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새하얀 스케치북에 크레파스와 색연필을 이용해 다양한 색깔로 채우는 걸 좋아했다. 무엇을 그렸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항상 손 끝이 알록달록한 색깔로 지저분했다. 하지만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아무 색깔이 없다. 만약 내가 '윌리를 찾아라'에서 윌리가 된다면 아무도 날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보통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해 이런저런 질문을 한다. 그중 흔한 질문 중 하나는 취미나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는 것이다. 난 이런 질문을 들으면 당황한다. 왜냐하면 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평범했다. 부모님이 하라는 말을 따르며 자랐다. 초등학생 때 공부를 하지 않고 열심히 놀다가, 부모님은 초등학교 6학년이 끝난 나에게 이제는 공부할 때라고 이야기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는 따로 묻지 않았고, 부족하지만 열심히 공부했다. 중학생 친구들이 피파온라인을 열심히 할 때 같이 피시방에 따라가서 게임을 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 여자 아이돌 이야기하는 걸 듣고 음악중심, 뮤직뱅크를 보기 시작했다. 이렇듯 나는 다른 누군가를 따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난 청소년기 때 사춘기를 겪지 않았다. 누나는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고, 부모님과 항상 충돌했다. 주된 이유는 상대방의 의견에 의문을 가졌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종종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면 참지 않고 싸운다. 하지만 난 부모님이 하는 말씀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 항상 알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 충돌하지 않았고, 난 불만이나 불편한 게 없었다.
난 이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님뿐만 아니라 주변 친구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도 똑같이 행동했다. 난 언제나 상대방이 옳다고 수긍했고, 가식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맞장구쳤다. 나에게 너무 큰 비극이었던 건 스스로 이런 내 모습이 진리이고, 항상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런 내 모습을 본 주변 사람은 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날 착하고 선한 친구로 생각해줬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내 모습은 단단하게 굳어갔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감사하고 남은 인생 동안 쭉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같은 학번이지만 나보다 한 살 많은 동기 형이다. 형은 같은 수업을 듣는 동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서로 같은 수업을 듣고 있었고, 그 당시 어려운 과제가 있었다. 같이 과제를 하면서 빠르게 친해졌고, 함께 공부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공부뿐만 아니라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형은 항상 타당한 논리로 자기주장을 이야기했다. 형은 항상 옳다고 이야기하는 내 모습을 알아챘다. 그러고 나서 형은 내게 아래와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아래와 같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항상 맞다고 맞장구 쳐주는 너의 모습은 많은 사람이 보았을 때 호감이라고 생각할 거다. 하지만 그런 너의 모습은 상대방이 더 가까이 갈 수 없게 선을 긋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난 너와 친해졌다고 생각해 다가가려는데, 그런 너의 모습은 나와 다르다는 걸 간접적으로 말하는 거 같다. 넌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이야기해주면 답답하지 않고 좋을 것 같다"
충격이었다. 돌이켜보면 중학생 때 필리핀에 가고 난 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형 덕분에 깨달음을 얻었고, 난 조금씩 바뀔 수 있었다. 지금도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난 바뀌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항상 형한테 의지할 수 없다. 형을 통해 나의 부족함을 깨달았으니, 이젠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될 차례이다.
일과 병행할 수 있는 새롭게 찾은 방법은 바로 마음속에 있는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것이다. 항상 마음 한구석에 숨어있는 이 녀석을 드디어 끄집어냈다. 예전엔 전공 공부를 해야 해서, 일과 병행하며 취업준비를 해야 해서 등 변명하며 미뤄왔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할 수 있는 변명이 없기에 나른한 주말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27살,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시작하는데 늦은 나이는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글을 통해 내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내 생각을 표현하는 연습을 할 것이다. 내가 쓴 글이 크레파스가 되어 새하얀 스케치북과 같은 날 다양한 색깔로 채워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