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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Oct 24. 2023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

“천국 가는 삶을 살아라!”


내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한 지도 벌써 20년에 접어든다.

나에게 편협한 기독교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고 기독교 맹신의 독을 빼 준 귀한 이다.

그는 귀족 가문에 고급 공무원이었고 당대의 과학자 뉴튼과 교류하던 뛰어난 과학자였다. 아인쉬타인보다 200년 앞서 상대성 원리의 기본 원리를 발표했고 150편의 논문을  그를 사람들은 북유럽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렀다.

그러한 그가 한 영계체험과 기록이라 더욱 신뢰감이 갔다.     


나는 명퇴 후 긴 여행을 마쳤다.

그리고 연이어 암 수술 후 치료 중인데  이 조용한 시간대에 다시 접한 스베덴보리는 여전히 내게 신선한 충격이다.

이전 보다 더 깊이 그의 말이 와닿는 것은 아마도 그의 메시지가  이제 내게 조금이나마 더 실체화되고 실현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스베덴보리를 한번 더 내 존재 안에 각인시키고 기억 속에 휘발되기 전에 포스팅해 두려 한다.     


스베덴보리는 스웨덴에서 1688년에 태어나 1772년에 죽었다.

그러니까 17세기와 18세기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과학자로서 살다가 57세에 처음으로 죽음 이후의 세계, 즉 영계를 오가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 후 27년 동안 그의 이러한 체험은 계속되었다.

이에 그는 과학을 완전히 접고 그의 영적체험의 그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그의 변화에 대해 놀라는 세상사람들에 대해 그는 아래와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나와 같은 과학자는 얼마든지 또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영계의 진리를 알고 보니 이는 학문이 아니라 인류의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이다. 이 특별한 소명은 내가 과학자로 공헌하는 것보다 수천, 수만 배 더 중요하다     


나는 신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알았다. 

내 사명은 지상인들에게 사후의 세계가 분명히 있음을 알리고, 그들이 몰라서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 없이 모두 천국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신' 또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신의 섭리로 작동되는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생생히 보고 있는 그대로 기록하여 전달하려 했을 뿐이다.


     


 

20대 중반 이후로 십 수년 좁은 교회란 좁은  안에 갇혀 있던 내게 스베덴보리가 시원한 해답이 된 것은 교회를 다녔지만 늘 궁금하고 갈급했던 의문점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호멧을 선지자로 믿거나 부처를 섬기거나 지구상 여타 다른 종교들, 그리고 종교생활을 아니하는 사람들의 영혼문제였다.

그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해답은 기독교란 특정종교에 편향되지 않고 지극히 상식적이어서 내게 무엇보다 ‘합리적’으로 다가왔.     


“하나님을 모르고 산 사람들은 천국에 못 가나요?”     

~본인의 양심에 비추어 옳게 살았다면 천국에 간다. 그래서 많은 원시민족들이 천국에 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이며 다시 말하면 교회를 가야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사회생활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천국 가는 기초라는 거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유명한 저서 「천국과 지옥」 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를 축적하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신분과 직업에 맞는 훌륭한 집에 살고 몸차림을 단정하게 하고 생활의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며 직업을 위해 심신의 건강유지에 힘쓰면서 속세적인 일을 해도 아무 상관없다. 그저 마음속에 하나님을 품고(혹은 양심을 지키고) 사심 없이 이웃을 사랑하고 기쁨으로 베풀면 되는 것이다.”     


스베덴보리 ‘위대한 선물’ 중에서 주요 부분을 발췌한 글로서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요점을 알아보자.

아래 그가 말한 6가지 권고 지침으로 삼고 살아도 우리는 지상에서 그대로 천국으로 이어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    

 

p 278

스베덴보리의 여섯 가지 권고


첫째,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셋째, 매사에 양심을 지켜라.


넷째, 남을 심판하지 말라.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용서다.

사랑은 상대의 잘못과 실수를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동의어는 '용서'다.

성서에 주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한 것이요, 사랑에 앞서 용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인간은 타의든 자의든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있다. 그래서 땅 위에 살면서 죄인이 아닌 자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이 지상에서 저지른 크고 작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곳도 지상뿐이다.

한번 육신을 벗고 영계에 들어가면 지상에서의 모든 죄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으려면 뉘우침이나 참회만 가지고는 안 된다.

뉘우침이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곧 선을 행해야 한다. 의식적으로 죄를 멀리하고 영생을 위한 노력을 거듭해야 한다.”     


다섯째, 자기 생명까지 희생하는 사랑은 사랑의 극치이다.

여섯째, 마음에 참 평화를 확인하라.     


스베덴보리의 또 하나의 중요한 공헌은 지상인간으로 하여금 우선 하늘을 쳐다보고 깨닫게 만들고, 그다음엔 땅을 바라보고 실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영생이나 천국을 얻는 길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땅 위에 있음을 확고히 증언했다.


진리는 하늘에 있고,

실천은 땅에 있다.     









사람이 신이 어디에 있느냐? 누가 신을 보았느냐? 며 불가지론, 무신론으로  막행 막식하며 살다 갈 수도 있지만 예수님 말씀처럼 보려는 자에게는 보이는 법이요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정답은 분명코 있다 본다. 다만 보기를 원치 않는 자에게나 보기 싫은 자에게 안 보일 뿐이다.


 ‘팡세’의 저자인 파스칼은 16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이자 뛰어난 수학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신의 존재유무에 대한 내기를 걸었다.      

동전을 던지면 앞면이나 뒷면이 나올 확률은 50:50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확률도 이와 같지 않을까? 만약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에 내기를 걸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현명할까?


영원에 비하면 찰나 같은 우리 삶을 생각하고 우리가 신을 믿었을 때 얻을 것과 믿지 않았을 때 잃을 것을 비교해 보라.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에 내기를 걸고 살면 얼핏 내 멋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리 살다가서 사후에 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천국에서 행복할 기회를 영원히 상실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결국 이기심과 탐욕으로 산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믿고 살았는데 결과적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고 큰 희생은 없다. 설령 조금은 ‘유해한 쾌락’을 놓친다 하더래도.     


스베덴보리의 아버지는 루터파 궁정 성직자였으며, 웁살라 대학교 신학교수였다. 이런 가정환경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그는 종교적인 것을 깊이 생각하곤 하였으나 자라서는 과학자의 길을 걷는다. 그 외에도 공직자생활과 귀족원의 일원으로서 정치에도 일부 참여하였다.     


1744년, 그가 57세 때 스베덴보리는 부활절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한창 잠을 자던 중 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큰 소리가 들리자 그는 두려움을 느꼈는데 그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다가왔음을 느끼고 바닥에 얼굴을 대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신비체험은 그 후 27년간이나 지속되었고 그는 특별히 허락된 영계방문을 통해서 그가 겪고 보고 체험한 모든 것을 30권의 저서로 남겼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특별한 체험 이후 열성적인 신비주의자로 돌변했고 이전의 다른 과학적, 인문학적인 일들에서 일체 손을 떼고 종교적인 저작만을 쓰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웨덴에서 스베덴보리는 신통력이 있는 사람으로 더욱 유명해지면서 여왕이나 주요 인물들 앞에서 그의 신비한 능력을 증명하기도 했다.

죽은 자의 메시지를 전하거나 산자의 죽을 날짜까지 예언하는 그의 이런 능력에 놀라워하는 사람들에게 매번 그는 이것은 그의 특별한 능력이 아니고 단순히 허락된 체험을 통해서 본 것을 전달할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1772년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는 자신이 죽을 날짜와 시간까지 예언해서 1년 전 목사에게 편지로 전달했고 그것은 그대로 이뤄졌다.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프랑스 작가 발자크를 위시한 많은 철학자, 과학자, 시인, 작가들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와 헬렌켈러등

특히 헬렌켈러는 사후세계의 진실에 대한 그의 저서를 읽고 나서 죽음의 공포가 사라졌다며 이생에서 더 이상 나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독일 철학자 칸트는 그의 저서에서 스베덴보리의 불가사의한 능력에 대해서 인류 역사상 이런 특별한 인물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이 틀림없다,라고 했다.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영체가 육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분리된 영체는 천사의 안내를 받아 영계로 들어가게 된다.

육신은 영체가 입고 있는 의복과 같다.

 그러므로 죽는 것은 오직 육체뿐이다.

진짜 자신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다만 지상을 떠나 영계에 가서 거주하는 것뿐이다.”     


육체와 영혼의 삶은 마치 나비와 같다. 나비가 유충으로 살다 나비로 날아가듯이 우리도 한 생애를 살다가 때가 되면 충의 옷을 벗고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아오른다.

이렇게 인간은 땅 위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영혼으로 이어져 영속되는 삶이란 거다.     


사람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후세계 이후의 무지에서 온다. 죽은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데서 공포가 찾아온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사람이 육체를 벗고 맨 먼저 가는 곳은 '중간영계'인데  이곳은 지상과 천국의 중간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지상생활에서 사랑의 행적에 따라 종국에 자신의 영적인 위치와 신분인 영위가 결정되는데 그전에 중간영계를 거치게 되고 그  중간영계에 머무르는 기간은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땅 위에서 선한 사람인 거 마냥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 삶을 산 사람들은 겉과 속이 분리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져 더 오래 중간영계에 머무르게 된다고 한다.     

 

스베덴보리가 본 천국과 지옥은 중간영계를 기준으로 각각 세 등급으로 이뤄져 있었다. 천국은 1,2,3등급이 있고 지옥도 1,2,3 등급이 있었다.


제3층 천적왕국은 

그야말로 하나님과 하나 된 영혼들이 머무는 천국으로서 지상에서 사랑의 온기로 살아온 영혼들이 그와 동질의 파동인 천국사랑의 온기로 가득한 사랑의 왕국이다.

제2층 영적왕국은 

영적진리인 빛을 따라 산 영혼들이 가는 곳인 진리의 왕국이다.

제1층 자연왕국은 

교회나 하나님을 모르고도 자신 안의 양심을 따라 자연법의 이치를 따라 선한 삶을  영혼들이 가는 곳이었다.

           

지옥의 세 등급은 악령과 악마와 악귀의 세 등급으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 형체가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고약한 악취가 진동을 했다 한다. 그런데 그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다들 자신들을 정상적인 모습으로 착각하며 지내고 있었다 한다.

이를 보며 나는 어쩌면 지상에서도 자신이 저지르는 잘못의 흉악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과 그리 같을까 싶었다!!   


우리네 지상 백 년은 영원에서 보면 찰나도 못 된다. 그러니 "인간의 지상 백 년은 훈련을 통한 인격테스트 기간이요, 영원한 삶을 준비할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이라 봐야 한다. 


결국 천국은 하늘에 있어도, 천국 가는 길은 지금 땅 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스베덴보리는 우리는 육체적 면역력을 높이는 동시에 영적인 면역력도 강화해야 한다며 우리의 지상에서의 사랑의 실적만이 천계에 가지고 가는 자산이라고 했다.     


하늘의 뜻은 땅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자명해질 것이지만, 현명한 자는 죽기 전에 이 원리를 알고 자유의지를  옳게 행사하며 지상의 삶을 잘 살다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거듭 강조하여 말하기를 실제 그가 가 보고 확인한 “천국은 특정한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천국에 가면 무슨 종교를 믿다가 왔느냐고 묻지 않는다” 는 것이다.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에서 말하는 천사도 놀라는 인간들의 가장 큰 착각과 오해는

기독교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간이 창조되기 전 이미 천사와 타락한 천사-루시퍼 악마가 있다고 한 것이었다.

스베덴보리가 본 바로는 천사와 악마는 인간일 뿐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매 순간 자유의지에 의해 선한 영을 따라 살다 사후 천사로 살아가는가 하면 악령을 따라 살다 악한 생으로서 마감함으로써 사후에도 지옥에 가는 것이라는 거다.     





 * 조로아스터교와 비교해서 잠시 언급해 보면...

니체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자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의 독일식 발음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지구상 종교의 뿌리처럼 먼저 존재했었고 유대, 기독교의 일원론이 그에서 나왔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장 중시했었다.

그리고 조로아스터는 선과 악을 good====non-good으로 불렀다. 즉 악이란 선의 없음이니 조로아스터교 안에는

기독교식 원죄라는 개념은 없다. 그러니 이 원죄란 개념도 나중에 성경에 삽입된 내용일 수 있다 본다.


선은 실존차원에서 신의 절대 선을 반영하지만, 악은 초월적인 신과 관련이 없고 오직 기능의 문제로서 인간의 선택을 통해 드러날 뿐이다. 그러니 결국 옳지 않은 선택을 하는 개인이 자신과 공동체에 악을 만들고 그를 활성화할 뿐인 것이다.

이렇게 조로아스터 신학은 악을 창조한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설명한다.

신은 노예나 꼭두각시가 아닌 , 자신의 선택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선택한 결과에 책임이 있는) 영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로 사람을 창조했다.

이렇게 신은 완전한 창조물인 인간을 만들어 냈지만 인간이 이 창조에 악을 도입한 것이다.     


 결국, 인간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인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선을 택하고 실행함으로써 천사가 되어가고 죽음을 맞이하여 육체의 껍질을 벗고 천국으로 이동한다.

그의 표현으로는 “인간은 천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다~!”          


천국의 빛과 열은 지상의 7배라고 한다. 그러므로 천국에 비하면 그림자 왕국인 지상의 생활을 통해서 장래의 실체를 그려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철학자들도 그러한 이데아론을 펼쳤는데 사실이다.

천국의 그림자가 이 세상이니 이 그림자 세상을 잘 살다가는 것은 바로 우리가 천사가 되기 위한 준비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 물적 왕국 두 세계가 존재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직 보이는 세계 자연계의 삶, 겉모습만 보고 받아들이는 자는 천국에 가더라도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같은 파장이 아니기에 천국의 빛과 열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돼지를 깨끗하게 씻어서 아파트 거실에 두어도 그 스스로 견디지 못해 더럽고 축축한 돼지우리로 도망쳐 달아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 천국의 기쁨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천국의 기쁨이란 무엇입니까?”

이들이 천사에게 물었다. 천사는 다음과 같이 짧게 대답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즐거움입니다.

쓰임에 대한 즐거움의 본질적인 특징은 사랑에서 비롯되고 그 외면적인 표현은 지혜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에서 시작하여 지혜를 통해 표출되는, 쓰임에 대한 기쁨은 모든 천국의 기쁨의 생명이자 혼입니다! 

천국에서는 천사의 정신을 유쾌하게 하고, 기분을 고양시켜 주며, 마음을 즐겁게 해 주고, 몸을 새롭게 해 주는 멋진 잔치가 열리지만 이 잔치는 자신이 맡은 일이나 책임을 다 한 뒤 누리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내려주는 빛과 열로 된 세계이다. 이 빛과 열은 천사들에게 지혜와 사랑을 선사하고, 지혜와 사랑은 그 사람에게 맞는 쓰임으로 발현되어 기쁨과 행복을 안겨준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천국의 기쁨도 고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알려 주는 천국은 너무 확고하다. 선택받은 자만이 천국이 간다는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천국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나 마음이 악과 거짓으로 가득 찬 사람은 천국에 가면 숨을 쉴 수 없고 천국의 빛과 열에 눈이 멀고 땅을 기다가 절벽이 나타나면 스스로 몸을 던진다.

 

끔찍한 사실은 악마는 인간과 다른 존재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간 인간이 악마가 된다는 것이다.

악마들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연을 숭배한다. 그들은 남을 괴롭히고 갈취하고 간음하는 것에서 기쁨을 찾는다.


악령을 만난 스베덴보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악마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내게 독설을 퍼붓고 나를 괴롭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악마들이 내 털끝 하나도 다치게 할 수 없었던 것은 주님이 나를 가까이에서 지켜주셨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쫓아 인간을 만들고 그들의 자유의지로 사랑하게 하고 사랑받으려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자 본질 온기이신 사랑이시기에.....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늘 각자에게 수호천사, 수호령, 보호령, 수호신처럼 선한 영이 붙어 돕고 있다 한다.

물론 악령도 붙을 수 있는데 그는 각자 사람이 하기 나름으로 자신이 의지를 굳건히 하고 면역이 충분하면 괜찮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선한 영은 선영대로 악령은 악령대로 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고 하니 이래저래 우리 각자의 의지가 정말 중요한 관건임을 다시 깨닫는다.         

 





쓰임 없는 사랑과 지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추상적인 실체에 불과하다.


유익한 활동 즉 선행 안에 존재하기 전에 사랑과 지혜는 현실이 될 수 없다.

사랑이 지혜를 통해 유익한 쓰임이 될 때 사랑은 어떤 존재가 된다.



 “천국 가는 삶을 살아라!”

스베덴보리는 선행의 기쁨이 바로 천국의 기쁨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천국의 기쁨은 우리 안의 가장 깊은 내면을 통해 들어와서 형언할 수 없는 행복으로 우리의 심장과 마음을 울린다. 우리는 그 기쁨을 지상에서도 맛볼 수 있고, 천국에서는 영원히 맛보게 된다. 그렇기에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너무나 희망적이다.
땅에서도 하늘의 메시지를 실천한다면 이미 천국은 지상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출판사 서평 중에서
      


사랑과 지혜,
자유의지로 행하는 선행이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삶이라고
그는 메아리친다



스베덴보리가 본 천국지도. 영계태양의 사랑이 직,간접적으로 인간과 영혼들에게 흘러든다. 마치 지상의 태양이 선인과 악인을 구분없이 비추고 쪼이듯이 사후세계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영계태양이 직접적으로 비춰주지만 인간이나 사후세계의 영인들이나 자유의지가 있어서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하나님, 하늘에 부합하는 것들을 향해 우리 마음이 열려야 그 빛과 열기를 받을 수 있음을 본다.

지상의 악인들은 악한 동기로 악한 일을 도모할 때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것은 자신의 어떠함과 도모하는 일들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듯 사후세계에서도 영계태양이 빛을 비추지만 효과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악령, 악마, 악귀들로 표현되는 사후세계 영들이 천사들의 선한 영이 우릴 돕고 영향을 주듯 우리에게 간접적 영향을 주는 것으로 봐서 항상 영적 면역력을 가지고 우리의 자유의지가 악한 쪽으로 휘둘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중요함을 재차 확인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우리에게 전적으로 모든 결정을 맡긴 것은 그분처럼 우리 또한 독립적인 인격으로 판단해서 선택하게 함이었다. 이렇게 인간은 좀비도 노예도 아닌 완전한 인격체로 창조되었다.





https://youtu.be/iVxaaxRLfho?si=QnpQOLfuAP2w9F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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