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물빛이 잠긴 호수

by 묘월


“이야 – 저 아래 좀 봐!”


능선을 돌아 산 반대편에 다다르자 움푹 파인 분지에 자리한 호국(湖國)이 발아래 펼쳐졌다.
호수의 나라. 크고 작은 호수들이 구슬처럼 흩어져 있었고, 그 위로 낮은 햇빛이 반사되어 잔물결을 일으켰다.


천 개의 호수는 저마다 조금씩 다른 물빛을 띄고 반짝였다. 옥빛이 도는 곳, 짙은 청색으로 가라앉은 곳, 구름이 그대로 비치는 투명한 곳까지. 그러나 군데군데 마치 빛이 꺼지듯 연한 회청색으로 생기가 눌린 듯한 곳들이 눈에 띄었다.


월연은 말 위에 앉아 눈을 감았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방향이 일정하지 않았다. 왼쪽에서 불다 말고, 갑자기 등을 밀었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바람의 결이 달랐다.


“… 바람이 고르지 않군요.”


그 말에 금우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깥쪽부터 흐름이 깨져 있습니다. 국경 쪽만이 아닙니다. 안쪽까지 퍼졌습니다.”


호국 성곽의 동문에 가까워질수록, 그 어긋남은 더 분명해졌다. 성문 위에 걸린 깃발들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 것은 팽팽히 당겨지고, 어떤 것은 축 늘어져 바람을 타지 못했다. 성문의 호위병은 운해문 표식을 보자 풍계 방향으로 길을 안내했다. 말들이 성문을 통과할 때, 월연은 말의 귀가 불안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동문 안쪽, 풍계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서 있었다. 그중 몇은 창 대신 풍향기를 들고 있었고, 바위 위에는 오래된 관측석이 놓여 있었다. 조사대가 다가서자, 그들 중 연장자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청해파에서 오셨습니까?”


여안이 말에서 내려 짧게 예를 갖췄다.


“호국에서 백선 상좌님께 전한 소식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각지에서 내노라는 자들을 모아 살펴보았는데… 모르겠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백선님께도 알렸지요.”


호국 병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송림국도 바람이 어지러운 것이오?”


“송림은 이상 없소.”


조뢰가 잘라 말했다.


“바람길이 연결되어 있으니 미리 살피러 온 것이오.”


여안이 설명하자 병사는 손짓으로 주변을 가리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보십시오. 이 안쪽까지 바람이 뒤엉켜 있습니다. 호수 위에 안개가 오래 머물고, 물빛이 꺼지는 듯 가라앉습니다. 바람골 쪽은 더 심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방향이 바뀝니다.”


“서쪽입니까?”


금우의 물음에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서쪽에서 불어옵니다. 문제는...”


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소국입니다. 예전엔 소국 사람들과 이 길로 왕래도 있었지요. 그런데 요즘은… 조용합니다. 너무 조용합니다.”


“왕래가 끊긴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난이 났다는 소문이 돈 뒤로는, 거의.”


병사는 말을 삼켰다.


“풍향이 이쯤에서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 후로 몇 달 지난 무렵입니다.”


여안과 조뢰가 짧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금우는 관측석 옆에 쪼그려 앉아 손을 얹었다. 돌 아래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아주 약했지만, 일정하지 않았다.


월연은 한 발짝 물러나 서쪽의 소국 방향을 바라보았다. 성벽으로 이어진 길, 그 너머의 산맥. 바람은 그 방향에서 불어와, 이곳에서 갈피를 잃고 흩어졌다. 그녀의 손끝이 무의식 중에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뒤엉키는 바람과 빛이 꺼지는 호수 그리고 무엇보다, 길어지는 소국의 침묵이 호국 병사들의 눈빛에 두려움을 검게 칠했다.


“바람골로 안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안의 말에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곧바로 발을 떼지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성문 안쪽이 아니라, 동문 아래로 이어진 좁은 내리막길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전에… 한 곳만 더 봐주십시오.”


그 목소리에는 군인의 단단함보다, 오래 눌러온 피로와 두려움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여안은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십시오.”


병사는 앞장섰고, 조사대는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길은 작은 호수 쪽으로 이어졌다. 동문 밖에서 보이던 반짝임은 가까이 갈수록 이상하게도 빛을 잃었다.


호수는 잔잔했다. 그러나 그 잔잔함이 부자연스러웠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 아까까지도 깃발을 제각기 흔들던 기류가, 이곳에 이르자 뚝 끊긴 듯 사라져 있었다. 물 위에는 잔물결 하나 없었다. 마치 누가 표면을 얇은 유리로 덮어놓은 것처럼.


병사가 호수 가장자리에 멈춰 섰다.


“여기입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다른 호수의 물빛과 달리 연한 회청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저곳만… 저렇게 죽어 있습니다.”


금우가 조용히 다가가 풍향기를 들어 올렸다. 바람을 읽는 깃이 미세하게 떨리다가, 이내 방향을 잃고 허공에서 헛돌았다.


“기류가… 흐르지 않습니다.”


“예.”


병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흐르지 않는 바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곳은 그렇습니다. 바람이 닿지 않습니다. 소리도…”


그가 말을 멈추었다. 월연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호수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공기는 차가웠다. 습기가 아니라, 무언가 오래 식어버린 듯한 냉기였다. 그녀는 무심코 숨을 들이켰다가, 목이 잠기는 느낌에 작게 숨을 삼켰다.


물빛이 꺼진 호수는 깊이를 알 수 없었다. 햇빛도, 하늘도,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그저 빛이 닿다 말고 꺼져버린 듯한 표면.


그 순간 월연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수면이 아주 잠깐 가라앉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게가 아래를 짓누르 듯 어둠이 한 겹 더 깊어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평평해졌다. 바람이 없는데도, 등줄기를 스치는 감각이 있었다. 누군가 뒤에서 숨을 내쉬는 것처럼.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청해파께서 오시기 전에도 저곳을 살폈습니다. 돌을 던져도 소리가 다르지요. 새도 가까이 오지 않습니다.”


그의 손이 떨렸다.


“그리고… 국경 너머에서 돌아오는 이가 없습니다.”


조뢰가 확인하듯 물었다.


“소국 때문이라는 겁니까.”


병사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저희는 군사입니다. 적이 오면 막습니다. 칼이 오면 칼로 맞섭니다.”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지만 저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서 우리에게 바라는 건.”


병사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검게 젖어 있었다.


“확인해 주십시오. 끝이 어디인지. 저 침묵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그리고 거의 매달리듯 덧붙였다.


“호국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국경 너머로 군을 들이밀 수는 없습니다.”


월연은 호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빛이 죽은 물. 바람이 닿지 않는 자리. 설명할 수 없는 낯익음이, 오래된 기억처럼 목을 조였다. 여안은 월연의 굳게 다문 입에 가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길을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국경선까지는 저희가 동행하겠습니다. 그 너머는… 청해파에서 판단하셔야 할 겁니다.”


말에 오르며, 월연은 다시 한번 호수를 돌아보았다. 호수 곳곳에 드리운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모습은 마치 낮인데도 밤에 머무는 것 같았다.



풍계를 떠난 지 이틀이 지나자 협곡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호국의 병사들은 길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 곧 이르게 될 것이라며 서둘러 말머리를 돌려 떠났다.


어느새 해가 붉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 대충 하룻밤 정도는 묵을 수 있어 보이는데?”


조뢰는 산비탈에 버려진 오두막을 들여다보았다.


“네. 협곡이 험하니 쉬어 가는 게 좋겠습니다.”


금우가 말에서 봇짐을 내리며 말했다.


오두막 주변의 나무들은 땅을 덮지 않았다. 협곡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산맥에는 커다란 바위가 비죽비죽 돋았고, 나무뿌리는 바위를 움켜쥐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키가 큰 전나무와 잣나무의 뾰족하고 단단한 잎은 하늘 높이 솟아있었다.


해가 모습을 감추자 산에는 이내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반달이 전나무 가지 위에 걸렸다. 바위협곡을 바라보고 선 월연의 눈에 달빛이 젖어들었다.


오두막 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월연이 뒤를 돌아 여안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안이 천천히 다가와 월연 곁에 섰다.


“… 잠이 들지 않네요.”


월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협곡에 가까워질수록 말수가 줄고,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 더 자주 보이던 그녀였다. 늘 담담하던 그녀가 어쩐지 불안해 보였다.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까, 하다가 여안은 툭,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다 별일 아닙니다.”


하고 던졌다.


그가 하는 말에 월연은 잠시 그와 눈을 마주쳤다. 맑은 눈. 나도 너처럼 감출 것 없이, 눈앞의 시련이 전부인 삶을 살 수 있다면. 너처럼 삿된 마음 없이 협이 될 수 있다면. 월연은 시선을 빗기고 다시 밤하늘을 바라봤다.


그날 밤, 어지럽게 불던 바람은 끝내 잠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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