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하늘을 향한 뒷모습
이른 아침, 호국(湖國)의 풍계, 소국(邵國)과 맞닿은 바위 계곡의 동쪽 꼭대기에서 풍향기를 들여다보던 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바람이 원래 이쪽에서 불었나?”
옆에 있던 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서풍이 이 쪽으로 들어오는 일은 드물지.”
둘은 동시에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아래 소국의 희미한 능선이 보였다.
“하여간, 요즘 소국이 수상해. 난이 일고 나서는 사람들도 밖에 잘 안 나오고.”
“그게 다… 천휘국에 혼쭐이 나서 그렇다는 얘기가 있지 않나.”
“붉은 달이 떴다는 소문이야 들었는데… 그게 천휘랑 무슨 상관이야?”
옆의 남자가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에이, 이 사람아. 천휘국이 왜 그렇게 고고한 줄 아나. 더러운 일은… 따로 움직이지.”
“무엇을 그리 숙덕거리는 것이냐.”
수염을 길게 기른 자가 풍계 관측탑에서 내려오며 물었다.
“아, 그… 풍향기가 조금 이상합니다.”
풍향기 앞으로 걸어간 그는 천천히 시선을 서쪽으로 옮겼다. 푸른 서쪽 하늘 아래에 드리운 소국의 능선은 말없이 바람계곡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새벽비가 촉촉이 적신 밭에서 싱그러운 흙내가 피어올랐다. 백선이 맨발로 옥토를 밟으며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그녀의 하얀 머리칼이 조용히 흔들렸다. 운초밭에 돋아난 새싹들을 살피던 그녀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월연이 심은 운초 씨앗만이 아직도 싹을 틔우지 못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쪼그려 앉아 손바닥을 흙에 대고 기운을 느꼈다.
‘아직 숨이 있다…하지만 응답이 더디구나.’
그때 백선의 등뒤로 경쾌한 발걸음이 다가왔다.
“호국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오랜만이시죠? 고향 소식!”
운해문 제자 하나가 반가운 듯 미소를 띠며 서신을 내밀었다. 백선은 서신의 겉면에서 호국 풍계 관측사의 표식을 발견하고, 미간이 희미하게 좁혀졌다.
‘풍계 관측사…? 왜 이들이 나에게?’
서신을 펼쳐 읽는 동안, 그녀의 손이 서서히 굳어갔다.
잠시 뒤, 백선은 서신을 접어 쥐고 장문인 현해의 거소로 향했다.
“장문인님께서는 지금 장문각에 가 계십니다. 이른 아침부터 회의를 하신다고 하던데요. 장로님 상좌님 모두 그리로 향하셨어요. 백선 상좌님도 빨리 가보시지요.”
백선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장문각에 도착하자, 창호문 밖으로 내실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5봉의 청조해안 동굴에서 희미한 울림이 있다고 합니다.”
“바람도 불지 않고, 안개도 흐리지 않던 날 파문 하나가 오래도록 남아 있었습니다.”
“자연현상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닐지요?”
백선이 문을 열고 들어와 빈자리에 앉았다.
“그렇다기에는…9봉의 기운에서도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 떨림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9봉에서? 수정지장(水晶之帳)이 흔들렸단 말씀입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봉인은 지난 수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요동한 적이 없었는데…”
백선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눈을 감은 채 앉아있는 현해에게 다가갔다.
“장문인님, 호국 풍계에서 서신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나지막이 말하며 서신을 건넸다. 서신을 읽어내리던 현해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현해가 말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백선이 말했다.
“오늘 아침, 호국의 관측사가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바위 계곡의 동쪽 풍계에서 바람결이 꺾이었다고 합니다. 추측키로… 서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원인이고요.”
“그곳은 바람골이 있는 곳 아니오? 9봉으로 흘러드는 바람의 시작에서 그런 일이…”
“조사를 해보아야 하지 않겠소?”
“그렇소. 조사대를 꾸려서 바람골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장로와 상좌들은 어느 제자를 조사대에 포함할 것인 가를 두고 각자 말을 얹었다. 한참 동안 오간 논의 끝에, 조사가 목적이므로 지나치게 호전적인 자는 적합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혹시 모를 위협에 능히 맞설 수 있어야 하며, 기류 관측에 능통한 자를 꼭 포함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모였다.
“지도사 조뢰는 기세가 빠르고, 돌발 상황 대응이 뛰어납니다. 허나… 지나치게 날이 서 있는 감이 있습니다.”
맞은편에 있던 백선이 조용히 덧붙였다.
“여안은 성정이 유화하고, 사태의 흐름을 헤아리는 데 밝은 이입니다. 다만 전투 상황이 길어지면 혼자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요.”
“흠… 그렇다면 두 사람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풍맥과 지형 측정은 금우(金羽), 후위는 석운(石雲)이 맡으면 되겠소.”
그때 장로 중 한 명이 낮게 말했다.
“허나, 기류의 출발점은 바람골의 서쪽. 소국 경계입니다. 호국만 살펴서는, 흐름의 반쪽만 보는 셈이겠지요.”
순간, 장문각 안의 기류가 멈춘 듯 고요해졌다. 상좌 채강의 눈빛에 잠깐 계산이 스쳤다. 그는 흘끗 현해를 보며 말했다.
“… 월연 사절이 있지 않습니까?”
몇몇의 시선이 작게 흔들렸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채강은 말을 이었다.
“소국은 외부인에게 국경을 쉽게 열지 않습니다. 허나… 천휘국 사절이라면 사정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천휘국 사절의 안전을 위해 청해파가 수행 인원을 붙인다… 외견상으로는 그리 보일 것입니다.”
장로와 상좌들의 눈이 현해에게 모였다. 현해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조사대는 지도사 조뢰와 여안, 금우, 석운으로 하고… 월연 사절에게 동행을 부탁하도록 한다.”
“… 조정에 알릴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선 조사대가 파악해 오는 바를 보고 결정하는 게 좋겠지요.”
채강이 하는 대답에 현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무장을 둘러싼 회랑 위로 햇빛이 낮게 번졌다. 여안은 봉을 어깨에 걸친 채 연무장을 가로질러 지나고 있었다. 회랑 저편에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월연은 말없이 채강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채강은 얇은 미소를 띠었으나, 눈빛에는 조용히 조여오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월연의 턱이 살짝 굳은 것이 보였고, 채강의 미소는 깊어졌다. 월연이 입을 열고 짧게 대답 하자, 채강은 마치 예상하던 답을 확인했다는 듯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채강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월연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운해문 안에서 더 캐낼 수 있는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판단이, 이미 그녀 안에서 굳어 있었다. 이제 남은 길은 9봉으로 흐르는 기류의 발원을 직접 살피는 것이었다. 다만 그 끝이 소국으로 이어진다는 점만은, 그녀를 잠시 그 자리에 붙들어 두었다.
여안은 회랑의 처마 끝에 달린 노을빛이 월연의 어깨에 한참 동안 떨어지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어? 이 녀석 어디 갔지?”
아침부터 먹은 음식을 다 토하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새끼 고양이가 보이지 않았다. 자그마한 몸을 달달 떠는 녀석에게 안 먹겠다는 탕약을 억지로 먹이고, 정성스레 덮개를 덮어주고 나왔는데, 방 안에는 고양이 이부자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여안은 침대 밑을 들춰보고, 서랍 귀퉁이를 들여다보았다. 방안을 다시 한번 휙 둘러본 그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숙사 복도 끝을 보니 고양이가 지나가며 건드린 듯 향로의 재가 흩어져 있었다. 여안은 발자국을 따라갔다.
찌르르르-찌르르-
바람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들꽃 사이를 미끄러졌다. 발자국은 4봉 유화곡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끊어졌지만 여안은 별빛이 잠잠한 수풀을 헤치며 깊이 들어갔다.
“9월아- 9월아-”
그는 고양이를 어르고 달래듯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그때, 멀리서 바람에 실려오는 음률이 귓가를 스쳤다. 혼자 있기를 바라는 것 같으면서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스며있는 소리였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소리를 따라갔다.
설산고원의 바람이 메아리치는 듯하면서도, 드넓은 평야를 흐르는 한 줄기 물길 같은 음색이었다.
유화곡의 능선이 끝나는 절벽,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선 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자 남짓한 나무 피리를 받쳐든 어깨가 곡조에 따라 사르르 떨렸고, 피리 끝에 나비처럼 앉은 가느다란 손가락이 살며시 움직였다. 높고 낮은 숨결이 조금씩 뒤틀려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듯하였다.
언덕을 하얗게 뒤덮은 들꽃은 새까만 하늘에 뿌려진 은하수를 그대로 반사하듯 옅은 빛으로 반짝였다. 긴 옷자락이 바람에 날려 풍성하게 부풀었다 가만히 내려앉았다. 옷자락 아래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은색 털을 은은하게 빛내며 9월이 연주를 가만히 감상하고 있었다.
‘허, 녀석이… 참 나.’
여안은 새초롬히 앉아서 피리 소리를 듣고 있는 9월을 보자 한숨이 나오며 어깨가 누그러지면서도, 왠지 모르게 얄미워 피식 웃음이 났다. 그는 연주하는 월연과 그 곁에 앉은 9월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월연의 피리 소리가 그치자 9월이 움직이려 했다.
“9월아!”
여안이 냉큼 달려가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월연은 그의 기척을 진작에 알아챈 듯 차분하게 말했다.
“삼봉 마을에서 데려온 아이죠?”
“네. 녀석이 갑자기 골골대길래 걱정했더니, 여기서 이렇게 시치미 떼고 있을 줄이야 원.”
“이름이 9월?”
고양이 이름을 묻자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떨구었다. 괜스레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아… 그게… 한 아홉 달쯤 자란 것 같아서요.”
말끝이 흐려졌다. 설명을 덧붙이려는 듯 입술이 움직이다 멈췄다. 무언가 덜컥 들킨 사람처럼 작은 머뭇거림이 스쳤다. 그의 볼에 살짝 오른 붉은기는 검푸른 밤하늘이 조용히 덮어주었다. 그가 문득 딴 이야기를 꺼내듯 가볍게 물었다.
“서쪽의 끝에 있죠? 천휘국은. 소국, 현국, 악국이 천휘국을 감싸고 있고…. 언젠가 천하지도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월연의 속눈썹에 고요한 별빛이 묻어났다. 여안이 말을 이었다.
“동쪽 끝에 송림, 서쪽 끝에 천휘. 그 사이에 작은 나라 여섯이 물결처럼 맞물린 모양이었지요... 소국에 가 본 적이 있나요?”
월연의 숨결이 미세하게 떨렸다.
“…네. 있습니다.”
그녀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여기서 호국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아마 말을 타고 한 보름쯤 가야 할 겁니다.”
월연은 돌연 몸을 돌려 운해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안은 그녀를 따라 걸었다. 반 보 가까이 가면 한 보 멀어지는 듯한 그녀의 걸음에 맞추어 그렇게 천천히 운해문으로 돌아갔다.
청해록(靑海錄)
운해문편(雲海門篇) 기묘년(己卯年)
9봉 수정지장에 미세한 떨림이 감지되었다. 호국 풍계의 바위계곡에서도 바람의 방향이 꺾이었다 한다. 바람골에 조사대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조사대는 조뢰, 여안, 금우, 석운 그리고 천휘국 사절 월연이다. 조사대는 바람골의 서쪽, 소국까지 간다.
#무협 #장르문학 #연재소설 #서정적소설 #세계관소설 #관계서사 #감성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