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새벽이 되자 점차 잦아들었다. 운해문 내원을 동서로 길게 가로지르는 연못은 간 밤에 내린 비로 넘칠 듯 부풀었다. 월연은 아치형 돌다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면 가까이 드리운 버드나무 가지를 향해 잉어가 헤엄쳤다. 꼬리의 곡선이 물살을 길게 갈랐다.
영객장 앞마당에 시원한 아침 공기가 촉촉하게 가라앉았다. 마당으로 들어온 조뢰, 여안, 금우, 석운 그리고 월연은 각자 자신의 말 옆에 섰다. 그들은 장로와 상좌들에게 허리를 굽혀 짧게 인사를 하고, 말에 올라탔다.
금우가 맨 먼저 말 머리를 돌려 출발했다. 곧이어 조뢰와 여안이 운해문을 뒤로하고 따라나섰다. 월연과 석운도 뒤이어 나갔다. 바람을 가르며 펄럭이는 푸른 도복이 점점 멀어졌다. 현해는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동쪽에서 뜨는 해를 등지고 달리자 그림자가 길 앞으로 길게 뻗어나갔다. 말발굽의 진동에 유화곡의 하얀 꽃들이 파르르 흔들렸다. 유화곡이 끝나갈 무렵 금우가 입을 열었다.
“삼봉 마을로 빠지지 않고, 여기서 절벽길을 따라 서쪽으로 곧장 가겠습니다.”
“삼봉 마을 안 들르고? 국수라도 한 그릇 먹고 가면 좋겠는데….”
“요깃거리는 석운이 챙겨 왔습니다. 하루빨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안은 이 와중에 국수 타령하는 조뢰를 보고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이 번졌다. 그는 눈을 돌려 월연을 보았다. 처음 운해문에 당도하던 날 차고 있던 은빛 칼집이 흑마의 검은 갈기 위에서 빛났다.
지난밤, 서녘 땅을 바라보며 애상 어린 곡조를 풀어내던 기색은 간 데 없고, 어찌 저리 초연한 눈빛만 남았을까. 곁눈질하던 여안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월연이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친 그는 얼른 눈길을 거두고, 발로 말의 배를 한번 툭 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서쪽으로 향하는 절벽길은 좁고 경사졌다. 다섯 마리 말이 한 마리씩 줄지어 조심스레 내려가, 기슭에 당도했을 때, 이미 해는 서녘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땅은 아직 질척였고, 풀잎마다 물기가 남아 있었다.
“여기 이 근처에서 눈을 좀 부치고 가야겠습니다.”
금우가 촘촘하게 가지를 뻗은 나무와 커다란 바위가 둘러싸고 있는 곳을 야영지로 택하며 말했다.
“그래. 여기서 자자. 더 가봤자 미끄럽기만 해.”
조뢰가 말에서 내려 고삐를 나무에 걸었다. 여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석운은 말없이 주변을 살피다 젖은 장작을 모아 불을 피우려 했다.
불은 좀처럼 붙지 않았다. 연기만 낮게 깔리며 눈을 찔렀다. 불씨는 결국 금우가 살려냈다. 작게 타오르는 불빛 앞에 모두 둘러앉았다. 저녁은 말린 고기와 마른 떡이었다. 조뢰가 투덜대며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삼봉마을 들러서 한 끼 먹고 오는 건데.”
배를 채우고 나서, 경계 근무 순서를 정했다.
여안이 이름을 불렀다.
“조뢰, 초경. 금우, 석운 중경. 나랑 월연 사절은 말경.”
“끝자리에 두는 게 낫겠지요?”
여안이 덧붙였다. 월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바람은 약했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도 거의 없었다. 말도 잠잠했고, 숲도 조용했다.
꾸우-꾸우-
밤이 깊어지자 부엉이가 낮게 울었다.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모닥불은 공기를 따뜻하게 데웠다. 그 온기 안에서, 여안과 월연의 침묵은 말없이 이어졌다. 일렁이는 붉은빛이 월연의 눈 안에 가득 차올랐다.
검은 공기 속에서 그 불빛은 장작을 먹이 삼아 강렬하게 타올랐지만 더 커질 듯 커지지 못하고 그만한 크기로 자꾸 되돌아갔다. 불꽃이 장작을 태우는 것인지 장작이 불꽃을 잡아 가두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모두가 잠이 든 뒤에도 월연은 한참을 그렇게 웅크린 채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말경을 서며 몇 번이나 하품을 하던 여안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든 여안의 손은 여전히 봉을 쥐고 있었다. 끝이 월연 쪽을 향하지 않도록, 각이 미묘하게 비켜 있었다.
새벽녘이 되자 눈이 천천히 띄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불은 거의 꺼져 있었고, 그 옆에 월연이 서 있었다. 그녀는 숲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숲이 시작되는 지점보다 조금 안쪽을. 월연이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까닭 모를 안도감이 눈꺼풀을 지그시 눌렀다. 뜨려고 애쓰던 눈에 스르륵 힘이 빠지며 그는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오늘쯤이면 동릉성(東陵城)에 도달할 수 있나?”
시냇가에서 말들이 목을 축이는 동안 흐르는 물에 손을 씻으며 여안이 금우에게 물었다.
“네. 이 개울 따라 한 시진만 내려가면 될 겁니다.”
“으아- 간만에 밥 다운 밥 좀 실컷 먹어보자!”
조뢰가 배를 툭툭 치며 앓는 흉내를 냈다.
완만한 구릉이 겹겹이 이어지고, 바람에 흔들리는 풀밭 사이로 길이 갈라진 동릉성은 송림국 서남쪽으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 낮은 산줄기는 성을 둘러싸되 가두지 않고, 어디로든 흘러갈 듯 열려 있었다.
송림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상로와 남쪽 완충국들로 이어지는 길이 만나는 곳이라, 상인과 사절, 유랑 무인들이 끊이지 않았다. 성문 앞에는 수레에 짐을 한가득 실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다.
성문을 지키던 수비병이 말머리를 멈춰 세웠다.
“어디서 오셨소.”
여안이 앞으로 나서며 운해문 문장이 새겨진 목패를 내밀었다.
“청해파에서 나왔소. 국경 쪽 기류를 살피러 가는 길입니다.”
수비병은 목패를 살피던 시선을 자연스레 뒤쪽으로 옮겨갔다. 푸른 도복의 젊은 사내들과 남장을 한 월연이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수비병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성문을 열어주었다.
동릉성 안은 아직 낮의 열기가 남아 있었다. 개울가를 따라 들어선 상점들의 등불이 하나둘 켜지고, 술집과 여관에서 사람들 목소리와 밥 짓는 냄새가 번져 나왔다.
조사대는 성 안쪽의 작은 여관에 방을 잡기로 했다. 조뢰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여긴 진짜 크다. 삼봉 마을이랑은 비교도 안 되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나가서 좀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금우가 봇짐에서 기류 측정기를 꺼내 들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나눠서 다녀오자. 가는 길에 탐문도 좀 하고.”
여안이 금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금우와 함께 구릉 쪽 바람목으로 다녀올게.”
“나는 배고파서 일단 좀 먹으련다. 오는 길에 봤던 그 시장 쪽 둘러볼게. 석운, 같이 가자.”
조뢰와 여안이 동시에 월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사절님은 배 안 고프십니까? ”
“사절님 같이 가실래요?”
월연이 미소를 짓고는 대답했다.
“저는 여기 남아서 드나드는 이들을 탐문해 보겠습니다.
구릉의 풀잎들이 바람을 받아 한쪽으로 쓸리며, 마치 숱 많은 여인의 머리채가 흘러내리는 듯한 결을 만들었다. 낮은 언덕과 언덕 사이로 길이 움푹 파인 바람목에서, 금우는 가만히 눈을 감고 공기의 흐름을 읽었다.
가지고 온 측정기는 땅에 꽂아두고 손에는 풍향기를 올려둔 채 숨을 죽인 그의 곁에서, 여안은 까치발을 들었다 놨다 하며 측정이라는 것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금우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을 뜨자 여안이 물었다.
“어때? 이상한 기류가 느껴지나?”
“아니요. 기류는… 정상입니다. 특별히 꺾이거나 솟구치지도 않고 곤두박질치는 것도 없이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운해문으로 들어오는 바람길은 여기를 지난다지 않았어? 9봉에서만 갑자기 흐름이 튈 수가 있나…?”
“그게 참으로 이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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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참 이상하네?! 사내야 계집이야?”
우악스럽게 생긴 거구의 사내가 그림자를 드리우며 위협스럽게 내뱉었다. 그 사내의 양쪽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험악한 인상을 한 자들이 그를 호위하고 섰다. 그들은 객잔 1층의 한쪽 모퉁이를 에워쌌다.
그들이 둘러싸고 내려다보는 식탁 위에는 연분홍색 매화주가 담긴 하얀 술잔과 호리병이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들린 술잔이 천천히 입가로 향했다. 매화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모든 시선이 그 광경에 쏠렸지만 그 누구도 숨소리를 내지 못했다.
“거 혼자서 자리 차지 하지 말고 좀 비키지? ”
월연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술잔을 탁 내려놓고 천천히 술을 따랐다. 사내의 손이 손목을 잡아채려는 순간, 쾅, 월연이 식탁을 내려쳤다. 술잔이 공중으로 튀었다. 손가락으로 툭 튕기자 잔은 쐐액- 하고 날아가 사내의 이마에 꽂혔다. 으악! 사내는 뒷걸음질 치다 주저앉았다. 피가 눈썹을 타고 흘렀다.
“이 년이…!”
칼이 번쩍였다. 월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편에 선 자의 가슴팍을 짧게 밀었다. 둔탁한 숨이 터지며 몸이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때, 다른 편에서 칼이 곧게 질러왔다.
월연은 허리를 활처럼 뒤로 말아 칼을 피하고,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손목을 비틀고 팔을 격타하여 칼을 빼앗은 뒤, 그대로 날을 상대의 목에 들이댔다.
오른편에서 다시 달려드는 기척. 월연은 발끝으로 탁자를 밀었다. 호리병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짧게 차 넘기자 병이 날아가 상대의 명치를 향해 정확히 날아가 박혔다.
쿵. 쓰러진 자들은 함부로 반격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어 몸만 부들부들 떨었다. 월연은 겨누었던 칼을 바닥에 던졌다. 턱으로 문을 가리키자 그들은 엉거주춤 일어나 재빨리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제자리로 돌아가 앉기 전, 월연은 잠깐 고개를 들었다. 2층 난간 너머, 등불이 한번 흔들렸다. 그녀는 시선을 거두었다. 객잔 주인이 새 병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월연은 병을 들어 향을 확인한 뒤, 아무 말 없이 잔을 채웠다.
이윽고, 조뢰와 석운, 여안과 금우가 들어왔다. 아직 객잔에는 가시지 않은 긴장이 남아 있었다.
“어? 이런 술도 드십니까?”
여안의 쾌청한 목소리가 객잔의 공기와 묘하게 어긋났다.
“뭐야… 객잔 분위기 왜 이래?”
조뢰는 주변을 돌아보며 자리에 앉으려 했다.
월연이 짧게 말하고 일어섰다.
“방으로 돌아가서 얘기하시지요.”
월연이 앞장섰다. 2층 객실로 오르며 그들은 객잔의 시선들이 침묵에 잠긴 채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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