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말을 회피하기 위해서 동양의 중국에서는 죽을 사死 글자를 회피하고, 우리나라는 같은 발음인 4층도 피한다. 그러나 회피가 정답은 아니겠고 나는 차라리 직시가 정답일 수 있다는 것을 서양의 메멘토 모리에서 발견한다.
메멘토 모리는 오랫 동안 유럽의 철학과 각종 문학에서도 중요한 요소가 되어왔다. 이를 제목으로 한 영화도 있다.
메멘토모리의 시작은 옛날 로마 시대에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라고 외치게 한데서 기인한다.
이는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네가 개선 장군이지만, 너 또한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라는 의미로 그리했다고 한다.
또 본질적 의미는 같으나 약간 다른 버전의 이야기도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허락되는 개선식은 네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전차를 타며 시내를 가로지르는 카 퍼레이드로 거행되는데, 이런 대접을 한 몸에 받게 되면 당사자는 말 그대로 신으로 숭배받는 듯한 들뜸과 흥분에 젖을 수 있다.
그래서 이 개선식의 마차에 노예 한 명을 장군과 같이 탑승시켜 개선식 동안 노예가 그의 귀에 끊임없이 죽음을 잊지 말라는 "메멘토 모리"를 속삭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해당 개선장군에게 너무 우쭐대지 말라는 경고 장치였다. 즉 네가 지금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지만 너는 신이 아닌 인간일 뿐이니 그를 잊지 말고 겸손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주지시킨 것이다.
그냥 그런 말을 하는 정도라면 다른 사람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터인데 굳이 노예를 사용한 까닭은 비천한 노예를 같이 태움으로써 고귀한 신만이 탑승하는 신의 전차보다 그 급을 낮추기 위함이었다 한다. 이는 아무리 영광스러운 인간이라도 신에게 혹은 황제?에게는 미칠 수 없다는 일종의 엄중한 경고 장치였다.
이런 식으로 전해져 오던 메멘토 모리를 19세기 초 유럽사람들은 죽은 가족이나 친구, 연인의 모습을 메멘토 모리라며 사진을 찍어두는 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사진 찍는 가격이 너무 비싸서 살아생전에는 찍지 못하다가 죽고 나서 마지막으로 그를 기억하기 위해 찍어서 메멘토 모리로 기념했다고 한다.
나에게도 메멘토모리가 있다.
나에게 가장 특별한 인연중 하나일 친정 어머니시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냈었기에 그것이 절로 나에게 메멘토 모리가 되게 했다.
결혼 후 가족의 죽음은 시부모님과 시누형님, 친정 아버지등이 있었지만 내가 함께 접촉하며 지냈던 시간이 짧았거나 아니면 돌아가신 지 이미 이십년 십 년이 지난 세월이 되니 그다지각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직장 명퇴 후 어머니를 내 집에 모시고 전적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었고 그 마지막도 내가 보내드린 덕분에 어머니의 죽음은 내게 각별하다. 돌아가신 지 이년이 지난 지금도 어머니는 늘 생생히 내게 떠오르니 절로 메멘토 모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