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구궁- 쏴아-
난폭한 물살이 돌을 깨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비에 불어난 물이 바위 사이를 비집고 내려가며, 쉼 없이 방향을 틀었다. 갈라진 소리는 다시 협곡의 양쪽 벽을 때리고 돌아왔다.
그 위로 바람이 들이쳤다. 위에서 아래로, 옆에서 등 뒤로. 방향을 잃은 결이었다.
조사대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손에 쥐고 협곡 안쪽으로 들어섰다. 길이라 부르기 어려운 바위틈을 따라 일렬로 움직였다.
바람을 흔들었다. 분명 인위다. 이렇게 파란과 안정을 조정하려면 바람결을 하나씩 솎아내야 가능하다. 소국이 아닐 텐데. 그렇다면 그는 무슨 생각으로 9봉을 흔든단 말인가. 월연은 발을 뻗어 앞사람을 따라 돌 틈을 디뎠지만 초점은 점차 흐려졌다. 생각이 엉켜 들었다. 나는 아직 임무를 끝내지 못했는데. 이 판에서, 나는 무엇이 되어 있는가.
금우가 앞서 걸으며 손을 들어 신호했다.
그의 손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 여기서, 흐름이 끊깁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위 너머에서 기척이 스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물소리와 바람 사이로, 사람의 발놀림이 섞였다.
조뢰가 먼저 반응했다. 그가 차고 있던 봉을 들어 올렸다.
그때, 바위 위에서 그림자 셋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검은 천이 바람에 휘날렸고, 얼굴은 가려져 있었다. 그들 또한 이 조우를 예상하지 못한 듯, 동작이 반 박자 늦었다.
바위 사이에서 그림자가 튀어나오는 순간, 협곡의 공기가 먼저 갈라졌다. 봉과 검이 맞부딪히며 날 선 금속음이 협곡 벽을 타고 튕겨 나갔다.
여안이 반 발 물러서며 봉을 세워 들었다. 정면이 아니라, 흐름을 끊는 방어였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든 첫 일격이 봉 끝에 걸려 옆으로 흘러나갔다.
곧바로 옆에서 또 다른 검이 각을 바꿔 파고들었다. 그 순간, 금우가 여안의 바로 옆에 붙어 내리치는 검을 막아냈다. 동시에 뒤에서는 더 묵직한 움직임이 들어왔다.
석운은 검을 뽑지 않았다. 봉을 눕혀 몸 앞에 세우고, 방패처럼 후위를 막아섰다. 타격은 봉 위로 쓸려 지나갔고, 충격이 그대로 팔을 타고 올라왔다.
그 사이, 앞에서는 이미 거리가 무너지고 있었다. 조뢰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파고들었다.
기세로 밀어붙이는 봉이 허공을 찢었고, 상대는 몸을 비틀어 간발의 차로 그 궤적을 흘려보냈다.
“깊게 들어가지 마!”
여안의 목소리가 협곡에 울렸다.
월연은 그 틈에 있었다. 검과 봉이 스치듯 지나간 자리, 검은 천 아래 눈빛 하나가 그녀를 향했다. 짧게 흔들린 월연의 시선도 그를 붙잡았다. 월연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발이 돌을 짚고, 바람을 비껴 섰다. 그 움직임은 너무 짧아, 공격도 방어도 되지 않았다.
여안의 눈에는 그 짧은 틈이, 전투가 아니라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몸짓처럼 느껴졌다.
“월연!”
여안의 부름에 그녀는 뒤늦게 몸을 돌렸다.
전투의 진동을 견디지 못한 바위가 위에서 무너졌다. 돌이 떨어지는 소리보다 먼저, 석운이 움직였다. 그는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몸을 던졌다. 후위로 들어오는 공격을 봉으로 막아내며, 동시에 바위의 낙하를 어깨로 밀어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바위가 굴러 떨어지며 협곡 아래로 사라졌고, 그 충격에 석운의 몸이 한순간 휘청였다.
적월단의 그림자들은 더 얽히지 않고, 물살과 바위, 굽이친 지형을 타고 흩어졌다.
그림자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떨림은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석운.”
여안이 불렀다.
석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봉을 짚은 채 무릎을 한쪽 꿇고 있었다. 숨이 고르지 않았다. 여안이 다가가자,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봉을 내려놓는 순간, 어깨 아래쪽에서 검붉은 피가 천천히 번져 나왔다. 바위에 부딪히며 찢긴 상처였다.
“움직이지 마.”
여안은 낮게 말하며 석운의 옷자락을 걷어 올렸다. 젖은 천이 살에 달라붙어 있었다. 손을 대자마자 느껴지는 열기에, 그는 잠시 숨을 멈췄다. 깊지는 않지만, 안쪽까지 충격이 전해진 흔적이었다.
조뢰가 옆에서 이를 악물었다. 여안은 짐에서 약초 꾸러미를 꺼냈다. 평소 늘 챙겨 다니던 것들이었다. 찧어둔 해이초 잎과 말린 뿌리, 지혈용 분말. 손놀림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상처를 씻고, 피를 눌러 멈추게 하고, 약을 발랐다.
석운이 턱에 힘을 주며 숨을 내뱉었다. 여안은 붕대를 꺼내 감았다. 매듭을 묶던 손을 잠시 멈췄다가, 더 단단히 조였다.
“지금은 더 움직이면 안 됩니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가죠.”
금우가 석운을 부축했다.
여안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월연을 한 번 보았다.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가 멈췄다.
“… 다친 데는 없습니까.”
그 말 뿐이었다.
월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시선은 석운의 붕대에서, 다시 협곡 너머 어둠으로 옮겨갔다. 바람이 다시 한번 협곡을 훑고 지나갔다.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안개가 길게 드리운 협곡에 새벽 어스름의 옅은 빛이 스몄다. 구름을 뚫고 내린 새벽빛은 은색 옷깃에 부딪히며 흩어졌다. 월연은 머리를 풀고 이마엔 은빛 액대를 둘렀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귀밑머리를 넘기고 지나갔다. 월연은 소국으로 갈 채비를 마치고 검은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운해문에 처음 당도하던 날, 여안의 눈에 담긴 그 모습 그대로.
협곡을 빠져나와 소국으로 향하는 길에는 간간이 보이던 둥근 잎의 활엽수는 자취를 완전히 감추고 침엽수만 높이 뻗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내딛는 말발굽 소리만 지면에 툭툭 떨어졌다.
이윽고 소국의 성곽이 보이기 시작했으나 드나드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황량한 성벽을 따라 야윈 개 한 마리가 지나갔다.
“서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산길을 넘다 말이 지쳐, 잠시만 쉬어가려 합니다.”
월연의 은빛 옷을 보자 호위병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신호하자 병사 중 한 명이 급히 안쪽으로 달려들어갔다. 잠시 후, 소국의 외사부 관리 한 사람이 나왔다. 옷매무새가 단정하고 입가엔 억지로 자아낸 미소가 걸린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월연과 조사대를 훑어보았다. 이윽고, 차분하고 공손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손님이 오는군요. 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월연이 앞으로 나섰다.
“서쪽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잠시 쉬어가도 될른지요?”
그녀는 말을 끝내고 관리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가타부타 말을 않고, 귀 아래를 천천히 긁적였다. 월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바람이 사납더군요. 이쯤에서는 늘 그렇습니까?”
관리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는 대답 대신 월연의 은색 옷자락을 한 번 훑어보았다.
“…우리 소국은 평온합니다.”
관리의 시선이 잠시 성루 위를 스쳤다. 그 순간, 위에서 깃발 하나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손님을 성밖에 세워둘 수는 없지요.”
말끝이 단정했지만, 어딘가 굳어 있었다.
“객관으로 모시겠습니다. 외부인이 홀로 다니기엔 불편하실 겁니다.”
여안이 가볍게 되물었다.
“불편이라니요?”
“이곳은 외부와 왕래가 잦은 곳이 아닙니다. 낯선 얼굴이 보이면, 괜한 말이 붙습니다.”
관리는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미소로 잠시 여안과 눈을 마주쳤다.
“그런 일은 서로에게 좋지 않겠지요.”
곧이어 그는 객관으로 이어지는 큰 길로 그들을 안내했다. 걸음을 늦추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다만,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앞서 걸었다.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싼 소국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성곽에 닿을 때까지는 가파르게 치솟던 산세가, 문을 넘는 순간부터는 거짓말처럼 아래로 꺾이며 한참을 내리막으로 이어졌다. 마치 깊숙이 파인 그릇처럼, 오목한 분지가 그 안에 고여 있었다.
산들은 사방을 막아선 채 하늘을 좁게 만들었고, 그 한가운데로 강줄기 하나가 느릿하게 지나갔다. 물길을 따라 평지가 펼쳐졌고, 그 위와 산비탈을 타고 가옥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바깥의 황량함이 무색할 만큼, 안쪽은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길바닥에는 돌이 고르게 깔려 있었고, 그 사이로 먼지나 잡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성곽 밖의 적막과 달리 시가지에는 사람들의 기척이 남아 있었다.
장작을 패는 이의 팔이 큰 반원을 그리며 내려왔고, 물동이를 인 여인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은 길목 한 귀퉁이에서 뛰어놀았지만, 웃음소리조차 산벽에 부딪혀 금세 낮게 가라앉는 듯했다.
산에 둘러싸인 채, 소리와 숨결마저 안쪽에 머물렀다. 바람의 흐름은 잔잔하고 고요했다. 관리가 고개를 돌렸다.
“이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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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데? 호국이랑은 영 딴판이네? ”
조뢰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는 조용하잖아?”
“조용한 게 문제가 아닙니다. 바람이 멎은 자리가 문제지요.”
금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바람길이 성곽을 넘는 순간 끊겼습니다. 막힌 게 아니라… 없는 것처럼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이 없던 석운의 낮은 목소리가 바닥에 떨어지듯 흘러나왔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조뢰가 눈을 끔뻑였다.
“누가?”
“누군가요. 객관 위치, 창 방향, 계단 소리. 사방에 눈과 귀가 있습니다.”
여안이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럼 우린 지금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묻고 다닐 수도 없겠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월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보이는 것만 보지요.”
조뢰가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거라니?”
“정돈된 것. 조용한 것.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것.”
여안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이는 것들 사이에 숨은 것들을 읽어내야겠어.”
그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지붕 장식이 화려한 소국의 왕궁이 산비탈 위에서 안개에 둘러싸인 채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그날 밤이 깊도록 소국의 안개는 좀처럼 걷히지 않았고, 왕궁의 불빛은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번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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