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로 나가보니 국화축제 현장에서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 시간이었다. 우리 집은 해안가 바로 위 언덕의 아파트 6층이라 잘 보인다. 밥을 먹다 남편이랑 한참을 구경했다.
일찍이 인생은 firework 불꽃놀이 같다고 생각해서 나는 그렇게 메일 아이디를 적어 사용하고 있다. 잠시 찰나 쏘아 올려 화려하게 불타고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것이 우리 인생 그림 같다고 본다.
각자의 열정으로 질주하고 고뇌하며 살고 사랑하다 우리 모두는 어느 시점에 인생을 종료한다. 갑자기 모래시계의 모래가 뚝!하고 멈추듯 .
그래서 오늘의 한 줄 명상 왼손글씨는 일일일생이다.
하루가 마치 우리 전체 일생을 대변할 수도 있는 축소판 같이 여겨지지 않는가?
아침이면 죽은 듯 자던 잠에서 깨어 움직이고 활동하다 저녁이면 다시 죽음처럼 잠자리로 드는 우리의 하루가 마치 작은 일생과도 같다.
우리 몸도 60조개의 세포가 합쳐 한 몸을 이루듯 하루하루가 모여 한 사람의 일생을 이룬다.
아침 잠에서 깨어남이 그 날의 탄생이라면 오전은 청년기와 같고 오후는 장년기, 그러다가 저녁 잠자리에 누울 땐 그날 하루 생의 황혼기를 맞이함을 알아야 한다고 쇼펜하우어도 말했다. 언제나 지속될 거 같은 이 하루가 언제 끝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모두 시한부 생명이다.
누가 말기 암 걸린 친구 병문안을 다녀오던 길에 교통사고로 먼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신은 하루밖에 못 사는데 1년 더 살 사람을 위로하고 간 셈이다.
누가 먼저 갈지 아무도 모르는 생, 그러니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면 내일 죽어도 후회가 없는 삶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하루하루를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아침 일찍 깨어난 생생한 정신으로 시작해서
하루를 오롯이 자기 통제하에 자기 의도대로 살아내면 보다 온전한 삶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하루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몰두하면 자연 지금 여기, 현재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 현존의 삶 속에서는 어리석게 지나온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없고 더 어리석은 미래의 불안이 침투할 여지도 없다.
성경의 만나는 하루 일일일생에 대한 좋은 예시라 본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40년을 광야에서 헤메며 방황할 때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 주셨다. 가나안이 낙원을 상징한다면 그곳에 이르기 위해 통과 해야하는 광야는 우리 인생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백성들은 아침마다 광야에 내리는 만나를 식구 수대로 필요한 양으로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둬야 했고 그 이상은 허락되지 않았는데 설령 더 거둔다 해도 남는 것은 예외 없이 모두 썩어버렸다. 이런 하루치 양식 만나는 '일일일생(一日一生)'의 예가 될 수 있다 본다.
아침마다 땅에 내려온 낯선 먹거리를 보고 백성들이 모세에게 "이게 무엇인가?(manna)" 물었을 때 모세도 답을 못 해서 그냥 만나로 불렀다. 만나의 정체를 모르지만 만나를 먹는 방법만은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마치 인생이 무엇이냐 (What’s life?) 물음과도 같다. 인생이 뭔지 다 알 수 없기에 알려하기 보다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How should we live?) 가 더 중요한 거처럼.
인생은 우리에게 물고기가 물이 뭔지 알려 하지 않는 거처럼 무엇보다는 어떻게가 더 중요한 화두다.
기왕에 태어난 자에게 왜 태어났니? 하는 질문만큼 어리석은 말은 없다.
태어난 이유,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요 권리이자 임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