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 여가시간, 생산성
모처럼 유럽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유럽 생활을 해보니 유럽인과 한국인의 생활 리듬이 적지 않은 차이를 느꼈습니다. 우선 카페가 열리는 시간이 우리와는 다릅니다. 베를린에서 Steglitz 지역에 머물렀는데 동네에 카페가 몇 개 없지만, 아침 6시만 되면 여는 카페가 두 군데가 있습니다. 빵집과 동네 슈퍼마켓은 7시면 엽니다. 물론 동네 카페 중에는 수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정오에서 오후 6시까지만 여는 카페도 있습니다. 또한, 자전거를 타는 시민, 바깥 활동을 자주 하는 학생들, 동네 놀이터에서 노는 어린이, 그리고 유모차를 탄 아가들의 모습을 종종 접합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동네마다 지역을 근거로 활동하는 상인들의 활기찬 시장이 열립니다. 공연장이나 박물관에 가면 다양한 연령층을 만날 수 있습니다. 클래식 공연장에서는 주로 옷을 잘 입은 노인이 많다면 박물관에서는 젊은 층을 흔히 접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느낌은 베를린 사람의 표정이 우리나라 사람보다는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삶의 여유는 어디에서 나올까요?
아마도 짧은 근로시간과 높은 생산성이 상당 부분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연간 근로시간 관련 국가 간 비교 가능한 최근 연도는 2017년입니다. 2017년 기준 독일인과 덴마크인의 평균 근로시간은 각각 1354시간, 1,400시간입니다. 미국과 일본의 근로시간은 각각 1,758시간과 1,738시간으로 두 나라의 근로시간은 비슷합니다. 반면 한국과 중국의 근로시간은 각각 2,063시간과 2,174시간으로 모두 2,000시간 이상을 일합니다. 한국인은 독일인보다 1년에 평균 700시간 이상 일합니다. 그러니 독일의 카페 주인은 시간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한국의 상황은 무척 다릅니다. 같은 자영업자이지만 양국의 카페 주인은 일하는 태도도 다르고 그 결과 행복 수준 역시 차이가 납니다.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의 근로자는 과거 1인당 국민소득이 2천 달러 시절에는 연간 3,000시간 이상도 일 했습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오늘날 2,000 시간의 노동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도달 시점까지 미국, 일본, 덴마크, 독일의 근로자는 1년에 2,000 시간 정도 일했습니다. 2만 달러 이후 독일과 덴마크의 근로자의 노동시간은 급격히 줄었지만 미국과 일본에서는 노동시간이 완만하게 줄었습니다. 2만 달러 이후 한국의 노동시간 단축 추세는 미국, 일본보다는 독일, 덴마크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편, 노동생산성 관점에서 본다면 덴마크, 미국, 독일은 현재 거의 비슷한 수준을 나타냅니다. 2000년대 이전까지는 미국의 노동생산성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았으나 최근에는 세계 최정상에서는 다소 멀어지고 있습니다. 소득은 노동생산성과 노동시간의 곱입니다. 노동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한국은 낮은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장시간 노동 덕분에 소득 수준을 향상할 수 있습니다. ([그림 2] 참조)
노동시간 단축은 자신의 삶에서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리고 시간 선택은 행복한 삶을 위한 중요한 조건입니다. 2023년 세계행복지수를 살펴보면 한국의 순위는 137개 국가 중 57위입니다. 행복지수를 구성하는 6개 분야별 순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3위,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는 77위, 기대수명은 3위, 인생 선택의 자유(freedom to make life choice)는 106위, 관용(generosity) 53위, 부패인식(perception of corruption)은 47위입니다. 한국의 행복지수 중 가장 순위가 낮은 분야는 인생 선택의 자유입니다. 인생 선택의 자유는 “Are you satisfied or dissatisfied with your freedom to choose what you do with your life?”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측정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점수가 낮다는 것은 자신이 하는 일이 본인의 선택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즉, 한국인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로 받아들이며 근로시간 역시 어쩔 수 없이 장시간 근무를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고되고 만족도는 낮습니다.
그렇다면 노동시간의 단축을 법, 제도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한국인의 상당수는 아직도 노동시간 단축보다는 장시간 근무에 따르는 경제적 보상을 선호합니다. 한국인은 삶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여가 선택보다는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합니다. 취약한 사회보장, 비싼 주거비와 교육비를 마련하려면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개인의 상황을 무시하고 획일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강제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서는 개인 및 업종별 차이를 인정하는 유연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케인스는 1929년 대공황을 겪으면서도 다가올 인류의 미래는 결코 비관적이지 않을 것이라 지적했습니다. 그는 1930년 「손주를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이 글에서 케인스는 100년 후 경제가 어떤 모습일지 그려보았습니다. 케인스가 글을 발표할 당시만 해도 국민소득 추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향후 100년 동안 대략 2%의 경제성장을 예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견은 대체로 맞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제가 100년 동안 연평균 2% 성장하면 국민소득은 7.24배가량 증가합니다. 케인스는 소득이 증가한다면 사람들은 노동시간을 대폭 줄이고 여가 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1930년도 영국의 1인당 소득은 대략 5~6,000 달러 수준이었습니다. 당시의 영국인은 과거에 비하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웠습니다. 그러므로 케인스는 1인당 소득이 몇 만 달러의 시대가 온다면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보다는 내면적 풍요를 추구하는 삶을 선택하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케인스는 100년 후인 2030년이 되면 근로자는 하루에 3시간씩 주 5일 근무해서 주당 15시간 일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오늘날 선진국의 근로자는 1930년대보다는 훨씬 적게 일하지만 케인스의 예상치보다는 두 배 이상을 일합니다. 케인스는 사람들은 의식주의 기본만 충족된다면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평온한 삶을 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은 두 가지 측면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한편으로 기본 욕구 충족의 범위가 케인스 시대와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선진국의 국민은 비가 새지 않고 상하수도를 갖춘 집에서 매 끼니 빵과 수프를 먹으면서 자녀들 공교육 기관에 보내고 아프면 병원에 갈 정도 수준에 살고 있으면서 "이 정도면 됐구나"라고 만족하지 않습니다. 케인스 당시 생각했던 기본 욕구와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본 욕구는 시대가 변하면서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케인스가 생각하는 여가는 오늘의 관점에서는 매우 이색적입니다. 숲에서 산책하고 하늘에 있는 구름과 별 보면서 자연과 교감하고 예술 활동에 참여하면서 여가를 잘 보냈다고 할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더욱이 이런 여가 활동은 비용도 별로 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인은 여가 생활에 상당한 비용을 씁니다. 맛집 탐방, 해외여행, 좋은 술, 공연 감상, 스포츠, 게임 등 여가 활동에는 적지 않은 경비가 수반됩니다. 자칫하다가는 여가 활동을 위해 노동시간을 늘려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는 시간 선택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이제는 원점에서 시간 선택을 다시 생각해 볼 때가 왔습니다. 각자 자신의 삶에서 최적의 노동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보세요.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더 많은 소득인지 아니면 더 많은 자기만의 시간인지 잘 판단해 보세요. 그리고 나의 자유 시간을 과연 상업화된 영역에서 보낼지 아니면 보다 자연친화적으로 지낼지 이번 기회에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알찬 여름휴가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