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정말 우리가 볼 수 없는 신의 얼굴일까?
우주의 두 축인 공간과 시간
측정할 수 없는 무한한 공간과
알듯 모를 듯 도대체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이란 존재,
그래서 지금까지 알려진 그 시간의 몇 측면을 다시 살펴보려 한다.
먼저 고전역학의 절대시간개념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시간개념에 대해 요약해 보면,
뉴턴의 고전역학에서는 시간은 우주 어디서나 진행 방식이 같고, 어떤 것의 영향도 받지 않으면서 항상 같은 속도로 흘러가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를 ‘절대시간’이라고 한다.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에서 그는 “수학적이며 진리적인 절대시간은 외부의 그 어떤 것과 상관없이 그것 자체로 흐른다.” 고 말한다. 즉 시간이 사물의 존재나 변화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이 '절대 시간'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버렸다. "운동하는 시계의 진행은 느려진다. 운동의 속도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의 지연은 강해지고, 빛의 속도에 도달하면 시간은 멈춘다."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운동하면 할수록 그곳에서는 시간이 더욱 느려진다는 것이다. 즉, 시간은 신축적이고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이후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에 의해서도 시간이 지연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일반상대성이론을 간단하게 언급하면, 중력이 센 곳일수록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물리학을 믿는 나와 같은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란 단지 고질적인 환상일 뿐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People like us, who believe in physics, know that the distinction between past, present, and future is only a stubbornly persistent illusion."
- Albert Einstein -
그래서 언제나 일정한 빠르기로 흐른다는 고전물리학의 시간개념은 1905년에 발표된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해 무너졌다. 시간의 진행속도는 관측자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거다.
예를 들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을 생각하면 우주선에 있는 시계의 흐름은 느려진다. 우주선이 광속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의 흐름은 느려지고 마침내 거의 정지해 버릴 수도 있다.
시간의 절대성과 상대성에 이어서 두 번째 중요한 사실을 알아보자.
시간은 과연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다시 미래로 흘러가는가?
대부분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시간이 왜 과거에서 미래로 직선적으로 흘러가는지에 대한 설명은 상대성 이론과 함께 하는 열역학 제2법칙에 근거한다고 한다.
열역학 제1법칙은 다들 알다시피 '에너지 보존 법칙'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물리적 과정이 일어나도 에너지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모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엔트로피 즉, 무질서한 정도가 증가한다는 법칙이다.
한 곳에 가지런하게 정리해놓은 물건들은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어질러지고, 물 위에 떨어뜨린 잉크 방울은 순식간에 퍼진다. 물건이 스스로 정리되거나 물속에 퍼져 있는 잉크 방울이 스스로 모이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즉 말해서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일이 없으니 시간이 거꾸로 흐를 수 없다 본다.
그리고 지금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있다면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인식을 갖게 되는 이유는 모든 현상은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타나는 시간의 방향성을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이라 하는데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방향성은 열역학적 시간의 방향성과 같기 때문에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으니 과거,현재,미래로 나타난다.
이상의 시간에 대한 개념들과 함께 여러 시대에 걸쳐서 이뤄져 온 시간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이론을 참고해 보면 흥미로울 거 같다.
지금도 시간은 주로 철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의 연구 대상이다. 하지만 18세기 까지는 수학과 물리학은 자연철학으로 간주되어 철학영역에 속했기에 철학이 곧 수학이요 물리학이었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시간'은 늘 흥미로운 주제였다.
'철학은 거대한 책 우주에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있다. 수학을 모르면 철학을 파악할 수 없다'는 갈릴레이의 말인데 그의 시대에서 철학은 자연철학이면서 곧 물리학이었다.
플라톤 에게 시간이란, 진정한 본질의 원형인 이데아세계의 모방이요 그림자인 현실세계에서의 불완전함을 나타낼 뿐이었다. 사물이 본질의 순수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타자와 관계를 맺지 않은 독립적이고 부동의 상태에서 존재해야 한다고 본 그에게 시간이 흐르는 현실세계에서는 이러한 본질의 순수성이 구현될 수 없었다. 해서 시간이 존재하지 않고 아무런 변화도 운동도 일어나지 않는 이데아 계에서만 본질의 순수성이 구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그에게 시간은 한시적이고 부분적인 이데아의 모상에 불과했다.
플라톤과 달리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은 변화의 척도'라고 생각했다. 사물이나 현상에 변화가 생겼다면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라는 거다. 변화를 말함으로써 시간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이후 오랫동안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점유했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은 뉴턴의 생각도 비슷했다. 그도 시간은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변화 유무와 무관하게 시간은 그냥 흐른다고 했다. 이것이 그가 ‘절대적이고 참되며 수학적인 시간’이라 부른 것으로 사람들이 보편적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시간 개념이 되었다.
반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마음이 시간을 만든다고 했다. 신은 전지전능하므로 시간을 초월하며 그런 초월적인 시간 안에서 초월적인 방식으로 무에서 세상을 창조했다고 설명한다. 즉, 과거, 현재, 미래는 각기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기억, 감지, 기대감 일 뿐이라고 했다. 이는 다소 불교적인 색채가 느껴지기도 하는 시간에 대한 직관적 통찰이 아닐까 싶다.
인간 인식 능력으로서의 합리론과 인식 내용으로서의 경험론을 종합함으로써 근대 서구 철학을 집대성한 칸트는 뉴턴의 절대시간을 넘어선 새로운 시간개념을 피력했다. 그는 절대시간과 절대 공간은 실체가 아닌, 관념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칸트 하면 떠오르는 '칸트시계'란 일화가 있어 잠깐 언급하고 가려한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칸트는 평생 그는 그가 살던 지역의 반경 30킬로를 벗어나지 않았고 거기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닥치는 대로 읽고 강의를 했다. 그런 그가 오전 7시부터 강의를 하고 글쓰기를 마친 후 나가던 오후 산책 시간 3시 30분은 정말 시계처럼 정확해서 그가 살던 쾨니히스베르크 주부들은 칸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런 칸트는 시간에 대해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지니고 있는 인식의 형식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형식은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이 만들어낸 도구일 뿐, 물리계에 실재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칸트의 저서 형이상학 서설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은 인간이 가진 감성의 형식적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기본적인 형식이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는 발상은 인식의 주체를 외부에서 내부로 돌린 인간 사고발상의 대 전환이었다.
시간은 칸트에 의하면,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이 모든 대상에 대해 객관적 타당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은 성립하나 우리 감성의 주관적 조건을 도외시하고 '시간'을 마치 그 자체로 절대적인 사물 자체의 성질로 여기지는 않는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시간에 대해서 경험하는 것으로는 실재하나 우리의 감각을 떠나서 독립적인 실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니체는 그의 저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의 영원회귀적 시간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끝에 와서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재귀할 뿐이다. 그것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니체의 말은 동양인이면서 문과녀인 나에게 직관적으로 와닿는데 그 순환성이 불교적 시간관과 닮아 보인다.
공(空) 사상을 세워 대승불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3세기 인도의 용수 스님은 ‘과거, 미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태어남, 늙음, 죽음에 대해 산만하게 논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유위법이 생멸변화할 때의 그 변화상태를 가설적으로 이름하여 시간이라고 한다. 즉, 시간이란 실체가 없는 것으로 단순히 편의상 설정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는 것이리라.
철학자들은 시간의 실재성 여부를 놓고 여전히 활발한 토론을 해 오고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상당수의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처럼 시간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은 근본적으로 없다고 본다.
(그런데 경험적 현상적으로는 여전히... 어쨌든.... 세상에는 엄연히 시간이 흐르고 있다고 여겨진다.)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적 논제로 '현재주의'가 있다.
시간의 흐름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이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 속에서만 존재한다. 과거는 지나갔으며 미래는 오지 않았다. 오직 현재 만이 존재론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거다. 과거는 기억 속에, 미래는 기대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이런 관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고 오직 ‘지금’ 하나로 있다는 관념으로 시간은 지금 뿐이며 과거와 미래는 의식 속에나 있다는 19세기 독일 철학자 헤겔의 사상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래서 이런 흐름을 따라 계속 흘러와서 결국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지금 여기'가 나왔지 않을까 싶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만이 우리가 주목하고 주의하고 집중해야 할 시공간으로 생각하게 되어서....
한때 나를 매료시켰던 에크하르트 톨레는 과거와 미래는 다 허상이다. 오직 이 순간을 살아라며 ' 에크하르트 톨레 이 순간의 나'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도 있다.
그래서
현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기!!로
톨레의 이런 철학도 다 같은 맥락으로 이어져 온 시간의 패러다임이 아닐까 싶다.
시간의 흐름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시간의 흐름은 착각일 뿐이라는 거나 다 비슷한 개념 같은데 용어상으로 '영원주의'가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구분이 없으며, 다만 상대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관찰자에게만 다를 뿐 과거, 현재, 미래에 구분이 없다는 관점을 영원주의라고 부른다. ‘현재’라고 부를 특정한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영원주의에 따르면 시간의 흐름은 환상 혹은 착각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시간은 물방울 한 방울과도 같은 한 점, 찰나 순간이라 본다.
그래서 그 점이 모여 선이 되고 면이 되고 입체가 되어 영원무궁이 되고...
마치 물방울이 모여서 대양, 우주를 이루듯이...
이것이 문과녀로서의 시간에 대한 표현이다 ㅎㅎ
사실 시간은 칸트의 말대로 경험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내가 그를 어떤 이유로든 감관하지 않으면 마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우리가 느낄수 없다.
시간에 대한 또 다른 개념인
양자물리학에서에서의 시간에 대해서는 다음 화에서 얘기해보려 한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