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아빠 생일에 맞춰 내려오겠다며 한 달 전부터 카톡 연락을 해 왔다. 기차표를 바꾸고 회사연차도 내고 하면서 2박 3일 시간을 내었다.
나는 아이들이 결혼 후 첫인사 올 때부터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왔다 가는데 1박 2일은 번잡스럽기만 하다고 오려면 2박 3일로 오던지 아님 오지 말라고 못 박았다. 그게 어차피 오고 가는 수고는 같은데 저희들도 편하고 맞이하는 우리도 얼굴 쳐다보며 얘기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도착 날부터 가는 날까지 무얼 어디서 먹고 어디로 드라이버 갈 것까지 다 톡방에 올라왔다. 아빠 생신상은 당연히 저들이 알아서 차릴 것이며 엄마는 일체 아무것도 하지 말란 내용이었다. 아이들이 온다 하면 벌써 장보기 부터 할까 봐 그랬나 싶으면서도 주방일이 많아지면 결국 며느리도 안 편할 거 니 그리 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암튼 오던 날은 야구장에 갔고 이튿날 점심은 맛집 장어구이, 그리고 저녁은 생일상, 내가 한 거는 간단한 아침 샌드위치 한 번뿐이었다.
아들들 초등학교 때부터 ‘효도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내가 공부 잘해서 나중에 돈 벌면 효도하겠다 식의 그런 효도는 없다라고 말했다. 공부만 하라며 지금 할 수 있는 효도도 다 면제시키고 유보하는 것이 바람직한 가정교육이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다.
부부교사인 우리는 학교에서도 그리 가르쳤다. 남편은 사립고교에 근무하면서 반 아이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엄마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장례식에 오지 말라 했다는 말을 듣고 야단을 친 적도 있었다.
나도 효도실행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며 생일이나 기념일 뭘 해 줄까? 하면 사양하지 않고 신발이나 소소한 품목을 골라서 아들들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저들도 이제 패턴이 되었는지 지금은 말 안 해도 알아서 아빠 옷이나 모자, 선글라스등 필요물품은 큰 아들이 전문적으로 잘 골라 보낸다.
토요일 점심 아들이 검색한 가포 장어구이집에 가니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남편과 둘이라면 미친 짓이라며 안 하겠지만 벤치에 앉아 기다리며 넷이서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기다린 보람으로 백 년 맛집답게 맛있고 푸짐했다.
먹고 근처 콰이강의 다리로 산책을 갔다. 비가 살짝 흩뿌리긴 했지만 둘이 앞서 걸어가는 것만 봐도 그 어떤 풍경그림 보다 이쁘다. 부모에게 그저 둘이 알콩달콩 이쁘게 사는 거 보여주는 게 첫 번째 효도란 생각이 든다. 사실 대부분 부모들처럼 우리 부부도 자식들에게 무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살아가면서 교육이라 생각하고 이랬으면 좋겠다는 걸 한 두 번 예시로 보여줄 뿐이다.
점심먹고 콰이강 갔다 오면서 아들은 어제 장 봐 둔 거에서 한두개 빠졌다며 마트에 잠간 들렀다. 에스칼레이터 위에서도 다정한 모습이 보기좋아 뒤에서 시엄니가 도찰했다 ㅋㅋㅎㅎ
이 글을 쓰기 전 작년 남편 생일은 어떻게 보냈지? 왜 결혼한 지 2년째인데 올해가 첫 생일상이 되었지? 기억의 휘발성이 어떤 정도인지 정말 아무 생각이 안 나서 스마트폰 캘린더를 꺼내 보니작년 남편 생일날 나는 대장암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도 아이들은 연차를 내고 나는 아들 신혼집에서 병원으로 오가고 있었다. 딸이 없는 내게 며느리는 딸 노릇을 다 했다. 에어컨 병실이 춥다니 여분의 담요와 스웨터, 양말 그리고 샴푸, 화장품까지 입원에 필요한 것을 세심히도 챙겨 와서 집안에 여자가 왜 필요한 지 싶으면서 든든했던 기억이 났다.
돌아와서 장어구이 스태미너식을 먹은 데다 산책 후 카페에서 케이크까지 먹어서 배가 안 고팠기에 저녁준비는 천천히 하라고 하며 나는 씻고 쉬었다. 남편은 거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도 저녁 먹자는 소리가 없어 나가 보니 아직도 열심히 준비 중이었다. 평소 저녁 식사시간이 훌쩍 지났고 배는 안 고팠지만 이렇게 두세 시간이 더 걸릴 줄은 몰랐다. 두 번이나 장 본 거를 다 펼쳐놓고 가끔 스마트폰도 보는 거 보니 확인해 가며 요리를 하고 있다.
내가 하면 간단히 할 잡채도 정석대로 한다고 난리부르스다. 불고기에 오리에 전복까지 그냥 차라리 나물 몇 가지를 더 하던 가 싶었지만 말을 하면 안 된다. 미역국도 끓이고 팥 찰밥도 하고 그래도 할 건 다 한다.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선물 받은 와인이 비싼 거라 안 먹고 가져왔다며 와인도 따고 식사를 했다. 아빠 옷 선물에다 봉투도 내 거 까지 덤으로 챙겨준다. 그러니 아들 며느리에게 제대로 생일상을 받은 느낌이다.
잡채에 불고기양념에 오리 쌈무까지 다 손가는 요리를 했다. 케잌 필요없다니 중간에 나가서 수제빵을 사 왔다.
품 안의 자식이라고 제비 새끼처럼 입에 넣어주듯 해 먹이던 그 시절, 애들이 어릴 때는 그때 대로 사랑스러웠다. 이제 훌쩍 자라서 결혼도 하고 엄마 대신 아내를 만나서 이렇게 와서 함께 해 주니 그게 고맙고도 대견할 뿐이다. 무얼 어떻게 해서 먹고 보다 함께 하는 시간이 좋은 거다.
아들이 발가락을 다쳐 병문안 겸 올라간 날 며느리감을 처음 만났다. 밥 먹으러 가면서 절뚝거리는 아들을 며느리가 부축하며 앞서 가길래 이제 엄마 손을 안 잡아도 되는구나 싶었다. 식당에서도 예절 바른 모습이 마음에 쏘옥 들고 만나고 오면서도 그 얼굴이 내내 아른거렸다. 저녁에 자러 간 친구집에서 그 얘길 했더니 친구는 핏줄 땡기듯 자기 식구 될 사람은 알아본다며 ‘너거 식구 맞는 갑다’ 했다.
아들도 감성적이고 세심한 편이나 아무래도 남자다. 그런데 아들보다 나이가 더 많은 며느리가 속이 더 깊고 넓다. 지금은 시부모님 다 돌아가셨지만 나는 일남 팔 녀 외동 며느리다. 그래서 힘든 점도 있었지만 그 정도 고생 안 하고 산 사람도 없을 거라 보고 오히려 외동이어서 칭찬받고 인정받은 점도 많았다고 본다.
딸을 여럿 키워보신 시어머님은 마음이 넓으신 분이어서 내가 대충 하는 것도 다 너그러히 봐 주셨다.
아들 흰 속옷은 삶아서 보얗게 입히시던 분이 색깔 있는 옷이랑 세탁기 휙휙 돌려서 누렇게 된 런닝을 입고 있는 아들을 보시고도 가만히 웃기만 하셨다.
내가 시집살이를 안 겪어서 그런 지 나도 며느리에 대해서 시어머니처럼 넓은 마음으로 그리 웃으면 될 거 같다. 어차피 며느리는 나보다 더 잘하고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