봉은 뼈요, 몸은 근본이다. 기둥이 흔들리면 어찌 구름이 일겠느냐!”
그 말에 제자가 움찔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송건은 오래된 바위처럼 고요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제1관의 향불이 다 타오르자, 북소리가 한 번 울렸다. 송건의 손이 들리며 제자들이 일제히 봉을 거두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돌바닥 위로 떨어졌다. 마보를 풀자 허벅지가 부들거렸지만, 누구 하나 주저앉지 않았다.
“둘째 관문, 송림대로 간다.”
짧은 지시가 떨어지자 제자들이 봉을 짊어지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운해문 본관 바깥의 돌계단을 오르자, 산허리에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그 끝에 7봉 용벽유수(龍壁流水)의 물기둥이 희미한 안갯속에서 솟아오르고, 그 위쪽 절벽을 따라 노송들이 빽빽이 엇갈려 자라 있었다. 그곳이 바로 송림대(松林臺), 바람과 구름이 얽혀드는 곳, 청운봉법의 경공 청운보(靑雲步)를 시험하는 자리였다.
오래된 소나무의 가지들은 사방으로 엇갈려 마치 천연의 장애물 같았다. 제자들은 그 사이를 누비며 세 가지 기본 봉법을 펼쳐야 했다.
“동작의 절반 이상은 발이 땅에 닿지 않아야 하고, 가지를 꺾어서도 안된다.”
여안이 규칙을 설명하고 세 가지 동작을 이어서 보여주었다.
답운출봉(踏雲出棒). 왼발 끝으로 땅을 살짝 짚고, 내력을 봉 끝에 실어 소나무 줄기를 툭 짚고 그 반동으로 몸을 띄웠다. 허공에 뜬 채 봉을 옆으로 휘둘러 바람을 일으켰지만, 송엽 하나 꺾지 않았다. 이어 오른발이 구름을 밟듯 다른 가지 위를 스치며 지나갔다.
선운착자(旋雲戳刺). 공중에 뜬 채로 봉의 끝을 허리에 붙이고, 반 바퀴 회전하여 가지를 피하며, 봉 끝으로 발아래 가지 사이의 작은 동전만 한 구리 방울을 정확히 건드렸다. 방울은 울리되 가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수운낙지(垂雲落地). 마지막 동작에서 봉 끝으로 땅을 가볍게 짚었다. 그 반동으로 몸이 세 자쯤 미끄러지듯 옮겨가고, 무릎을 굽혀 힘을 풀며 착지했다. 호흡은 흐트러지지 않았고, 발아래 솔잎은 가볍게 눌렸다.
월연은 소나무 사이를 부드럽게 스치고 내려서는 여안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늘은 높고, 바다는 멀다. 그 사이를 걷는다 생각하라.”
동작을 끝낸 여안이 말했다.
여안의 시범이 끝나자, 한 제자가 호기롭게 나섰다. 첫 동작부터 의욕이 앞선 그는 봉 끝을 너무 세게 짚었다가 몸이 기울며 가지를 부러뜨렸다. 조뢰가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짚으면 안 되지. 봉이 말을 안 듣잖아.”
그는 봉을 들어 직접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봐. 손목을 좀 풀어야지. 평소에 연습은… 이렇게 한 건가?”
시선은 제자를 향했지만, 말끝은 어딘가 여안을 겨누고 있었다.
여안은 말없이 봉을 세워 들었다.
월연은 그의 얼굴이 순간 미세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음 제자가 나섰다. 경공은 제법이었으나 봉세가 따로 놀아, 봉풍이 흩어지고 구리방울이 울기도 전에 떨어졌다.
또 다른 제자가 뛰어들었다. 그는 이마의 땀을 훔치고 봉을 세웠다. 발끝이 가지를 스치며 떴고, 봉 끝이 허공을 그으며 맑은 파문을 남겼다. 공중에서 허리를 비틀어 구리방울을 살짝 찌르자, 맑은 소리가 송림대를 가로질러 퍼졌다. 그가 송엽을 사뿐히 밟으며 착지하자 송건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좋다.”
그 한마디에 제자들의 얼굴에 안도와 열기가 번졌다.
제자들이 하나씩 동작을 마칠 때마다 봉의 그림자들이 소나무 그늘 사이에서 교차했고, 바람은 푸른 곡선을 그리며 흘렀다. 누군가는 숨을 고르고, 누군가는 이를 악물었다. 송림대 위로 내리쬔 햇살이 봉 끝마다 반짝였다.
마지막 제자가 착지하자, 여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제자들은 봉을 거두고 정렬하였다.
“사절께선 어찌 보셨습니까.”
송건이 시험을 지켜보던 월연에게 물었다.
“푸른 구름이 바람을 타듯… 섬세하더군요.”
그녀의 말을 들은 여안이 비스듬히 봉을 걸친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내일은, 바람 속에 직접 서 보시겠습니까?”
몇몇 제자들의 눈길이 잠시 그녀에게 모였다.
여안은 월연에게 둔 시선을 거두지 않고 답을 기다렸다.
“바람이라…”
월연은 가만히 웃었다.
“서 보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겠지요.”
소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고, 가느다란 솔잎이 흩날렸다. 향긋한 소나무 향이 코끝을 스쳤다.
청해록(靑海錄)
운해문편(雲海門篇) 기묘년(己卯年)
청운봉법 1차 시험 제1일 차. 제1관문 기본자세 청운탁월(靑雲托月) 제2관문 청운보(靑雲步) 평가. 제자 30명 중 통과자 2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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