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을 좋아하는 나는 런던에 있는 동안 대영박물관을 자주 갔다. 그리고 또 한군데 내셔널 갤러리에 그림 보러 자주 다녔다. 어차피 트라팔가 스퀘어에 있는 내셔널 갤러리는 오며 가며 자주 지나다니기에 들러서 그림은 원도 없이 봤다.
그 다음으로 내가 자주 간 곳이 빅토리아 & 알버트 뮤지엄이다. 줄여서 V&A 라고도 하는데 세계 최대의 장식미술과 디자인 박물관이다.
빅토리아 여왕과 그의 부군인 알버트 공의 이름을 따서 1852년 문을 연 박물관이다. 145개 전시실을 가진 건물의 위엄있는 모습이 대영박물관보다 더 화려하게 여겨진다. 450만 점의 전시품들이 고대부터 현대까지 대륙별, 나라별, 주제별로 나뉘어 전시되어 있다. 특별히 나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복장사를 담고 있는 패션관이 흥미로웠다.
빅토리아 & 알버트 뮤지엄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뿐 아니라 세계역사에서도 중요한 획을 긋는 여인이 아닐까 싶다. 그런 그녀는 정말 천운?으로 여왕이 되었다. 그녀의 부친인 조지 3세도 4남중 막내아들이어서 삼촌, 사촌들이 많았으니 그녀가 왕이 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인명재천이라고 모두들 단명함으로 그녀는 1837년, 열여덟 살 때 여왕에 즉위했다. 즉위했을 때의 일화가 있다.
즉위식이 끝나고 그녀는 시종에게 홍차와 타임지를 갖고 오라고 명령했고 시종이 그것을 가져오자 흘낏 보고는 미소만 띨 뿐 손대지 않았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시종에게 그녀는
"내게 정말로 권력이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독일 출신의 어머니와 보모손에서 엄격히 자란 그녀다. 해서 자유롭게 홍차를 마시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던 그녀의 당돌하면서도 현실적인 기지가 드러나는 이야기다.
그녀는 사촌인 앨버트공과 결혼하였고 다행히 공은 인품과 교양있는 여왕의 남자로서 좋은 동반자역할을 해주었다. 같은 독일문화권이어서 영어가 어눌했던 여왕과는 처음부터 사이가 좋았다 한다. 그리고 가정과 공적인 생활에서 그녀를 두루 뒷받침하였기에 부부는 일생동안 유난히 금슬이 좋았다. 약간 이기적인 데가 있던 그녀가 국민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여왕이 될 수 있었던 것에는 남편 앨버트공의 역할이 컸다 한다.
그래서 1861년 공이 42세의 나이로 죽자 실의와 비탄에 빠진 그녀는 한동안 버킹엄 궁전에 틀어박힌 채 모든 국무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다가 1877년 인도 여제가 되었고 9명의 자식들을 유럽왕가로 출가시켜 유럽의 할머니란 별명을 얻었다.
빅토리아 여왕동상 ~사진출처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녀의 긴 64년 치세동안을 사람들은 빅토리아시대로 부르는데 이 때가 영국의 전성기였다 . 자본주의의 선두국이 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2대정당제의 의회정치체제를 확립하였고 그러한 빛나는 시대에 살면서 그녀는 ‘군림(君臨)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잘 따랐다.
영국 왕실의 공식 궁전인 버킹검궁도 그녀의 재위때 지어졌다. 그래서 궁전 앞에 그녀의 동상이 있다. 제 1회 만국 박람회를 개최하였으며 남편의 사후 그를 기려 공연장인 로열 알버트 홀을 지었다. 그리고 이렇게 박물관을 V & A라 이름지어 남긴 것에서도 그녀의 남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느낄 수 있다.
여담으로 사실인 지 모르나 지금 결혼식에 신부가 화이트 드레스를 입는 것도 빅토리아 여왕이 시작했다고 하는 설이 있다. 키가 작고 외모에 자신이 없었던 여왕은 결혼식에서만은 돋보이고 싶었다. 해서 순백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유럽 왕가에서 온 12명의 들러리들도 다 흰색을 입게 했는데 그것이 결혼식날 신부가 화이트 드레스를 입는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남편 사후에는 그녀가 계속 검은 옷만 입었고 그래서 그 때 이후로 블랙 칼라가 상복이 되었다고도 한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황금시대를 살았던 그녀가 국민에게 사랑받았던 이유가 또 있다. 그녀는 남편과 규칙적이고 소박한 생활을 하여 당시 귀족을 압도하여 성장하고 있던 신흥 중산 계급들에게도 모범이 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것은 그녀가 어렸을 적 부터 받은 독일식 엄격한 가정교육 덕분이 아니었을 까? 추측해 본다.
역쉬 교육의 힘, 특히 어렸을 적의 인성교육의 중요성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바로 옆나라 프랑스의 왕비였던 마리 앙뜨와네트가 사치와 분별없는 생활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극적 역사를 떠올려보게도 된다.
연 이틀을 V & A 를 갔지만 아직 삼분지 일도 못 봤다. Art & Design이 주 컨셉인 박물관이지만 소장품도 너무 많고 의.식.주 문화 전반에 걸쳐 모든 것을 망라하니 각 시대별 국가별, 지역별 재료별 등 엄청나다. 역사 공부뿐 아니라 건축, 가구 디자인, 의상, 공예등 하는 사람들이 보러오면 필히 많은 아이템들을 얻고 갈거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소장품이 많은 것은 원래 있던 것에 인도 동인도 회사 박물관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을 합쳐서 지금의 박물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그것이 기증인지 강제 자진납부였는 지는 잘 모를일이다.
우리 나라 삼국시대 도자기도 있고 기원 전 몇 백년된 금붙이 항아리등 암튼 너무 많아 다 보려면 일 주일도 더 걸릴 듯하다. 암튼 이 곳만 봐도 세계 각국 문화와 디자인 변천사를 한 곳에서 다 볼 수 있다는 점은 좋은 거 같다.
대영 박물관과는 다르게 좀 더 편한 분위기에서 우리 실생활적인것을 많이 볼수 있는 곳이라 런던 오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중국, 일본방 옆에 한국관이 있는데 혹자는 복도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 아쉽다, 초라해보인다고도 하는데 툇마루를 연결시켜 앉을 수도 있게 해 둔 점이 오히려 편안하고 보기 좋았다. 나는 실제로 박물관 관람중 너무 피곤해서 마루에 앉아 잠시 쉬었다.
Tate Modern 현대미술관
우리 연수반은 강사샘을 가이드로 해서 다 함께 런던 투어를 나섰다. 세인트폴 대성당에 모여 성당을 관람하고 도보로 걸어서 밀레니엄교를 건너면 바로 세익스피어의 극장이 있고 또 테이트모던 현대 미술관이 있다. 강변 멀지않는 곳에 버로우 마켓과 타워브리지 런던탑도 지척에 있지만 나는 그런 명소는 개인적으로 가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보는 걸 더 선호한다.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은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과 비교할 수도 있는 런던의 또 다른 랜드마크다. 세인트 폴 성당은 7세기경 지어졌다가 재건축되었고 2차 세계대전의 폭격에도 살아남아 영국인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12세기에 지어진 노트르담 성당이 고딕양식으로 전형적인 뾰족한 아치와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유명하다면 세인트 폴 성당은 바로크 양식의 둥근 지붕 돔을 가지고 있다. 성당에서는 영국의 국가적 행사가 열리고 돔까지 올라가면 런던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성당이 보이는 인도교
성당을 보고 걸어서 밀레니엄교를 건너면서 템즈강을 바라본다. 템즈강 물색은 약간 황토색인데 이는 바다가 가까워서 밀물과 썰물 때 강의 일부가 바다랑 섞이면서 그렇다고 강사샘이 설명했다.
2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된 밀레니엄 다리는 하얀 케이블과 강철로 만들었는데 세인트폴 대성당과 테이트모던 미술관을 이어주는 보행자 전용 다리다. 다리 위에서 대성당과 타워브릿지, 현대식 건물 더 샤드등 런던의 명물들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이 다리는 여행자들에게는 필수코스다.
런던에 내셔널 갤러리가 고전적 명화그림을 전시하는 곳이라면 테이트 모던은 20세기 이후의 현대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다. 특이한 것은 사용이 중단된 화력 발전소를 개조하여 미술관으로 탈바꿈 시킨 것이다.
원 건물 형태를 유지하면서 인테리어만 바꾸었는데 빈티지풍으로 현대 미술관으로는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런 건물의 특색때문인 지 템스 강변이란 장소적 특색 덕분인 지, 새로운 명소가 된 밀레니엄 브리지와 런던 아이까지 더불어 이 곳은 핫 플레이스가 되었고 관람객 숫자로는 파리 퐁피두센터나 뉴욕 현대 미술관을 넘는 세계적인 미술관이 되었다.
내셔널 갤러리와 테이트 모던 두 미술관 입구를 비교해보니 재미있다 ㅎㅎ
그런데 전시된 작품을 보면 나는 솔직히 현대 미술은 별로였다. 내셔널 갤러리는 서너번을 가고도 또 가고싶었는데 테이트 모던은 하루 반 나절을 보고 나니 더 이상은 no more 였다.
모두가 다 아는 피카소, 고갱, 모네등의 그림은 눈에 익숙하지만 설명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조각이나 설치물은 눈에도 마음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미에 대한 기준, 선입견, 고정관념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님 예술에 대한 전반적인 얕은 인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관람하다 눈과 발이 피곤하여 앉은 미술관 카페에서 바라다보는 템즈강변과 강 건너 편 보이는 세인트 폴 성당이 멀리서 더 보기 좋았다. 때 마침 비도 오니 발코니에 앉아서 부옇게 우연에 가린 템즈강과 강변 풍경을 멍 때리며 바라보고 마시는 커피맛이 좋았다.
세익스피어 글로버 극장
세익스피어의 유명세에 비하면 극장이 크진 않았던 것이 의외였다. 하기사 그 옛날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이니 400년 전의 건물 규모라 생각하니 이해가 갔다.
세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그는 영국의 자존심이 되었다. 런던에 있는 동안 나는 근교의 셰익스피어의 본가도 방문했다. 셰익스피어가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이유를 그만의 번뜩이는 통찰력과 언어적 미학을 꼽기도 한다. 그가 문학을 넘어서 철학적 지혜와 영감을 가진 것은 분명하다 본다.
당시 야외극장이었던 이 건물이 위치한 템스 강 남쪽은 파리의 무랑루즈처럼 시끄럽고 떠들썩한 장소였다. 도박장, 선술집 등이 있었고 극장은 그의 연극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관중들을 최대 3천 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멕베스」 등의 작품이 이곳에서 초연되었다.
가난한 군중들은 무대 앞쪽의 지붕 없는 ‘마당’에 서서 입석 관람했고, 돈을 낸 이들은 3층으로 된 객석에 앉았다. 1613년, 「헨리 8세」를 공연하던 중에 대포를 쏘았다가 초가지붕의 짚에 불이 부터 불이 붙는 바람에 원래의 글로브 극장은 완전히 불타 버렸다. 건물은 즉시 재건됐지만, 1642년 극장이 비종교적이며 사람들을 타락시킨다고 여겼던 청교도의 탄압으로 폐쇄되었다.
1997년 극장은 다시 원형 그대로 복원됐다. ‘글로브’라는 극장 이름은 세익스피어의 희곡 중 ‘지구 전체는 하나의 연극무대’라는 대사에서 나왔다 한다.
지붕이 없이 하늘이 보이는 뻥 뚤려 있는 것이 특이했다. 극장 안에 당시의 무대의상이나 여러 작품에 대한 설명도 전시되어있었는데 그러나 나에겐 재미났던 그 날의 가이드 설명이 진짜 하이라이트였다. 그녀의 요란스런 얼굴 화장과 그에 어울리는 얼굴 표정, 그리고 변화무쌍한 목소리는 그 자체로 연극 한 마당이었다. 특히 들을수록 매력적인 브리티시 잉글리시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발음이었다.
4백년 전 사람들이 중간에 쉬는 시간도 없이 2~3시간을 지붕도 없는 극장의 무대 앞 마당에 서서 연극을 보았다 상상해 보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자리에 앉을 돈은 없고... 화장실이 없었기에 템즈강에 가서 실례를 하니 강물도 안전하지 못했다 한다. 목이 말라 맥주를 마시는데 맥주가 더 소변을 마렵게 하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실례를 하기도 하면서 쉬지않고 공연을 관람했다 한다. 그나마 돈 내고 벤치에 앉은 사람들은 나무통을 패쓰해가며 소변을 보았다.
여자배우가 없던 시절이라 소년배우들이 여자 역할을 하기위해 코르셋과 가발을 쓰고 화장까지 해야했다. 그래서 땀은 나는데 무대의상, 가발은 거의 씻지 않기에 이가 생겨 흐르는 땀에 더욱 가려워도 긁지도 못하고등등... 이런 재미진 이야기를 가이드는 정말 더 재미있게 전달해주었다. 역쉬 세익스피어의 나라에 글로버 극장 가이드 다웠다.
와중에 무대 바로 앞엔 씻지도 않는 가난한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오는 영국날씨에 비를 맞았다 다시 한여름 뙤약볕에 옷을 말리며 바늘처럼 촘촘히 서서 연극을 보고 있으니 그 냄새도 진동했는데... 배우들은 연기를 해야했으니...아무튼 그 배우와 관객들의 열정은 대단했었다 본다. 그래서 지금도 런던시내 피카델리 서커스등 주위에 그렇게나 극장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티비, 영화도 없던 시절 사람들은 더욱 연극에 대한 흥미와 갈급함이 더 했을 것 같다.
어차피 삶이 드라마이니
가장 괴로울 때도
가장 즐거울 때도
세익스피어를 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소설가 김훈이 삶속에 가장 고통스러운 세 가지는 전쟁과 굶주림과 지루함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런 삶의 카타르시스를 위해서도 연극,영화를 포함한 드라마나 여러 예술 장르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