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내리면 그림자는 짙어진다.
청운봉법 3 관문이 끝난 다음날, 운해문의 아침 공기는 긴장과 흥분의 여운을 간직한 채 은근히 들떠 있었다. 웃음과 헛기침이 뒤섞여 흐르는 연무장에서 전날의 승부는 장난스러운 말끝에 가볍게 부서졌다.
“너 그때 봉 떨어뜨릴 뻔한 거 아니었냐?”
“하, 떨어뜨리긴. 다 내가 연구한 초식이었지!”
“하하하 취권이 아니고 취봉이다?”
월연도 제자들 사이의 웅성거림 속을 가만히 지나가며, 입가에 미묘하게 떠오르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가슴 안쪽 어딘가에는 저절로 반응해 버린 그 움직임이 작은 조각처럼 박혀 있었다.
‘… 봤을까? 여안은… 알아챘을까?’
불안이 스쳤지만, 눈이 마주칠까 봐 여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맑은 듯 깊은 눈빛, 장난처럼 보이다가도 문득 진지해지는 그 시선이 어디까지 닿을지 알 수 없었다.
“마을로 내려간다! 다들 준비해라!”
연무장으로 들어서며 조뢰가 양팔을 높이 들어 손뼉을 탁탁 치고 외쳤다. 순간 제자들의 눈이 반짝였다.
“우와! 진짜요?”
“삼봉 마을?”
“꿀과자! 꿀과자 먹으러 가는 거잖아!”
여안은 가볍게 웃었다.
“시험 끝났으니 마음도 풀어야지. 오늘은 지도사들도 따라간다.”
월연도 자연스럽게 무리 뒤에 섰다.
구름이 높게 뜬 하늘은 맑았고, 봄바람은 제자들의 발걸음을 따라 가볍게 흘렀다. 8봉의 운해문을 나온 그들은 4봉 유화곡(流花谷)에 곧장 닿는 서쪽으로 향했다. 동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은 7봉의 용벽유수와 6봉의 잔월죽림, 5봉 청조해안 사이를 헤엄쳐 유화곡까지 따라 들었다.
꽃이 흐르는 골짜기, 유화곡에 바람이 일자 푸른 들에 점점이 박힌 들꽃들이 부드럽게 몸을 뉘었다. 꽃잎들이 봄바람과 장난치듯 팔랑거리자 파란 나비 수십 마리가 낮게 날아올랐다.
“에취!”
꽃가루가 달콤한 향을 퍼뜨리며 코를 간질이자, 월연이 재채기를 했다.
“사절님, 코를 가리세요. 이렇게요.”
제자 한 명이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여안이 뒤를 돌아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는 싱긋 웃었다. 한 걸음 다가가려다, 이내 별말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순간, 방향을 꺾은 바람이 그의 이마에 붙었던 흰 꽃잎 하나를 떼어내고 지나갔다.
골짜기를 빠져나오자 3봉의 마을로 이어진 돌계단이 나왔다. 계단 아래로 내려갈수록 웅성대는 사람 소리가 가까워졌다.
완만하게 낮아지며 1봉까지 이어지는 마을에 이르자 푸른 깃발이 보였다. 그 아래서 상인은 생선을 말리고, 아이들은 서로 쫓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마을가를 둘러싸고 흐르는 작은 개울가에 물레방아가 돌아가며 경쾌하게 박자를 맞추었고, 햇볕에 말라가는 차향은 바람을 타고 퍼졌다.
제자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물건을 만지며 시끌시끌했다.
“사형, 이거 보세요! 운해문 표식 새긴 나무패!”
“그건 장난감이다, 이 녀석아. 색이 다르잖아.”
“아, 네 그러네요… 하하.”
여안은 평소보다 말수가 많아져 있었다.
“사절님. 여기 국숫집이 꽤 괜찮습니다.”
“저기 보이십니까? 저 화로방은 조뢰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고요.”
조뢰가 질색한 척하며 말했다.
“누가 좋아한댔어! 여안 네가 맨날 끌고 가서 그렇지!”
월연은 가볍게 웃었다.
장터의 떠들썩한 온기 속에서, 여안의 얼굴은 전날과는 다르게 한결 풀려 있었다. 그 따뜻한 기운이 월연의 마음에도 얇게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 안쪽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어제의 그 보법을 눈치챘을까 하는 잔 물결이 가라앉지 않았다.
장터 안쪽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국숫집 앞에서 피어오르는 따끈한 김이었다. 주인은 제자들이 몰려오자 환하게 웃으며 넉넉한 손으로 국수를 건져 올렸다.
“오늘 운해문 손님이 많네! 다들 허기질 텐데 얼른들 들어와요!”
국수가 나오자마자 조뢰가 가장 먼저 젓가락을 들었다.
“오— 이 집 면발은 여전히 쫄깃해. 입에서 잘 안 끊어지는 거 알지?”
여안이 바로 받아쳤다.
“원래 잘 씹지도 않고 넘기잖아.”
“내가 언제!”
조뢰는 반박하려다가 뜨거운 국물에 혀를 데일 뻔해 다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제자들 앞에서 늘 근엄하게 폼을 잡던 조뢰의 엉뚱한 모습에 킥킥거리는 웃음이 삐져나왔다.
월연도 그 웃음결 사이에 앉아 조용히 국수 한 가닥을 들어 올렸다. 국물에 스민 차향이 은근하게 코끝을 스쳤다. 여안이 그 모습을 보더니, 살짝 몸을 기울여 조용히 설명했다.
“이 집은 면에 찻잎을 아주 조금 섞습니다. 비 오는 날엔 향이 더 진하죠.”
월연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이런 향이 나는 거군요.”
“네. 여기 삼봉 마을 특제 국수죠!”
자랑하듯 신이 난 말투였다.
조뢰가 입에 면을 한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물었다.
“천휘국에도 이런 국수 있나요?”
“차향이 있는 국수는 처음이네요.”
제자 한 명이 끼어들며 말했다.
“사절님, 많이 드세요! 국물 더 드릴까요?”
국수 국물이 헛헛한 속을 데우며 천천히 차올라, 어제의 일도 그 찰나의 움직임도 잠시 묻혀 버리는 듯했다.
국숫집을 나서자, 햇볕이 장터를 환하게 덮었다. 월연은 무심결에 한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목각 장난감, 꽃 자수가 앙증맞은 팔찌, 작은 주전자 그리고 찻잔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월연은 그중 작은 도자기 찻잔에 눈길이 갔다.
흰 바탕 위에 구름 한 점이 절제된 선으로 그려진, 터무니없이 담백한 모양이었다. 월연은 손끝으로 잔의 표면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살짝 기울이자 잔 안쪽에서 아주 약한 향이 피어올랐다. 용정차와 산바람이 뒤섞인 듯한 향을 들이마시는 순간, 연한 버드나무 잎 하나가 바람을 타고 천천히 낙하하듯 마음속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때, 옆에서 조용한 기척이 스쳤다.
“그 잔은,”
여안의 목소리는 군중 소리에 섞여도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경쾌한 울림이 있었다.
“삼봉 남쪽의 도공이 굽는 겁니다. 구름을 그릴 때 붓을 단 한 번만 올린다고 해서 ‘일획운(一劃雲)’이라 부르지요.”
월연은 고개를 들었다. 여안은 너무 가까이도, 멀지도 않은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잔의 곡선을 짚으며 말했다.
“잔을 말릴 때 향초 불을 살짝 피워둡니다. 그래서 처음 손에 들면 지금처럼 은은한 향이 조금 남아 있죠.”
월연은 잠시 잔을 들여다보다가, 가만히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걸 잘 아시네요.”
여안은 이런 것쯤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볼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 순간, 조뢰가 멀리서 소리쳤다.
“여안! 공연 시작한다! 빨리 안 오냐!”
여안은 크게 한숨을 쉬는 시늉을 하고는 몸을 돌려 조뢰가 손짓하는 곳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월연은 조용히 뒤를 따랐다.
장터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악공들이 피리를 불고,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음악에 맞추어 몇몇 구경꾼들은 노래를 따라 불렀다.
제자들은 군중의 가장 안쪽까지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꿀과자를 나눠먹으며 공연을 보는 사제들에게 여안이 말했다.
“이거만 보고 올라가자!”
악공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이 빨라지자, 광대 하나가 줄에 매달린 인형들을 요리조리 움직여 춤을 추게 하였다.
바람에 실려오는 달달한 꿀과자 냄새와 피리 소리, 북소리, 군중들이 와- 하고 터뜨리는 감탄이 뒤섞였다. 사람들 속에서 월연은 어느새 묘하게 평온이 번진 얼굴로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러다, 줄에 매달려 춤추던 인형 하나가 말 인형에서 툭 떨어졌다. 그녀의 낫빛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마지막 북소리가 울리고, 공연이 끝났다.
“크아- 멋지다 멋져!”
“하, 가슴이 탁 트이네!”
제자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자, 슬슬 돌아가자. 해 지기 전에!”
조뢰가 남은 꿀과자를 입에 털어 넣으며 외쳤다.
해 질 녘의 장터는 홍시처럼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짐을 정리하고, 상인들도 그날의 장사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제자들과 마을 어귀로 걸음을 옮기던 여안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털뭉치 하나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여안은 고개를 돌려 생선가게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항아리 옆에서 젖은 새끼 고양이가 홀로 떨고 있었다. 연한 은회색 털이 물에 젖어 앙상한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무릎을 굽히자, 고양이는
겁먹은 듯 몸을 움츠렸다가, 곧 떨리는 다리로 한 걸음 다가섰다. 마치 본능적으로 저 먹일 따뜻한 손을 알아본다는 듯이.
여안은 천천히 손등을 내밀었다. 작은 코가 살짝 그의 손등을 킁킁거리며 건드렸다.
“춥겠는데…”
여안은 겉옷을 길게 펼쳐 들고 고양이를 살며시 감싸 품에 넣었다. 작은 털뭉치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멀리서 월연이 걸음을 멈추었다. 고양이를 품에 안은 여안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거두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행을 따라 움직였다. 멀리서 조뢰가 소리쳤다.
“어이, 여안! 뭐 해, 올라가자니까!”
여안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래. 간다-!
밤이 내렸다.
운해문은 깊은 잠에 빠졌다. 동쪽의 숙소도 서쪽의 객방도 모두 고요했다.
‘아직 아무 단서도 못 찾았어. 시간이 많지 않아….’
그 어둠 속에서 월연만이 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의 발길은 암도에서 이어진 9봉을 향했다.
‘바람도 불지 않고, 안개도 흐르지 않고, 풀벌레 소리조차 없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그 공간은 시간마저 멈춰 있는 듯했다. 발이 딛고 선 땅조차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살아있는 것의 기척이 전혀 없었다.
월연은 조심스레 손끝을 들어 허공을 스쳤다.
‘기척이 없다… 너무 조용해.’
마치 무언가가 모든 기척을 삼켜버렸거나, 그림자 뒤에 감춰놓은 듯했다. 그녀의 심장이 아주 작게 뛰었다.
“… 여긴… 대체…”
달빛은 희고 그 아래의 길은 검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월연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다시 길을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청해록(靑海錄)
운해문편(雲海門篇) 기묘년(己卯年)
곡우(穀雨). 동정(動靜) 무기(無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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