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불길 속에 남겨진 것

by 묘월


연못 위 누각을 벗어날 때까지 비린 물 내음이 가시지 않았다. 처마 끝에서 떨어진 마지막 물방울이 연못 위로 파문을 그리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다리를 건너 나오자 조뢰가 젖은 돌길을 툭 차며 다시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여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던 침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펴 보였다. 가느다란 침이 젖은 빛을 띠고 있었다.

조뢰는 여안의 손에 든 침을 흘끗 보고는 혀를 찼다.

“이 나라 왕궁 한복판에서, 저런 물건이 나왔다니.”

여안이 시선을 들어 궁 안 쪽을 응시했다.

“그럼 남은 건 하나잖아.”


그의 눈동자가 산비탈을 따라 길게 이어진 회랑 끝에 머물렀다.


“왕비.”


그 끝 어딘가에 왕비의 침전이 있을 것이었다.

금우가 여안의 눈길이 머문 곳에 시선을 던지며 말을 받았다.

“사건의 중심이 그곳이라면…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궁이 허락할까요.”

석운이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조뢰가 코웃음을 쳤다.

“허락 안 하면?”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왕궁 안에 들어와 있는데.”

여안이 말없이 먼저 발을 옮겼다. 그들은 회랑을 따라 왕궁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한동안 걷자 멀리 회랑 끝, 빛바랜 봉인띠가 비에 젖은 채 걸려있는 문 하나가 보였다. 대역죄인의 오명을 쓰고 버려진, 그러나 왕궁에서 가장 고귀했던 여인의 침전이었다.

궁인 둘이 길을 막아섰다.

“이곳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여안이 멈췄다.

“중궁전이 이쪽입니까.”

궁인은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명으로 봉해진 구역입니다.”

조뢰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봉했다고?”

금우가 차분하게 물었다.

“망자의 처소에 봉인이라니, 무엇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오?”

“그 질문에 답할 의무는 없습니다.”

궁인의 대답과 함께 분위기가 잠깐 팽팽해졌다.

그때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물러서게.”

외사부 관리였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상황을 살폈다. 고개를 끄덕이자 궁인들이 물러섰다.

여안이 관리 쪽을 바라보았다.

“전하의 뜻입니까.”

관리는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잠깐 조사대를 훑었다.

“다만.”

그는 덧붙였다.

“오래 머무르지는 마시지요.”

왕비의 침전에 이르러 문을 열자, 안쪽 공기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오래 닫혀 있던 방의 냄새였다. 젖은 나무 냄새와 희미하게 남은 향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여안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왕비의 침전은 넓지 않았다. 벽을 따라 낮은 장과 병풍이 놓여 있었고, 창가에는 얇은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물건 하나하나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으나, 그것을 만지고 사용했을 사람의 온기만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조뢰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멀쩡한데.”

금우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멀쩡하지 않습니다.”

그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지나치게 깨끗합니다.”

여안의 시선이 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침상 위의 이불은 단정히 접혀 있었다. 탁자 위에는 찻잔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향로가 비어 있었다. 먼지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박힌 듯 놓여 있었지만, 사람이 살며 남겼을 법한 생활의 흔적은 단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조뢰가 장을 열어보더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봐라. 아무것도 없는데?”


“유품을 정리한 걸까요?”


석운의 물음에 조뢰가 서랍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칸칸이 비어 있는 나무 바닥이 메마른 소리를 냈다.


“정리는 무슨. 빗 하나 안 남기고 싹 긁어낸 꼴을 봐라.”


조뢰가 빈 서랍을 발로 툭 밀어 닫았다.


“아주 작정하고 지워났구만.”


여안은 말없이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휘장을 살짝 젖히자 젖은 바람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때 금우가 멈춰 섰다.


“… 잠깐.”


그는 기둥 아래쪽을 가리켰다.


“여기.”


여안이 다가갔다. 기둥 아래 돌바닥에 아주 작은 구멍 하나가 보였다. 여안은 손가락으로 그 주변을 살폈다.


“… 침 자국이군.”


조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또 그거냐.”


금우가 낮게 말했다.


“기류가 눌려 있습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주 약하지만… 남아 있습니다.”


곧이어, 금우가 탁자 아래쪽, 교묘하게 가려진 틈새에서 타다 남은 종이 조각 몇 장을 찾아냈다. 그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며 미간을 좁혔다. 거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들이 찾는 경전…’이라는 글자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누가 태운 것일까요. 왕궁일까요, 아니면… 우리보다 먼저 이곳을 뒤진 자들일 까요.”


“태운 이가 누구든, 보이길 원했나 봅니다.”


창가의 휘장 너머에서 월연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조뢰가 얼른 금우의 손에 든 종이를 낚아채며 그녀를 돌아봤다.


“보라고 놔뒀다? 이게 미끼라도 된다는 말이오?”


월연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뢰가 든 종이보다 바닥에 박힌 멸심침의 흔적을 느리게 스쳐 지나갔다.


“진실은…”


월연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바닥의 멸심침 자국 곁에 멈춰 섰다. 그녀는 자신의 발끝으로 그 흔적을 살짝 가리듯 섰다.


“불길 속에서 가장 먼저 타버리곤 하니까요. ”


조뢰와 금우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지만, 동시에 이제껏 찾아낸 단서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묘한 불쾌감을 남겼다. 조사의 방향이 다시 안갯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여안은 말없이 조뢰에게서 종이를 가져가 품에 넣었다.


“…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는 잠깐 월연을 보았다. 왠지 그녀의 발끝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왕궁에서 가장 높은 누각, 소국왕은 난간에 기댄 채 멀리 아래쪽 회랑을 따라 움직이는 조사대를 내려다보았다.


비가 막 그친 뒤라 공기가 맑았다. 구름이 걷히며 궁궐 안의 젖은 지붕들이 햇빛에 반짝였다. 햇빛이 점점 처마 끝의 물기를 말려갈 때쯤 왕의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외사부 관리였다. 그는 몇 걸음 뒤에 멈춰 섰다.


“전하.”


왕이 돌아보았다.


“들여보냈느냐.”


“예. 지금 살피고 있습니다.”


왕은 난간 위에 손을 올렸다. 젖은 나무 위로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알아차릴까.”


관리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송림이 말입니까.”


왕은 희미하게 웃었다.


바람이 아주 약하게 불었다. 왕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아래를 바라보았다. 말간 공기 사이로 은은하게 내리는 햇빛이 왕비의 침전에서 나오는 조사대를 비추었다.




다음 날 아침, 비에 씻긴 왕궁의 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비가 그쳤으니 산길이 열렸습니다. 전하께서 손님들의 길을 더 붙잡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조사대가 성문을 나설 때까지 아무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환송인지, 쫓아내는 건지 모르겠네.”


조뢰가 중얼거렸다.


외사부 관리가 성문 앞에 서 있었다.


“머무르는 동안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형식적인 말이었다. 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문이 열렸다. 산 아래로 길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다. 여안은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왕궁의 지붕들이 안갯속에 잠겨 있었다. 그는 품 안에 넣어 두었던 종이 조각을 손끝으로 눌렀다.


‘… 그들이 찾는 경전…’


종이는 아직도 희미한 탄 냄새를 품고 있었다. 비릿한 물기 사이로 섞여드는 그 냄새를 끝내 털어내지 못한 채, 여안은 고삐를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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