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잔뜩 인상을 찌푸린 하늘 아래 회색 구름이 낮게 깔렸다. 마구간 처마에 비가 투둑투둑 떨어졌다.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말들이 숨을 쉴 때마다 하얀 김이 올라왔다. 고도가 높은 산지는 늦봄인데도 비가 내리니 날이 꽤 쌀쌀했다.
여안은 객관 모퉁이를 돌아 마구간으로 향했다. 마구간 안쪽은 젖은 흙과 말의 체온, 눅눅한 볏짚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여안은 말들의 다리를 하나하나 살폈다. 말굽에 낀 돌을 떼어내고, 젖은 안장을 다시 조였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말들은 지친 듯 고개를 숙였다. 월연이 타고 온 검은 말만이 고산 지대의 무거운 공기가 익숙한 듯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 그래도 녀석들 별 탈 없네.”
가장 야윈 말의 갈기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석운이었다. 비에 젖은 옷자락이 발목에 달라붙어 있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얼마나 되었지? 운해문을 떠난 지”
여안은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말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보름은 지났고… 중간에 지체가 있어, 아마 스무날 되었을 겁니다.”
“그래. 스무날이 지났구나. 9봉은 어찌 되었으려나… 여기까지 왔는데 되려 의문만 더 커져가는구나.”
여안의 말에 석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돌려 성곽 쪽을 바라보았다. 안개와 비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지붕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위에 자리한 왕궁의 외곽 담장이 흐릿하게 드러나 있었다.
마구간을 나서자 빗소리가 더 또렷해졌다. 비는 굵지도, 가늘지도 않게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거의 없었다. 빗방울은 옆으로 흩어지지 않고 곧게 내려왔다. 여안은 잠시 회랑에 서서 마당을 바라보았다. 그때, 객관 문쪽에서 조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비 그칠 기미가 없어. 오늘은 꼼짝없이 여기 묶였네.”
조뢰는 처마 끝에 서서 빗줄기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투덜대는 말투였지만, 표정은 어딘가 신중했다.
“금우는?”
“안에서 지도 펼쳐놓고 있어. 바람길이랑 물길 표시해 놓은 거 다시 보고 있더라.”
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객관 안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가장 안쪽 방. 월연이 머무는 곳이었다. 문은 닫혀 있었고,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도 비는 그칠 기미 없이 주룩주룩 내렸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하여 이른 오후임에도 사방이 저녁처럼 어둑어둑했다. 종일 내린 비로 객관 안의 공기는 눅눅하게 가라앉았다. 조뢰는 창가에 기대 서서 밖을 내다보다가 혀를 찼다.
“비 오는 날엔 움직이지 않는 게 상책이야.”
조뢰가 말하자 여안이 픽 웃었다.
“네가 그런 말 할 줄은 몰랐는데.”
그는 의자에 걸터앉아 봉 끝을 만지작 거렸다. 그러다 봉을 바닥에 탁 세우며 벌떡 일어섰다.
“잠깐만 다녀오자.”
“어디를?”
“보이는 데까지만.”
여안은 도포 자락을 여미고 밖으로 나섰다. 조뢰와 석운이 뒤이어 일어섰다. 금우가 펼쳐 둔 지도를 급하게 정리하자 여안이 막아섰다.
“한 명은 사절과 함께 있는 게 좋겠어.”
비는 여전히 곧게 떨어지고 있었고, 길은 물에 젖어 어둡게 빛났다. 사람은 드물었지만,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비를 맞으며 짐을 나르는 자, 처마 밑에서 장작을 다듬는 자가 간간이 눈에 띄었다.
객관에서 몇 걸음 떨어지자, 작은 사당 하나가 길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사당이었다. 돌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었고, 처마 끝에는 빗물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여안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
사당 앞에는 향로가 놓여 있었지만, 향은 피워져 있지 않았다. 대신 그 안에는 젖은 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누군가 얼마 전까지 향을 피웠다는 흔적이었다. 비에 씻겨 내려가다 만 재가 바닥에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향을 피웠었네.”
조뢰가 중얼거렸다.
석운은 말없이 사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쪽에는 작은 위패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글자는 흐릿했고, 시호가 적혀 있어야 할 자리는 비어 있었다.
-소국왕비 성씨 신위
조뢰가 눈을 크게 떴다.
“왕비 성씨?”
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위패 아래를 보았다. 제물은 없었다. 과일도, 술도 없었다. 다만 지붕에서 떨어진 물이 바닥에 고여 있었고, 그 위로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이런 데를 왜 길가에…”
조뢰의 말이 흐려졌다. 그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사당은 마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서 있었다.
그때,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오셨군요.”
세 사람은 동시에 몸을 돌렸다. 성문에서 그들을 맞이했던 외사부 관리였다. 비를 맞지 않게 기름종이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사당 쪽을 힐끗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지난 일입니다. 굳이 보실 필요는 없지요.”
“지난 일이라고 하기엔,…”
조뢰가 말을 잇다 말았다. 관리의 시선이 잠시 조뢰에게 머물렀다.
“비도 오고, 길이 미끄럽습니다.”
관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손했다.
“객관으로 돌아가시지요. 이런 날엔 쓸데없이 밖을 돌아다니면, 괜한 말이 생깁니다.”
여안은 사당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향은 최근까지 피워졌습니다.”
관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우산을 조금 고쳐 쥐었다.
“그건… 개인의 신심이겠지요.”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여안은 그가 돌아서는 등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발을 옮겼다. 객관으로 향하는 길에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사당은 뒤에 남았지만, 그 이름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빗방울은 옆으로 흩어지지 않고 곧게 떨어졌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도 일정했다. 월연은 잠에서 깬 것인지 아직 잠에서 머무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로 천천히 눈을 떴다. 객관의 천장은 어둑했고, 등불은 꺼져 있었다. 창호지 너머로 새어드는 회색빛이 방 안의 윤곽만 겨우 드러냈다.
비의 냄새가 스며들었다. 눅눅한 흙냄새와 젖은 나무 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깔리는 피냄새.
월연은 텅 빈 눈으로 한참 동안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끝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도, 한 번 닦아내야 할 것처럼 손바닥을 쓸었다. 그러고는 멈췄다.
그날, 하늘은 맑았고, 얼굴을 스치던 바람은 차가웠다. 차갑지만 청량하게 불어대는 바람을 가만히 맞고 있자니 전나무 향이 은은히 배어있어 상쾌하기까지 했다. 달이 붉게 물들기 전, 천진난만하게 아름다운 밤이 마치 찰나의 꿈같았다.
그 꿈은 이내, 바람결에 파고드는 피 냄새와 불타는 냄새로 깨졌다. 검붉은 피와 불로 끈적하고 뜨거워진 공기는 두 뺨에, 두 눈과 두 손에 눅진하게 들러붙었다. 그렇게 범벅이 된 그날의 기억은 눈을 떠도 감아도, 손을 비비고 쓸어봐도 떨칠 수 없었다.
궁 안의 불빛은 하나씩 꺼졌다. 문들은 조용히 열리고 닫혔다. 숨죽인 발소리는 서두르지 않았다. 짧은 비명이 휘장에 막혀 끊겼고, 그 뒤로는 바람에 꺼지는 촛불처럼 낮은 신음만 남았다.
검은 하늘 아래 은빛 칼날이 번뜩였다. 월연은 칼날 위로 핏물이 미끄러운 선을 만들며 흐르는 것을 보았다. 칼자루를 움켜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숨을 한 번 들이켰다.
발을 내딛는 순간,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 내는 걸음은 죽일 것. 판단하지 말 것. 돌아서는 동시에 단도를 던졌다. 단도는 등불 아래쪽, 월연의 시선보다 훨씬 낮은 곳에 꽂혔다.
그 순간,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월연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문 밖에서 조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진짜 안 그치네! 이런 날엔 따뜻한 국물이 최고인데. 안 그래?”
그 뒤로 여안의 낮은 웃음이 섞였다.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사절님”
여안의 목소리였다. 월연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숨을 한 번 길게 들이마셔 호흡을 골랐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여안이 들어섰다. 옷자락 끝이 조금 젖어 있었고, 머리칼에도 빗물이 맺혀 있었다. 그는 방 안의 공기를 느끼는 사람처럼, 잠시 멈춰 섰다.
“괜찮으십니까?”
월연의 이마에 살짝 맺힌 땀을 보고 그가 물었다. 월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밖에…”
그는 단어를 고르는 듯했다. 감시라든가 의혹이라든가 하는 단어를 입 안에서 굴리다 꺼내지 않았다. 월연은 평소에 생각을 숨기지 않던 그가 머뭇거리는 것이 의아했으나, 되묻지는 않았다.
배려가 느껴지는 작은 망설임과 물기 어린 머리칼, 맑고 단단한 그러나 오늘따라 조금 지친 눈빛.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현재가 과거를 내쫓아버렸다. 그가 눈앞에 나타나고, 말하고, 서성이는 동안은 현재가 살아있고,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숨을 쉴 수 있었다.
월연은 그가 말을 꺼내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여안이 조심스레 말했다.
“밖에… 나갔다가 작은 사당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왕비의 위패가 있었어요. 좀… 이상하죠? 난을 일으킨 왕비를 기리다니.”
월연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흔들린 것을 들키지 않으려 더 단단히 고정했다.
“…”
월연의 침묵 사이로 빗소리가 떨어졌다. 여안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조금 있다가 밥 먹을 건데, 같이 하시죠? ”
월연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혔다. 월연은 문이 완전히 닫힌 뒤에야 쥐었던 손을 풀었다.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녀는 그것을 숨기듯 이불 끝을 정리했다.
늦은 오후, 비는 더 굵어지지 않았지만 더 어둡게 내렸다. 하늘이 내려앉아 산맥의 꼭대기를 삼켰다. 안개는 산비탈에 걸쳐 있었다. 왕궁은 여전히 그 안갯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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