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죄가 없습니다
검은 새 한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았다. 산 허리에서 시작한 날갯짓을 멈추지 않고, 산을 타며 높이 높이 날아올랐다. 안개와 구름이 두껍게 깔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파고든 새는, 무거운 날개를 힘겹게 퍼덕였다.
운무를 뚫고 더 높이 오르자 어느새 세상을 내려다보는 산 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소금을 곱게 갈아 뿌려놓은 듯한 산 봉우리가 뭉실뭉실한 구름 위에 서 있었다. 만년설 덮인 암회색의 바위산이 햇빛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빛나는 곳. 봄을 알리는 비가 여러 번 내렸지만, 그곳은 영원한 설국이었다.
얼어붙은 정상에서 한참을 내려오면, 눈은 비로소 녹기 시작하고, 거대한 산맥의 품 안에서 차가운 물줄기들이 협곡을 굽이쳤다. 험한 산세만큼이나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비호설산(飛虎雪山)의 중턱, 그 계곡 끝자락에 천휘국의 궁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갑게 빛나는 은색 기와 아래로 검은 물결이 일렁였다.
두꺼운 먹빛 장포를 입은 자들이 줄지어 궁성으로 들어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옷깃과 소매 끝에 덧댄 설백(雪白)의 여우털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정전(正殿)에 날 선 목소리가 가득 찼다.
“지난해 소국에 난이 일고 나서, 천하의 균형이 불안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단의 피를 지닌 아이를 단독 사절로 보내다니요. 그것이 천휘국의 위의(威儀)를 세우는 길입니까?”
“배신했던 자의 자식입니다. 피는 속일 수 없는 법이지요.”
다른 신하가 곧바로 보탰다. 천계파 좌열에 있던 몇몇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고, 누군가는 미간을 찌푸렸다.
“송림에서 온 사절들이 오만방자하게 굴지 않았소! 응당한 처분이오.”
“그 자들은 청해파에서 내쳐졌소. 송림에서는 사과의 뜻도 보이지 않았소? 그보다 월연을 단독 사절로 보낸 결정, 그것에 대해서 중지를 모은 적이 없지 않소?”
“허면, 재상의 처사가 독단적이다, 그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게요?
순간, 정전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대신들의 갑론을박을 조용히 듣고 있던 천계파 상좌 자운이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죄가 없습니다.”
“무사 자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
누군가 자운을 하대하며, 쏘아붙였다.
“그녀는 천휘검법 직계 검맥 중 유일한, 아니… 최후의 계승자입니다.”
그를 향해 모인 눈빛들이 미묘하게 흔들리며 일그러졌다.
“천휘검법은 이 나라의 뿌리입니다. 직계 검맥을 두고 배신과 이단을 논하는 것은, 곧 우리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 비릿한 코웃음을 흘리며 맞받아쳤다.
“검맥이 어찌 배신의 피를 덮겠느냐. 저리 송림에 홀로 있다가, 무슨 파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법!”
자운은 그 말에는 바로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문채 담담한 눈빛으로, 정전의 침묵이 팽팽히 당겨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월연은 천계파의 가르침을 받고 사절로 나갔습니다. 오직 의(義)와 도(道)를 깊이 새기도록 수련했습니다.”
“무림은 무림. 조정은 조정! 언제부터 천계파가 조정의 일에 입을 대기 시작한 것이오?
다시 한번, 날 선 고요가 대전의 공기를 짓눌렀다. 정적을 끊고 말을 이어받은 것은 재상 위중현이었다. 그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람들이 소국의 붉은 달을 두고 온갖 소문을 만들어 냅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상단의 주렴 너머를 보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천하의 균형은 소문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송림과의 일전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책무이지요.”
“재상, 그렇다면—”
누군가 다시 입을 떼려 하자, 위중현이 손을 들어 막았다.
“사절 하나 보낸 일에 너무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위중현의 낮은 목소리는 온화했으나, 대신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내리는 시선 앞에서 끝까지 고개를 들고 있는 자는 없었다.
“그 아이의 피를 말하는 것, 검맥을 말하는 것… 모두 지나칩니다.”
그는 더 이상의 논박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이 정리했다.
“월연은 이미 나갔습니다. 이제, 사절의 역할을 다하기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지요.”
주렴 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상의 말이 옳다. 더 논하지 말라.”
정전을 나서는 대신들은, 천계파가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직이 쑥덕였다. 말끝마다 아직 가시지 않은 분기가 배어 있었다.
“이제 조정의 일에도 태연하게 목소리를 내는 지경에 이르렀소!”
“삼십년 전쟁의 공(功)이 워낙 크지 않소.”
“그놈의 전쟁 공로 하나로 나라 꼴이 이렇게 된 것 아니요!”
“재상은 어찌하여 그렇게까지…”
눈짓을 받은 이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멀지 않은 회랑 끝에서 위중현이 재상부로 향하고 있었다.
위중현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찻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새벽안개처럼 뿌연 유백색의 설호유차(雪湖乳茶)가 잔 안에서 잔잔한 물결을 그렸다.
은근히 배어오는 산약초의 씁쓸한 향과 설우(雪牛)의 맑고 고소한 젖내가 코끝을 스쳤다. 그는 찻잔을 기울여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따스한 기운이 목을 지나 가슴께에 번져 들었다. 뒷맛에는 비호설산의 암염이 남기는 옅은 짠기가 스쳤다.
재상부 서고에 홀로 앉은 위중현은 찻잔을 내려놓고, 책상에 쌓인 문서더미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한참 동안 정면을 주시하며 말이 없던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다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 번 탁탁 치자 은신 호위가 나무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단주에게 전하라.”
그는 붉은 달 모양이 새겨진 목패를 건네며 말했다.
“일보 전진.”
목패를 받아 든 호위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려는 순간, 위중현이 나직이 덧붙였다.
“그 아이에게는… 알리지 말 것.”
검은 새가 초승달에 걸친 안개를 뚫고 밤하늘을 날았다. 짙은 잿빛의 기와가 군데군데 부서진 정자 아래로 침엽수의 날카로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단주 야소가 정자에 가늘게 떨어지는 달빛 아래에서 손에 든 목패를 뒤집었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보 전진. 연못의 달은 하늘의 뜻을 모른다.”
야소가 목패에 둔 시선을 들어 올리자 안광이 어둠 속에서 섬뜩한 빛을 냈다.
“… 판 안의 말이, 판을 볼 필요는 없다… 흥미롭군.”
차가운 밤, 칼날을 빽빽하게 꽂아 놓은 듯한 바위들 사이로 세 개의 그림자가 바람결에 흔들리 듯 떨어졌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바위들이 삐죽빼죽 엇갈리며 날을 세운 계곡은, 물이 바짝 말라, 오로지 날카로운 바람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바람골의 한 지점을 찾았다.
“여기다.”
가장 앞선 이가 손바닥을 바람 속에 가만히 담갔다.
바람은 여러 갈래로 굽이치며 흘렀으나, 그는 그 흐름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결을 찾고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채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공기를 하나씩 골라냈다. 그러다, 펼쳤던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한 줄기 바람 길을 찾아낸 그가 말했다.
“흔들기만 한다. 건드리지 마라.”
그림자 세 명이 동시에 손끝에 기를 모아 바람 속으로 아주 미세하게 주입했다. 바람의 흐름이 머리카락 한 올만큼 뒤틀렸다.
“됐다. 철수한다.”
비호설산 자락 아래, 만년설이 녹아든 물이 고여 호수를 이뤘다. 맑고 깊어, 하늘을 그대로 비추는 그 수면 위로 초승달이 조용히 걸렸다.
차가운 물에 잠긴 채 하얀빛을 밝히는 달 위로 바람이 스쳤다. 일렁이는 물결에 초승달이 부서지는 순간, 아주 얇은 붉은색이 겹쳤다. 고작 숨 한 번 고를 사이, 달은 피처럼 물들었다가 물결에 흔들리며 다시 본래의 빛으로 돌아갔다.
그 변화를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비호설산의 찬 바람만이 호수 위를 스쳐 지나갔다.
청해록(靑海錄)
운해문편 기묘년(己卯年)
청조해안의 물결이 잠시 고요를 잃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고, 안개도 흐르지 않았으나
파문 하나가 사라지기까지 오래 걸렸다.
이유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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