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잔의 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문을 겨우 비집고 들어올 정도로 거구인 사내와 그의 부하로 보이는 자들이 들어섰다. 왁자지껄하던 객잔의 소란이 점차 잦아들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2층을 올려다보고 시선을 교환했다. 그는 눈길을 다시 1층으로 되돌려 훑어보았다.
모서리 한쪽 귀퉁이에서 홀로 잔을 기울이는 자가 눈에 들어왔다. 곱상한 자태의 상대를 확인하자 헛웃음이 비져나왔다. 허탈함과 모욕감이 뒤섞인 입꼬리를 실쭉거리며 성큼성큼 다가섰다.
식탁을 몸으로 툭 건드리자 술잔의 연분홍색 액체가 넘쳐흘렀다.
“어이- 술은 혼자 마시면 맛없지 않나?”
“술 한 병에 떡하니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말이야.”
“주인 어디 갔어! 객잔 이딴 식으로 운영하면서 맨날 돈 없다고 난리야!”
부하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월연이 거구의 눈을 잠시 쳐다보다 이내 다시 시선을 내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베일 듯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잠깐 멈칫했던 거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빈자리는 많아 보이는데?”
월연이 짧게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네. 사내 복장에 계집 목소리라? ”
눈 깜짝할 사이에 합이라고 주고받을 것도 없이, 거구는 일방적으로 나가떨어졌다. 탁자 다리가 흔들렸고 술병은 바닥에 뒹굴었다. 부하들이 금세 제압당하는 것을 보며 칼자루를 더듬던 손이 멈추었다.
술잔에 깨진 이마를 움켜쥐고 고개를 들다 2층의 사내와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이를 악문 채 아무 말 없이 부하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 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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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 아래 바람목은 별 탈 없었습니다. 특별히 느껴지는 이상도 없었고요.”
“워낙 여기저기서 온 자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저잣거리에서 별 놈들 다 보이긴 했는데. 그렇다고 눈에 띄는 동정이랄 것은 없었어…. 뭐 있었나 석운?”
“… 아까 꿀엿 사드실 때.”
“아, 그 하하. 입가심으로. 그때 별일 없었는데?”
조뢰가 그런 말을 뭣하려 하냐는 듯 눈을 찡그렸다.
“엿장수랑 가격 흥정하실 때 보니, 그자의 손이… 무인의 손이었습니다.”
“응? 아까는 그런 얘기 안 했잖아?”
“사연 있는 자일 수도 있고… 그게 특기할 일인지도…”
석운이 말끝을 흐렸다.
월연이 말을 이어받았다.
“운해문에서 나와 강호를 떠도는 자들이 있지요? ”
“네. 드물긴 하지만 연을 끊은 자들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천휘국에서 소란 일으킨 자들도…”
천휘국에 사절로 갔다가 물의를 일으켜 내쳐진 사형들을 떠올렸다. 유독 자유분방하긴 했지만 과연 정말 그런 일들을 저질렀을까. 운해문 앞마당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고 섰던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여안의 입을 닫았다.
“2층 난간 쪽에 앉아 있던 자. 무뢰배들이 그 자의 지시를 받는 듯했습니다… 어설프게나마 청해파 무공이 보였는데.”
“무뢰배들이 있었습니까?”
“…네. 잠시 소란이 있었습니다.”
여안이 눈을 둥글게 뜨고 월연을 보았지만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하룻밤만 묵고 이동하자고 헸다.
“이곳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아쉬운데… 너야 속세에서 실컷 살다와서 모르겠다만. 언제 또 와보겠나 이 물자 넘치고 사람 넘치는 곳에.”
조뢰가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에야 겨우 왔을 뿐이잖아. 겨우 바람목 하나 봤고. 무뢰배야 2층 놈이랑 한패였나 보지. 어설프게 우리 무공 흉내 낸 게 뭐? 송림 사람 중에 그러지 않는 자가 더 드물지.”
“… 미행이 붙었다는 느낌입니다. 오래 머물 이유가 없지요.”
월연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느낌만으로 움직일 순 없어.”
조뢰가 곧장 받아쳤다.
“강호에 나돌다 보면 쓸데없이 신경 쓰이게 마련이잖아. 괜히 우리가 먼저 경계하는 꼴만 되는 거라고.”
여안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월연의 얼굴에서 어떤 설명도 찾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말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였다.
“느낌만은 아니지.”
여안이 조용히 말했다.
“오히려 우리가 염탐을 당하고 있어…. ”
조뢰가 입을 열려다 말았다.
“우리가 찾는 건 아직 시작도 못했어.”
여안이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무언가가 이미 우리를 먼저 살폈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야.”
금우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바람은 정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만드는 흐름은 바람과 다르죠.”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안이 결론을 내렸다.
“해 뜨는 대로 출발하자. 동릉성은 경유지일 뿐이야.”
조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 알았어. 알았다고. 꼭 쫓기는 사람들처럼 구는 것 같아서 그렇지.”
그는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국수라도 더 먹고 올 걸.”
동이 틀 무렵, 그들은 동릉성을 뒤로 하고 말을 달렸다.
부드럽고 깊은 흙이 쌓인 완만한 구릉이 물결처럼 이어졌다. 녹나무와 참나무들이 서로 등을 맞댄 채 자라나 빼곡한 초록의 군락을 이루었다. 녹림이 벽처럼 이어지는 길 위로 햇빛이 부서져 내렸다.
며칠이 지나자, 말굽이 달리며 파내는 흙이 점차 얕아지고 돌이 드러났다. 따라오던 물길은 점차 흐름에서 낙차로 바뀌고, 나무의 간격이 성기어지기 시작했다. 숲은 더 이상 길을 막지 않았고, 나무 사이로 바람이 그대로 빠져나갔다. 상록의 활엽수들이 사라지고 얇은 잎의 소나무와 전나무의 향이 경사진 산 길을 따라 퍼져나갔다.
“이제 바람이 달라집니다.”
금우가 말 위에 앉은 채로 손을 허공에 뻗었다. 동릉성을 떠나 내달린 지 며칠 째, 바쁘게 재촉한 걸음을 따라온 것은 물소리와 바람결뿐이었다. 산 길을 따라 걷는 말들이 터덜터덜 지친 발걸음을 내디뎠다. 말 등위의 몸이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다들 말이 없었다.
앞서 가던 여안이 고삐를 살짝 조여 걸음을 늦추었다. 이내 맨 끝에서 따라오던 월연과 나란히 서게 되었다. 침묵 속에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여안이 주먹 쥔 손을 월연에게 내밀었다. 월연이 그를 쳐다보았다. 여안은 턱으로 월연의 손을 가리켰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그는 움켜쥔 손을 펼쳐 무언가를 손바닥에 떨어뜨렸다.
풋. 생각지도 못한 것이 손에 떨어지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빨간 산딸기 한 알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손바닥을 오므린 채, 잠시 그대로 두었다. 여안은 아무 말 없이 고삐를 다시 잡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봐라. 괜히 호들갑 떤 거야.”
조뢰가 입을 열었다.
앞쪽 능선은 트여 있었고, 바람도 순했다. 위험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월연은 대꾸하지 않았다. 바람이 분다. 분명 분다. 그러나 어디선가 빠져나간 듯, 결이 비어 있다.
금우가 앞을 가리켰다.
“이제 곧 길이 갈립니다. 하나는 넓은 평로지만 산을 둘러 가야 하고, 하나는 가파르지만 빠른 길입니다.”
“협곡은?”
“아직은 아닙니다. 우선 호국으로 들어가야 소국 경계에 닿을 수 있습니다. 아마 호국에서는 서쪽의 바람이 섞여 들어올 겁니다.”
조뢰가 말머리를 가파른 길로 돌렸다.
“빨리 가는 게 낫지 않아? 이러고 계속 다니는 거 상당히 지친다고.”
여안은 말없이 두 갈래를 번갈아 보다가 금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 길을 택하면 놓치는 게 뭐지?”
하나는 계곡을 따라 곧게 뻗은 길이었다. 물길이 옆에 붙어 있어 말에게 물을 먹이기 편했고, 바람도 일정했다. 좁고 가팔랐지만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었다.
다른 하나는 능선을 돌아 내려가는 길이었다. 길은 넓으면서 완만했고, 한눈에 보기에도 돌아가는 길이었다. 바람은 들쭉날쭉했고, 지면에는 오래된 나뭇잎과 자갈이 뒤섞여 있었다.
“그 길은 바람이 너무 한쪽으로만 갑니다. 여기서 이 정도로 고른 결이면, 이미 드러난 셈이지요.”
“아 그래. 돌아가자 돌아가. 이것저것 다 살피고 가자고. 어휴.”
조뢰가 완만한 내리막으로 먼저 들어섰다. 월연은 고삐를 잡은 손에 잠시 힘을 주었다. 발을 굴러 말을 빠르게 달리는 조뢰를 이어 월연과 여안 그리고 금우와 석운이 잇따라 달려 나갔다.
조용한 숲길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흙먼지에 뭉쳐 멀어져 갔다. 숲 위로 바람이 스쳐갔다. 능선 너머에서 바람이 우는 소리는 아직 귓가에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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