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운향당의 푸른 안개

운초(雲草), 운명을 함께하는 풀

by 묘월



인간의 세상이 늘 그러하듯.


하늘을 덮는 거대한 파도와 난폭한 비바람이 거선(巨船)을 삼켜버릴지라도, 풍랑이 지나간 뒤의 바다는 서러울 만큼 평온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지켜 세월은, 저 무심히 흘러갈 뿐이었다.





바다 내음을 품은 약초가 따뜻한 햇볕에 서서히 말라가며 운향당(雲香堂) 마당 가득 약향이 번지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바닷소리가 잔잔히 깔리는 새벽, 푸른 도복을 단정히 여며 입은 청해파 제자들이 비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었다.


운향당 북편의 정식간(靜息間)에서 새벽 명상을 마친 백선(白善)이 조용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마당을 지나 남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춘분이 지나고 한층 더 따뜻해진 봄 햇살이, 청명(淸明)을 맞아 이제 운초(雲草)의 씨앗을 뿌리기에 적당한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운향당 남쪽의 약초 재배 밭에 다다른 백선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운초의 씨가 뿌려질 흙을 만져보았다. 촉촉하고 기름진 흙내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녀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운향당 수업 질색하더니?”


여안이 따라나서는 조뢰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언제?”


조뢰가 턱을 들며 말했다.


“싫어한 게 아니라… 무공에 더 정진했던 거지.”


여안이 눈썹을 살짝 올리고 장난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운초도 네가 키우면 뿌리부터 기합 넣겠지. ‘하앗!’ 이러면서 말야. 하하.”


조뢰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운향당 내당에는 3대 제자들과 월연이 앉아 있었다. 2대 제자 중에는 유난히 약초 재배를 좋아하는 여안과 지난해 시험에 낙방해 억지로 참석한 몇 사람 그리고 웬일인지 기어코 따라나선 조뢰가 있었다.


백선은 운향당의 내당에 정연하게 앉은 제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기(氣)를 다스리는 것이 무도의 본(本)입니다.”


백선의 목소리는 잔잔한 물결처럼 내당에 퍼졌다.


“다스리되, 내면의 심기(心氣)를 자연히 흐르게 하며, 흐르게 하되, 그 기세(氣勢)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바람이 약초 냄새를 밀어 넣으며 제자들의 숨결과 섞였다. 월연은 햇빛에 반사되어 윤이 나는 백선의 하얀 머리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백선은 이른 나이에 머리가 하얗게 새었는데, 백발은 오히려 그녀의 자애로운 풍채에 기품을 더해주었다. 호국(湖國) 출신으로 운해문에 온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녀는 운향당에 남아 약초와 기 수련법을 계속 연구하고 있었다.


한 시진의 설법 후 백선은 제자들을 데리고 운향당 남쪽으로 향했다.


다들 백선을 따라나서는데 조뢰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여안이 다가가 조용히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야, 풀 심으로 간다.”


조뢰가 눈을 반쯤 뜨고 중얼거렸다.


“풀은 그냥 자라는 거 아닌가…?”


여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잡초 얘기지, 조뢰.”


주변에서 큭 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조뢰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향당 남쪽 밭에서는 바닷바람이 새싹을 기다리고 있었다. 밭으로 나가는 문과 이어진 담벼락 아래에는 작은 옹기들이 줄지어 놓여 있고, 옹기 안에는 갓 손질한 흙이 채워져 있었다.


그 옆에 세워진 작은 탁자 위에는 투명한 수정병이 놓여 있었다. 병 속에는 하얗게 빛나는 운초(雲草)의 씨앗들이 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구름을 한 조각 담아둔 것 같았다.


“운초는 땅에서 자라지만, 흙보다는 마음의 기운, 심기(心氣)를 먹습니다.”


백선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손끝이 흔들리면 줄기가 꺾이고, 마음이 조급하면 잎이 타버리지요. 그러니, 흙보다 먼저 기운을 다스려야 합니다.”


제자들은 옹기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백선은 수정병에 담긴 운초 씨앗을 하나씩 옹기에 올려주었다.


“자 이제, 옹기를 밭에 묻고, 물을 주시오.”


백선은 월연을 바라보며 옹기는 밭에 묻히면 서서히 숨을 거두듯 흙으로 스며든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것은 단순한 파종이 아니라, ‘자신의 기운을 흙과 합치는 의식’이라고도 했다.


파종을 마친 후 백선이 말했다.


“각자 자신의 운초 씨앗에 기를 불어넣으시오.”


월연의 표정에 당황하는 기색이 어렴풋이 스쳤다.


‘무슨 기를 넣으라는 거지…?’


자신의 옹기에 담긴 구름 모양의 씨앗을 바라보며 월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월연이 연마한 기는 대부분 살(殺)이나 극(克)에 관계된 것이었다. 그 외에는 내상을 입었을 때 잔여의 기를 거꾸로 돌려 응급 치유하는 회기(回氣)나, 공격적 기운을 일시적으로 가라앉히는 잠류기(潛流氣) 정도.


월연은 백선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고 있음을 눈치챘다.


“운초에 불어넣는 기는 정해진 법이나 식이 없습니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기를 내보내면 됩니다.”


백선이 월연의 곤란함을 알아차렸는지 제자들을 향해 큰 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마음이 가는 대로…?’


월연은 그 설명이 되려 더 수수께끼 같았다.


백선의 시선이 오래 머무를까 걱정된 그녀는 옹기에 손끝을 대고 천천히 기를 흘려보냈다. 그 순간, 씨앗 위의 공기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월연은 모르는 척했지만, 옹기 가장자리에 아주 작은 실금 하나가 번졌다.


실금이 간 부분을 가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다들 편안한 표정으로 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평온하게 내려앉은 봄 햇살을 보자, 월연은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태산같은 어깨에 올라 무등을 타고, 무릎에 앉아 수염을 잡아당기며 놀던 때.


천휘국에 으뜸가는 절세가인이라던 어머니를 일곱 살에 여의고, 그녀가 막 꽃 내음을 풍기기 시작할 열다섯 무렵, 아버지…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월연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아 깜짝이야.’


여안이 그녀를 가까이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놀란 마음을 감추고 말했다.


“뭐… 뭣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 운초에 기를 그렇게 대충 넣고 딴청을 부리시길래. 하하.”


“딴청은 무슨!”


“풀 주제에 뭔 마음이니 기(氣)니 싶?”


여안이 말했다.


“그래도 아껴주세요. 키우는 자와 운명을 같이 하는 녀석이니.”


말투는 가벼웠지만 시선은 묘하게 진지했다. 그는 말을 마친 뒤 싱긋 웃어 보이고는 아직 기를 불어넣지 못한 3대 제자들 쪽을 향해 총총히 멀어졌다.





그날 저녁, 약을 달이는 증기와 운무가 뒤섞여 푸른 안개가 운향당 내당 밖으로 자욱이 번져 나왔다.


백선이 늦게까지 남아 푸른 연꽃으로 기의 흐름을 맑게 하는 탕약을 연구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바람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바람이 많이 부는 군.’


하루 종일 맑은 하늘이었는데 예상치 않게 밤바람이 세차게 불자, 그녀는 운초를 파종한 밭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씨앗들은 제자리에 잘 있는데…’


백선은 씨앗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옹기에 담겨 흙에 파묻힌 씨앗들은 별 탈 없이 잘 있었으나, 그녀는 어쩐지 불안정한 파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씨앗 위에 다시 한번 흙을 모두어 덮어주고 나서도 백선은 바람이 발목을 붙잡는 듯한 기분에 한참을 머물다 운향당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떠나는 모습 뒤로, 사나운 바람에 담벼락의 기와가 흔들렸다.


월연이 묻은 옹기에는 그 순간, 쩍-하고 뚜렷하게 금이 갔다. 금이 간 옹기 위로 바람이 한참 머물다 천천히 사라졌다.






청해록(靑海錄)
운해문편(雲海門篇) 기묘년(己卯年)


청명. 운향당 남녘밭에 운초를 파종했다.
자시 무렵 바다 끝에서 희미한 번개가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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