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난이도 극상이었던 내 어린 시절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 너무 말썽을 피워서 수갑을 채우고 싶었다고 이야기해줬다. 다행히도 경찰이나 특수한 목적이 아니면 수갑을 구매할 수 없어서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린 나를 데리고 밖에 나가는 것은 항상 힘들었다고 다 큰 나에게 푸념을 종종 하신다. 기억이 안 나니 그저 멋쩍게 웃고 넘긴다.
나의 기행을 들어보면 정말 수갑이든 뭐든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참은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신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어릴 때 어땠는지 잘 모르겠으나, 나의 어린 시절을 대표하는 2가지 사건이 존재한다. 물론 이보다 더 많지만, 이것만으로도 나의 어린 시절은 쉽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빵집 및 마트 테러
빵집에는 다양한 빵이 이쁘게 진열되어 있다. 비닐로 포장되어 있거나, 쟁반 위에 올라가 있거나 둘 중 하나다. 그 덕분에 빵집을 찾는 사람들은 맛있는 빵을 고르는 행복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부모님은 먹성 좋은 나와 함께 빵집을 종종 들리곤 했다. 하지만 문제는 나와 함께 가게에 들어간 것이다. 불행히도 빵들은 어린 내가 볼 수 있고 손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높이에 위치했다.
반전은 없다. 빵집을 크게 한 바퀴 돌면서 눈에 보이는 빵을 손가락으로 열심히 쑤셨다. 이런 내 모습을 본 빵집 사장님과 부모님은 날 잡으려 달려들었다. 작은 날 재빠르게 잡았지만, 이미 많은 빵은 너덜 해졌다.
손가락으로 쑤신 빵을 부모님이 다 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나의 기행으로 부모님은 날 경계대상으로 삼았고, 전보다 더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기행은 멈추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어릴 때 나도 장난감을 정말 좋아했다. 그중 탑블레이드, 모터카, 로봇 등 흔한 장난감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런 내가 다양하고 신기한 장난감으로 가득 찬 마트에 간다면 미쳐버렸다. 진짜 말 그대로 미쳤다고 한다. 손에 닿는 모든 장난감을 카트에 넣었고, 부모님은 다시 진열대에 올려두기 바빴다.
아무리 내가 생떼를 심하게 부려도 성인 2명을 이길 수 없다. 장난감을 열심히 카트에 넣어도 다른 장난감을 가지러 진열대를 다녀오면 카트는 텅텅 비어있었다. 억울하고 화가 난 나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엉엉 울면서 마트 바닥을 굴렀다고 한다. 아빠는 그런 날 번쩍 들고 차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친한 동생이 토이저러스 아르바이트하면서 생떼 부리는 아이들을 보고 종종 현타가 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린 날 봤으면 아마 그 자리에서 바로 그만두지 않았을까?
2. 할머니 칠순 잔치상 깽판 부리기
어릴 때 집착할 정도로 좋아하는 게 3가지 있다.
1) 건전지
어릴 때 모터카를 좋아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모터카를 보면서 놀 때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조용했다고 한다. 육아로부터 잠시 해방될 수 있으니 부모님은 모터카가 오랫동안 달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야속하게도 모터카는 20분도 못 버텼고, 난 멈춘 모터카를 들고 부모님에게 찾아가 배터리를 바꿔달라고 이야기했다. 문제는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바꿔달라고 찾아온 것이다. 마치 음표 위에 놓인 도돌이표처럼 끊임없이 반복한 것이다.
지금도 비싼 건전지를 계속 바꾸는 것은 분명 부담이다. 모터카 값보다 건전지 값이 더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은 이제 모터카는 열심히 놀아서 자야 하니 다른 장난감이랑 놀자고 타협을 시도했다.
그런데 어린 난 원하는걸 안 해주면 머리를 땅바닥에 박았다고 한다. 보통 싫다고 응석 부리면서 참다 참다 안되면 끝을 보여주는데, 난 시작하자마자 끝을 보여주니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내가 만족할 때까지 건전지를 바꿔주었다고 한다. 지금 내 머리를 보면 울퉁불퉁하다.
나도 왜 그랬는지 정말 모르겠다.
2) 밴드
어릴 때 난 밴드가 만병통치약이라 생각했다. 스스로 머리를 땅바닥에 박고 나서 부모님에게 아프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럴 때 부모님은 빨갛게 부은 내 이마에 밴드를 하나 붙여줬다. 그러면 난 이제 다 나았다고 이야기하면서 또 어디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또 어디 아프다고 달려와서 밴드 붙여달라고 그랬다고 한다.
실제로 크게 다쳤을 때 밴드를 붙이고 이제 다 나았다며 울음을 멈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가 날 데리고 어디 가던 중 약속시간에 늦을 거 같아 날 들고 달렸다고 한다. 그러다 그만 어디에 부딪혀 눈썹이 찢어졌다. 지금도 흉터가 보일 정도로 꽤 심한 상처인데, 밴드 한 장 붙여주니깐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다 무릎이 까졌고, 상처가 곪아 칼로 긁어내는데 울면서 밴드만 외쳤다고 한다.
오른쪽 사진은 앨범에서 찾은 오래된 사진 중 하나이다. 기억은 안 나는데 분명 뭐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 울면서 머리를 땅바닥에 박았을 것이다. 이런 내 모습이 익숙한 부모님은 태연하게 머리에 밴드를 붙여줬을 것이다. 그리고 콜라랑 케이크를 먹이게 한 거 같다. 그러자마자 바로 울음을 멈추고 웃으면서 맛있게 먹는 내 모습을 본 부모님은 어떤 마음이셨으려나
3) 수박
맛있으니깐. 그래서 여름만 되면 수박은 항상 냉장고에 있었다. 지금도 서울에서 혼자 살면서도 여름만 되면 걸어서 20분 거리인 망원시장에서 수박 한 통과 장 본 것들을 들고 집까지 걸어간다. 걸어가다가 옆에 장보는 할머니들이 끌고 다니는 구르마를 보면 너무 부러웠다.
그리고 수박은 잔치 때 올라오는 음식 중 하나이다. 여름이 아니라도 잔치상에 찾아볼 수 있다. 할머니 칠순 잔치에 도착한 난 여름이 아닌데 수박이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그래서 먹고 싶다고 엄마를 보채기 시작했다. 하지만 잔치 시작은 물론 손님도 안 왔으니 엄만 어린 나에게 나중에 주겠다고 이야기했다.
타당한 논리이고 기다리면 되는데 그때 난 이해할 수 있는 그릇이 없었다. 지금 당장 수박을 못 먹는단 사실에 화가 났다. 처음엔 구석에서 뾰로통하게 있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손님들 접대 및 인사드린다고 바빠 가만히 있는 날 보고 다행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다행은 무슨 칠순 잔치 시작하고 나의 기행은 바로 시작되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할머니 품에 안길 때 난 카메라를 안 보고 수박만 빤히 쳐다보았다. 그 후 수박을 손가락으로 쑤시기 시작했다.
유치원도 가기 전인데 그 큰 수박을 혼자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 같다. 쑤시는 걸론 만족하지 못했는지 들고 도망가려고 잔칫상 위로 올라갔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부모님은 수습한다고, 손님과 할머니는 말썽 부리는 날 구경한다고 정신없었다.
잔칫날 손자의 기행을 본 할머니는 어떤 생각이셨을까. 속은 어떠셨을지 모르겠으나, 화 한번 내지 않으셨고 큰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찾아봬면 맛있는 밥을 해주셨고, 오랜만에 전화드려도 할머니를 부르는 내 목소리만 듣고 항상 '아이고 그래 동열아'라면서 내 이름을 반갑게 불러주셨다.
할머니의 따뜻한 관심 아래 잘 자랐고 이제 취업했으니 손주 노릇을 제대로 하겠다고 말씀드리려 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찾아뵈려 했으나, 할머니는 손주를 더 빨리 보고 싶었는지 2022년 입춘이 오고 며칠 후 떠나셨다.
새벽에 화장실을 이용하다 넘어져 꼬리뼈를 다쳐 수술 후 회복 중이셨다. 고령이셨지만, 항상 정정하셨기에 병원생활 잘 이겨내실 거라 믿었다. 코로나라서 면회가 어려워서, 서울에 있어서 대구에 계시는 할머니를 찾아뵙지 못했다. 아니 찾아뵙지 않았다.
평소에도 새벽에 종종 깨는 편이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은 달랐다. 새벽 4시 50분에 갑자기 눈이 떠졌고 다시 바로 잠들려고 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5분 뒤 엄마에게 전화가 왔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첫 차를 타고 바로 대구에 내려갔다.
사촌 형은 할머니 집에 있던 수의를 장례식장에 가져왔다. 할머니가 꼭 이 수의를 입고 싶다고 작은 아빠와 고모에게 이야기했고, 장롱 구석에 숨어있던 수의를 찾아 가져온 것이다.
낡은 상자에 보관된 수의를 장례지도사가 개봉했다. 수의는 박찬호의 전성기가 담긴 2001년에 발행된 스포츠 신문으로 감싸져 있었다. 2001년은 내가 6살 때로 말썽이란 말썽을 부리고 있을 때였다. 위에서 이야기한 칠순 잔치할 때쯤이었다. 말썽쟁이 손주의 응석을 받아주면서 동시에 약 20년 넘는 기간 동안 죽음을 기다리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구석에 가 이쁜 꽃에 둘러싸인 할머니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늦게 찾아뵙게 되어 죄송하다고 용서를 구했다.
최근 날씨가 많이 풀렸다.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지만, 그래도 이제 정말 봄이 찾아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쁜 꽃들은 추운 겨울을 버티고 이제 필 준비를 한다. 할머니가 계신 곳에도 이쁜 꽃이 피겠지란 생각하면서 이 글을 작성했다. 할매 이제는 늦지도 않고 변명하지 않고 꼭 찾아갈게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