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사부 관리가 객관에 다시 나타난 건 다음날 해가 기울기 전이었다.
비는 며칠째 그치지 않았고, 먹구름은 색이 더 짙어졌다.
조사대는 안 쪽 큰 방에 모여 있었다. 금우는 펼쳐 둔 지도 위에 먹선 몇 개를 더 그어 넣고 있었고, 석운은 창가 기둥에 기대 섰다. 조뢰는 그 옆에 앉아서 젓가락으로 빈 그릇을 툭툭 두드렸다.
“비 오니까, 나가도 잘 보이지도 않고, 사람도 안 다니고.”
여안은 대답은 하지 않은 채, 턱을 괴고 앉아 창틀에 떨어지는 빗물만 바라봤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보니, 관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관리는 방 안의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본 뒤 시선을 월연에게 옮겼다.
“전하께서 초청하십니다.”
“전하?”
조뢰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관리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걸렸다.
“천계파와 청해파의 손님을 한 번에 만날 기회는 흔치 않지요.”
그는 덧붙여 말했다.
“친히 초청하시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여안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지금, 저희 모두를요?”
“예” 관리의 시선이 여안에게 옮겨갔다.
“다 함께.”
방 안의 적막은 처마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소리를 크게 울렸다. 곧이어, 월연이 조사대와 눈빛을 교환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여안은 그 말 끝에 실린 무게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관리를 따라 객관을 나섰다. 비는 여전히 곧게 낙하했고, 길은 물에 젖어 검게 빛났다. 삿갓 끝에 맺힌 빗물은, 말굽이 땅을 디딜 때마다 흔들리며 떨어졌다.
객관을 뒤로하고 한동안 가다 보니 길은 서서히 오르막으로 바뀌었다. 시가지는 분지의 바닥에 머물러 있었고, 왕궁은 그보다 한참 위, 산비탈을 타고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간간히 그들과 마주친 사람들은 조용히 가장자리로 비켜섰다. 고개를 숙이기도 했고,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누군가는 잠깐 월연의 은빛 옷자락을 훑어보았고, 누군가는 끝내 보지 않았다.
비에 젖은 돌길 위에서 말굽소리는 일정했다. 길이 꺾일 때마다, 아래쪽의 소국이 조금씩 멀어졌다. 분지에 고인 집들과 사람들의 기척이 안갯속으로 가라앉았다.
돌을 쌓아 만든 왕궁 외곽의 담장 곳곳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었다. 그 흔적과 빗물은 왕궁 전체를 감싸는 검은 구름처럼 보였다.
궁 안으로 들어서자 돌과 계단, 기둥과 회랑이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나무는 적었다. 꽃도 거의 없었다.
월연은 변화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누각의 천장에는 금빛의 용이 비늘마다 박힌 옥을 반짝이고, 정원을 수놓은 울긋불긋한 꽃마저 아찔한 향을 내뿜으며 야단스레 치장하던 곳이었다.
그곳은 이제,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공기가 폐로 들어오기 전에 한 번 걸러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어 있었다.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삼켜야 할 것들이 정해진 듯 모든 것이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다.
여안은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깨닫고, 다시 풀었다. 조뢰와 석운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빛내며 입을 다물었고, 금우는 볼에 닿는 바람결을 조용히 느꼈다.
관리의 발걸음이 멈췄다. 앞에는 닫힌 문 하나가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그들은 문 앞에 멈춰 섰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 왕궁에는 어둠이 짙게 깔렸고,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월연은 문을 바라보았다.
문 너머에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밤이 있고, 결코 말하지 않을 진실이 있으며,
되돌릴 수 없는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손끝이 떨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문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나인이 그들을 맞았다. 나인은 등불을 들고 회랑을 따라 걸었다.
비는 지붕을 두드렸고, 물줄기가 처마 끝을 따라 떨어지며 일정한 선을 그었다. 회랑의 끝은 내전으로 이어졌다.
나인이 문을 열었다. 안은 넓지 않았다. 벽에는 병풍이 세워져 있었고, 등불 몇 개가 낮게 놓여 있었다. 옅은 향 냄새가 방 안에 가득했다.
중앙의 낮은 상 너머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왕이었다.
“오셨는가.”
낮은 목소리에는 위엄이 있었으나, 어딘가 비애가 깃들어 있었다. 왕은 그들을 한 명씩 훑어보았다.
들어서자마자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은빛으로 빛나는 옷자락이었으나, 그는 일부러 월연은 가장 마지막에 짧게 쳐다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각자 차와 다과가 놓인 상 앞에 앉았다. 왕이 입을 열었다.
“천계파와 청해파의 공이 크오. 나라 간의 화평이 덕분에 유지되는 것이니.”
“과찬이십니다. 방식은 달라도 추구하는 도의 끝은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여안이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 그래 그렇지. 허나, 그 도의 궁극을 손에 먼저 쥐려는 자들이 있으니 어지러운 것 아니겠는가.”
잠깐의 정적이 흐르자 창 밖의 빗소리가 더욱 또렷해졌다.
“중용(中庸)이 지극한 덕이라 배웠습니다. 다만… 기울기 시작하면 그대로 둘 수는 없겠지요.”
“중용을 저버리는 자는 처단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
“처단을 즐기는 자가 중용을 말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균형을 무너뜨리는 칼이 먼저 뽑힌다면 저희는 그것이 누구의 칼이든 막을 뿐입니다.”
여안의 말을 듣던 왕의 시선이 고개를 숙인 채 찻잔을 들고 있는 월연을 스쳤다. 월연은 눈을 내리깔고 찻잔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빛 아래 은빛 옷자락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스친 시선은 잠깐 멈췄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흘러갔다.
왕은 찻잔에 남은 차를 마시고, 차주전자를 들어 새로 차를 채웠다.
“천계파에서 운해문에 보낸 사절이 한 명이라더니, 그대인가?”
월연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다만 찻잔 표면의 김이 흐트러졌다.
“네. 그렇습니다.”
“춘분(春分)에 교류를 시작했을 터인데, 어찌 벌써 송림을 벗어나 소만(小滿)의 계절에 이곳까지 당도한 것인가?”
월연이 입을 열기 전에 그가 덧붙였다.
“급하게 찾는 것이라도 있는가?”
“찾는 것이 있다기보다는, 바람의 흐름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바람이라…”
그는 창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어둠 속에 빗줄기가 곧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 나라는 산에 둘러싸여 바람이 쉽게 드나들지 못하지. 허나… 멎는 법도 없었지.”
그는 시선을 창 밖에 둔 채 말을 이었다.
“그대가 보기에는 어떤가? 이 나라의 바람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가?”
“자연의 바람이라면… 흔적이 남습니다. 들쭉날쭉 하더라도 계절마다 흐르는 방향이 늘 같을 것이고, 길에든, 초목에든 그 결이 남기 마련이겠지요…. 다만, 제가 머문 시간이 길지 않으니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흔적이라…”
말끝이 흐릿해졌다. 왕은 더 묻지 않았다.
잠시 뒤, 그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비가 길어지고 있소. 산길은 젖으면 위험하지. 객관은 습하고, 손님을 모시기엔 불편하오. 궁 안의 동편 전각을 비워 두겠소. 비가 그치고 길이 마를 때까지 머무르시오.”
그 말은 환대처럼 들렸지만, 실내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여안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닐지…”
왕이 고개를 저었다.
“손님이 머무르는 것이 어찌 폐겠는가. 머무르는 동안, 천천히 살피시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거절할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문이 열리고, 나인이 고개를 숙였다.
“이쪽으로.”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인을 따라나서는 월연의 뒷모습을 왕은 잠시 바라보았다. 그는 시선을 곧 거두었으나, 찻잔을 쥔 손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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