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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타인의 욕망을 빌어먹고 살았다

내 것이 아닌 삶

by 경주정착러 앵

Part 1

타인의 욕망을 빌어먹고 살았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팔할이 응당 꿈꾸듯, 서울살이는 내게 오랜 소망이었다.

논리적인 이유는 없었다. 논리적인 생각을 거쳐 갖게 된 소망이 아니었으므로.


사람은 나면 서울로,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태어나서 15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서울에 가본 적 없는 나는 어른들의 말이나 티비를 통해 서울을 접해볼 뿐이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서울이란 모든 것이 번쩍 번쩍하고 기회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영감이 냇물처럼 흐르고 성공의 기운이 바람처럼 감도는 곳. 당연히 나는 스물이 되면 그곳에 있으리라 믿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서울이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댔으니. 그곳에 가면 날개를 단 듯이 세상을 누비고 미래를 손아귀에 단단히 쥐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은, 십 대의 어린 내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유토피아였다.






1540141510097.jpg 휴학하고 떠난, 스물 세 살 프라하 여행. 그땐 내가 다 늙은줄 알았다


낭만 :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나는 다분히 낭만적인 기질을 타고 났다. 햇살 한 줌, 구름 한 점, 풀 한 포기 허투루 흘려보내지를 못하고 발목이 잡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과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느 어머니의 뒷모습만 봐도 괜시리 코 끝이 뭉근해지니 말 다했다. 일렁이는 바다 위로 잘게 부서지는 햇살을 볼 때면, 나는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야 만다. 가슴에 사무치는 그 얼굴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래서 나는 세상을 돌며 아름다운 것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다시 이쪽 세계에 전달하는 사람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게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을 해야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할 때가 가장 기뻤다. 이를테면 감명받은 영화나 음악에 대한 감상을 구구절절 학급 신문에 싣는 일. 잡지에서 본 멋진 사진을 오리고 붙여 다이어리를 꾸미는 일. 이미 죽고 없는 예술가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일.


그러나 열여덟 늦가을, 말하자면 '예비 고3'이 되던 그 계절, 나의 낭만은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낭만이라는 것에 실금이 가기 시작하긴 했다. 학교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 너무 많았고, 모든 것이 점수로 판가름 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시간을 쪼개고 마음을 단도리해 낭만을 끌어 안았다. 그런데 '예비고3'이 되자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됐다. 야자 시간에 책을 읽으면 혼나기 일쑤였고 오로지 '인서울'을 향해 달려야 하는 무언가가 되어있었다. 사람이 아닌 무언가. 3등급짜리의, 아직 무엇으로도 인정받지 못한 무언가.


그렇게 말랑하고 알록달록했던 내 생활은 회색빛으로 건조하고 딱딱해져 갔다. 그래도 서울에만 가면, 그 좋다는 서울에 가기만 하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 하고 싶은 것들 그때 가서 실컷 할 수 있다고. 그래도 좋다고. 그 말을 의심할 새도 겨를도 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나는 꿈에 그리던 '인서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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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첫 자취방과 나


욕망 :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


서울로 입성할 당시, 나는 묘한 두려움과 설렘에 압도 되어있었다. 이제 서울이 내게 답을 알려줄 차례였다. 그럴 거라고 믿었다. 내가 누군지 말해줄 것이다. 꿈꾸던 삶으로 나를 데려가줄 것이다.


예상했겠지만 5년 간의 서울살이를 총평하자면, 그 기대는 박살이 났다. 서울은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자취를 시작한 반지하 방에서는 매일 같이 소음에 시달렸다. 창문을 열면 보이는 자동차 바퀴와 침 뱉는 행인의 다리가 신물나게 싫었다. 언제쯤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얼마를 벌어야하는 걸까. 그만큼 벌 능력이 내게 있을까. 얼마나 더 노력해야 그런 것들을 가질 수 있나.


동기 누구의 취업 소식이 들려오면 나는 점점 쪼그라들었다. 이번엔 취업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만 같았다. 이게 다 돈이 없어서 그런거지. 돈만 있으면, 안정된 직장만 있으면 어린 시절 내가 가진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 몰랐다. 가만. 근데 내 꿈이 뭐였더라. 아무튼간에 괜찮은 직장만 들어가면 돈 안되는 그런 꿈쯤이야 얼마든지 이룰 수 있겠지.


그 시절 나는 아무 것에도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매일을 숙제하듯 살아냈다. 파스타집에서 매일같이 접시를 닦고 새벽같이 영어학원에 갔다. 밤에는 자소서를 쓰고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아침에 눈 뜨면 다시 지하철에 몸을 싣고, 접시를 닦고, 자소서를 쓰고····.


그 시절 내 꿈은 방 한 칸 넓히는 일이었다. 그렇게 타인의 욕망을 빌어먹고 살았다. 남들이 말하고 이루는 것들만 가지면 내가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꿈이라는 게 가당키나 한지. 그런 가슴 뛰는 단어가 내게 어울리기나한지.




평소와 같이 아침 일찍 책상 앞에 앉은 스물 여섯의 어느날.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내 머리를 때렸다.


더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러다 말라죽을 것만 같아. 어디론가 나를 동댕이 치고 싶었다. 내가 한때 사랑했던 초록과 푸르름 가득한 곳에 파묻히고 싶었다. 내가 한때 꿈꿨던 그 삶을 바로 지금 살아보고 싶었다.


어디든 가자. 딱 한 달만. 한 달이다. 이렇게 말라죽으나 길 잃어 죽으나 매한가지다. 그래도 이왕이면 내가 있고 싶은 곳에서 죽는 게 낫지.


그 길로 컴퓨터를 켰다.

어디든 좋다. 내게 오기만 오라. 온몸으로 파묻힐 자신이 있으니····.


IMG_4406.JPG 경주 한달살이를 결심하고 기록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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