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중에서
생의 모든 과정과 지혜와 깨달음도 그때그때 피었다 지는 꽃처럼 영원하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새로운 문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도록 매순 간
이별과 재출발의 각오를 해야만 한다.
우리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를 한 단계씩 높이며 넓히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처럼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러면
죽음의 순간에도 여전히 새로운 공간을 향해 즐겁게 출발할 수 있다.
해서 이 시는 헤세의 대긍정과 초월의 마음,
생사의 연결점을 인정하고 인지한 깨달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라 여겨진다.
결국
타인의 가르침이 아닌 자신의 경험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고
내 삶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임을 말하고 있다.
태어나보니 신학자 집안이었던 그에게 철학과 종교에 대한 탐구는 숙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때론 그 열정이 과도해서 신학교를 뛰쳐나오고, 자살을 기도하고, 학교에서 퇴학도 당한다.
그때의 상황이 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신학교를 뛰쳐나와 시계 수습공일과 서점일로 살던 그는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자 9살 연상의 피아니스트인 마리아와 결혼하여
스위스 접경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여러 편의 작품이 성공을 거두었고,
헤세는 아들 셋을 둔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다 안정된 생활에 권태를 느끼며 여러 곳을 여행순례를 떠나기도 한다.
그는 평화주의자였다.
1,2 차 대전을 모두 겪었던 그는
조국 독일의 군국주의가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 때도,
히틀러의 나치즘이 광분하던 2차 세계대전 때도 전쟁을 반대하였다.
그래서 조국의 배신자라는 언론의 지탄을 받고 그의 모든 저서는
판매금지와 출판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이러한 상황과 국민들의 비난은 헤세로서는 견디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부인까지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자 결국 자신도 정신 치료를 받게 된다.
이때 그는 심리학의 대가였던 칼 구스타프 융을 만났고,
며칠 후에 꿈속에서 바로 데미안의 등장인물들을 만났다고 한다.
치료를 통해 정신적인 위기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창작을 위한 영감을 얻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헤세는 나이 마흔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스위스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을 서툰 솜씨로 그리며
문학 창작에서 느끼지 못했던 희열과 평안을 느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가운데 종종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펜과 붓으로 작품을 창조해 내는 것은 내게 포도주와도 같아서,
그것에 취한 상태가 삶을 그래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따스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헤세의 그림에는 사람이나 동물이 없다. 그가 그린 것은 오로지 말없는
산, 강, 풀, 이름 없는 들꽃들, 그리고 그가 어린 시절부터 들판에 누워 종일을 바라보았던 구름이었다.
사람이 나오는것은 정원에 물을 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정원사 헤세' 단 한 작품뿐이다.
그가 그린 소박한 그림에는 따뜻함과 휴식이 있다.
그는 수채화를 많이 그렸고, 그의 글에 직접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또한 자주 친구와 지인들에게 수채화가 그려진 편지와
엽서를 보내기도 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독일인이지만 그의 작품과 사상으로
동양인인 나도 더욱 친밀감과 유대감을 느끼는 헤세,
아마도 우리 모두 영혼의 결은 서로 닮아있어서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