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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포 : 당신은 정말로 '지금 여기'를 살고 있나요

기본기 탄탄한, 단순한 하루를 살기

by 경주정착러 앵

당신은 정말로 '지금 여기'를 살고 있라ㅓㅎ

당신은 정말로 '지금 여기'를 살고 있나요


훌쩍 떠나기로 마음 먹었으니 이제는 행선지를 정할 차례였다.

내게 중요한 것은 단 두 가지. 첫째, 초록이 가득할 것. 둘째, 숙식이 해결될 것.

첫째는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 초록이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었던 까닭이다.


통영, 하동, 고성, 담양, 순천, 함양, 목포···. 떠나려고 마음 먹으니 여기저기 안 좋아 보이는 곳이 없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도시를 빼면 다 좋아보였다. 그중에서도 인구 밀도 낮고, 그 빈틈을 초록이 채우고 있는 곳들에 마음이 동했다.


하지만 나는 거지였다. 다 털어도 몇 십 만원이 안됐다. 집이 아닌 곳에 한 달을 머문다는 건 엄청난 비용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사 방법은 다 있다. 몇 번의 검색을 통해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한달살이(행정안전부 청년마을 사업)를 찾아냈다. 오히려 좋았다. 숙식도 해결되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동료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그중에서 기간도 가장 길고, 당장 몇 주 안에 떠날 수 있는 경주 감포를 택했다. 신이 나서 자기소개서를 썼다. 간절하고 진심이니 그렇게 안 써지던 자기소개서도 일필휘지 거침이 없었다.


온라인 면접을 마치고. 기분이 무척 좋았던 것 같다.


그 시절 내게 삶이란 세모난 바퀴가 달린 자동차였다. 굴러가는 것이 제 역할이거늘.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는 바라지도 않으니 여기서 딱 한 발자국만 나아가보자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한달살이 만큼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물론 이건 내 입장이고 부모님 입장은 다를 것이다. 중요한 때에 뜬금없는 도시로 한달을 살러 가겠다니.) 십년지기 친구도 꼬셔서 함께 가기로 했다. 떠나는 날에는 부모님의 머리 맡에 편지 한 통을 두었다. 나는 지금 헤매고 있다고. 그러나 이 여행에서 반드시 답을 찾아오겠노라고.


(아주 나중에, 내가 경주에 눌러앉겠다는 선언을 하고 나서야 부모님이 그 편지를 발견한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침대 밑으로 편지가 떨어지는 바람에 읽히지 못하고 먼지만 쌓여있었다. 부모님은 영문도 모른 채 속만 까맣게 태웠던 것이다.)


십년지기 친구와 나. 감포 바다에서 신이 났다




감포의 바다는 하늘보다 하늘빛이었다. 나는 고놈이 맹랑하고 사랑스러웠다. 날 언제 봤다고 제 속을 훤히 다 보여주냔 말이다.


바다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밤으로는 쏟아지는 별빛과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려줬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치킨 집도 딱 두 군 데. 짜장면집도 두 군 데. 영화관도 없고 대형마트도 없고 올리브영도 없고 헬스장도 없었다. 지하철도 없고 복잡한 빌딩도 없고 그토록 두렵던 미래도 없었다.



오직 지금 여기에 나만 있었다. 깜깜해서 별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바다에 누워있으면 내 존재가 느껴졌다. 이 거대한 우주에 먼지같은 내가 번듯이 살아있구나···. 그러다가 나는 엉엉 울어버렸다. 갑자기 가슴께가 뭉근하다가 묵직하다가 마침내 뜨거워지면서 울음이 나왔다. 아무것에 웃지도 울지도 않던 내가, 깨진 항아리의 밑동을 놓아버리듯 콸콸콸 소리내 울었다. 바다는 그저 철썩철썩 소리를 내며 '나 여기 있어'할 뿐이었다.


친구가 되어준 나의 바다


우리는 5주동안 하나의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했다. 모두들 그것만 생각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감포의 여름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뜨거웠고, 땡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안으로 밖으로 주어진 일들을 해냈다. 그러다보면 늘 정해진 시간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에어컨도 안 되는 주방에서 12인분의 밥을 매끼 해먹었다.


땀 흘리며 일하면 배꼽시계가 울었고 그 소리에 맞춰 분주히 밥을 지어먹었다. 그리고 잠깐 돌아서 일 좀 하다보면 다시 또 밥때가 찾아왔다. 일하고, 먹고, 일하고, 먹고···. 밤이면 매일 같이 밤바다와 공용숙소에 모여 술을 마시고 오직 오늘과 내일에 대해서만 떠들었다. 오늘이 어쨌고 내일은 저쩌고···. 매일 상념에 젖을 새도 없이 까무룩 잠에 들었다. 쉬는 날엔 수영도 가고, 바베큐도 해먹고, 밤낚시도 나갔다.



그러니까 이건,


자취방에서 유튜브를 보며 허접한 끼니를 때우고, 언젠가 건물주가 되리라 다짐하며 파스타집에서 접시를 닦고, 잠 들기 전 신세와 미래를 비관하는 그런 생활과는 차원이 다른 거였다.



기본에 충실한, 아주 단순한 날들이었다. 최선을 다해 일하고, 최선을 다해 먹었다. 최선을 다해 자고 최선을 다해 웃었다. 여전히 가난했지만 이번엔 불행하진 않았다. 나는 오직 지금 여기에만 있었다. 그때 나는 삶의 기본 공식을 온몸으로 배운 것 같다. '잘 먹고, 잘 자고, 지금을 사는 것.' 그러면 못할 일이 없다. 다 살아진다. 잘 살아진다.



나는 그 공식을 두고두고 요긴하게 써먹는다. 여전히 삶은 어렵고 자주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그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다. 인생이 복잡하게 느껴질 때면 그 시절 그 바다를 생각한다.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일하자. 지금을 살자. 그렇게 내 자신을 달랜다. 나는 어디에도 있지 않고 오직 지금에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된다.



감포 이전의 나는 인생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수시로 삶의 매듭을 바싹 당겨맸다. 시장에서 무른 과일을 골라내고 가장 예쁜, 상처 하나 없는 사과를 고르듯 삶을 대했다. 그러나 인생은 매듭을 짓는 게 아니라 나름의 무늬로 뜨개질 하는 일에 가까웠다. 무른 과일이 나오면 잼을 만들어 먹고 상처난 부위를 도려내서 먹기도하고 그런 거였다. 그냥. 그런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 정말로 지금 여기에 있는가? 아쉬운 어제와 오지 않은 내일에 살고 있진 않은가.


우리,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일하자. 그리고 자주 웃자. 그 여름 그 바다에서 나는 삶의 기본을 다시 배웠다. 기본기가 탄탄하면 응용도 잘 할 수 있다. 삶이 내주는 복잡한 문제도 차근히 풀어낼 수 있다.



나는 우리가 어디에도 있지 않고

오직

지금

여기에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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