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기게 내리던 비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새벽녘, 왕궁의 동쪽 전각에는 물기를 머금은 공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전각을 둘러싼 누마루는 밤새 들이친 비에 흠뻑 젖었고, 처마에서는 맺혀있던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월연은 누마루에 서서 물방울이 낙하하며 그리는 점선을 바라보았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물이다. 얕은 물은 바람결에 일렁이나, 깊은 물은 제 뜻대로 흘러간다 하였지. 얕은 웅덩이 하나쯤 마른다 한들 거슬려할 것 없다고.
멀리서 새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전각 모퉁이를 돌아들며 점차 커졌다. 월연은 고개를 돌렸다. 검은 새가 낮게 날아오더니, 난간에 작은 목패를 하나 내려놓았다.
붉은 달이 새겨진 목패에 한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混
월연의 시선이 마지막 획 위에 잠시 머물렀다. 섞다. 흐리다. 경계를 지우고, 선을 무너뜨려 탁하게 만들라는 뜻.
새는 울지 않았다. 난간에 앉은 채 고개를 한 번 기울였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날개를 접었다.
월연은 손을 내밀었다. 목패를 쥐는 순간, 차가운 나뭇결이 손바닥에 닿았다. 아주 미세하게, 숨이 고였다. 그녀의 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손 안에서 공기가 눌리듯 조용히 모였다. 누마루의 젖은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앉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이 목패를 감쌌다. 붉은 달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딱.
가느다란 소리와 함께 균열이 번졌다. 월연은 손을 움켜쥐었다. 목패는 산산이 부서졌다. 조각은 손바닥 안에서 가루로 부스러졌다. 붉은 안료가 손금 사이에 묻어 잠시 선명하게 남았다. 그녀는 손을 펼쳤다.
새벽바람이 아주 약하게 불었다. 가루는 공중으로 흩어졌다. 붉은 점들이 빗물에 젖은 누마루 위로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검은 새는 어느새 날아가고 없었다.
월연은 잠시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처마에서 떨어진 물이 돌바닥을 때리고 낮게 튀어 올랐다. 그녀는 손끝에 남은 붉은 자국을 옷자락에 닦았다.
발소리가 들려왔다. 조사대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소리였다. 월연은 돌아섰다. 표정에는 아무 흔들림도 없었다.
“드디어 그치는구만! 이제 좀 실컷 움직여 보겠구나.”
조뢰가 팔을 높이 들어 기지개를 켰다.
“왠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왕궁으로 끌어들이질 않나, 천천히 살펴보라 질 않나.”
금우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렇게까지 안으로 들일 이유가 있었을까요.”
여안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아선 그의 시선이 누마루 끝으로 향했다.
월연이 서 있었다. 젖은 난간 앞에 선 채, 아래쪽 돌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약한 아침이라 그녀의 은빛 옷자락은 미동이 없었다.
여안은 잠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가 있겠지.”
그는 짧게 말하고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순간, 월연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가볍게 발을 굴러 난간 위에 올라섰다. 이어서, 경공으로 사뿐히 날아 내렸다.
“비가 그쳤군요.”
돌바닥에 내려선 월연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구름이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연회가 열렸던 곳이 저기지요.”
월연은 여안이 서 있는 누마루 난간을 올려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궁 안쪽으로 던지며 말했다. 산비탈을 따라 이어진 회랑 끝, 연못 위에 걸린 누각이 흐릿하게 보였다. 밤새 내린 비로 물빛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안이 되물었다.
“… 누각 말입니까.”
“왕자들이 쓰러졌다는 자리.”
월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조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거기부터 보는 게 맞겠지.”
금우가 연못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비도 막 그쳤으니, 바람결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수도 있겠습니다.”
월연은 이미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젖은 돌길 위로 그녀의 옷자락이 낮게 스쳤다. 여안은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아래로 훅 뛰어내려 따라갔다.
연못 위로 놓인 돌다리를 건너자 누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새 내린 비로 마루가 어둡게 젖어 있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연못 위로 잔잔한 파문을 만들었다.
“여안.”
조뢰가 뒤따라오며 여안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은밀한 장난기가 섞인 몸짓이었다.
“적당히 해라. 시선 너무 간다."
여안이 대답 없이, 앞서 걷는 월연을 응시하자, 조뢰는 히죽거리며 여안의 옆얼굴을 훑었다.
여안이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눈에 띄니까. 안 보기가 더 힘들다.”
조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눈에 띄긴 하지.”
여안이 그제야 시선을 거두어 조뢰를 무심하게 돌아보았다.
“… 앞이나 봐라.”
여안은 짧게 대꾸하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조뢰는 그런 여안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금우가 발걸음을 멈췄다.
“… 잠깐.”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비가 그친 뒤의 공기였다. 그런데 누각 아래쪽에서 묘하게 눌린 기류가 느껴졌다. 바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눌러 담아 둔 것 같은 공기였다.
“무슨 일이지.”
여안이 물었다.
금우는 대답하지 않고 누각 바닥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여기… 기가 이상합니다.”
조뢰가 놀랍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곳은 안 이상한 것이 없군.”
금우는 고개를 저었다.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여안이 누각 난간 아래를 살폈다. 젖은 돌 틈 사이에서 미세하게 빛이 튀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가느다란 침이었다.
여안은 손가락 사이에 낀 침을 천천히 돌려 보았다.
잠시 뒤, 그는 몸을 낮추었다.
젖은 마루 틈 사이에 가느다란 자국이 몇 군데 더 남아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억지로 뽑아낸 듯한 작은 흠집이었다.
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나만 쓰인 건 아닌 것 같은데.”
조뢰가 침을 들여다보았다.
“… 이건.”
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누각 바닥과 연못 쪽을 차례로 훑었다.
“왕궁 경비가 쓸 물건은 아니군. 이 작은 침 몇 개로 주변의 기운을 눌렀다면…”
금우가 낮게 말했다.
“…멸심침 아니겠습니까.”
잠자코 있던 석운이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멸실침? 진짜 쓸 수 있는 자가 있단 말인가?”
조뢰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 있지.”
그의 눈이 침 위에서 잠깐 멈췄다.
“적월단.”
잠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누각 위에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만 낮게 이어졌다.
그때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단정할 수는 없겠지요.”
여안이 고개를 돌렸다.
월연이 누각 기둥 옆에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잠깐 침 위에 머물렀다가 다시 여안에게로 돌아왔다.
조뢰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렇긴 하지.”
금우가 낮게 덧붙였다.
“멸심침이라고 해서 곧 적월단이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흉내만 낸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조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이런 걸 제대로 쓸 줄 아는 놈? 강호에서 손가락에 꼽는다.”
여안은 손에 든 침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월연의 시선은 연못 위에 머물러 있었다. 표정은 읽히지 않았다. 걸음을 옮기기 직전, 여안의 시선이 한 번 더 월연을 스쳤다.
조사대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젖은 누각 마루 위에 남은 흔적들을 각자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물새 한 마리가 낮게 울었다.
왕궁은 조용했다.
연못을 내려다보는 회랑 위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국왕이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가 그친 뒤의 습한 공기가 옷자락을 무겁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왕은 난간에 손을 얹은 채 아래를 바라보았다.
누각 위의 사람들. 젖은 마루. 그리고 연못 위에 낮게 가라앉은 공기. 그의 시선이 잠시 멈춘 것은 은빛 옷자락이었다.
월연.
왕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얇아졌다. 잠시 뒤 그는 고개를 돌렸다.
“…”
다만 연못 위를 스치는 바람을 한 번 느끼듯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발걸음이 조용히 회랑 안쪽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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