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 깨기 1탄 집회
우리가 싼 똥은 우리가 치워야 한다며
대구 촛불행동이 국힘당 해산 도장 깨기 1탄으로
어제 내란 공범 추경호 사무실 앞으로 모였다.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말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곱씹다가 갑자기 가야겠다며
대구 가는 버스시간표와 네버지도에
추경호사무실을 폭풍 검색했다.
가 보니 평일 오후 5시 집회에 모인
숫자는 많진 않았지만
마음과 눈빛만은 모두 간절하고 진지했다.
6~70대와 2~30대가 많았고
경찰이 몇 분 오셨는데 우릴 보호하는 차원이었다.
그 제스처를 보면서
아, 이제 경찰이 완전 국민 편이구나, 란 걸 실감했다.
나는 보수의 텃밭이라는 대구 경북이 바뀌면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다 본다.
그러니 대구시민들은 일당백 일당만을 해서라도
대한민국을 위해서 분연히 일어나
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는 나라를 위기에 빠트리고
전 국민을 위협하는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 대통령이 구속되고 나서도
12.3 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져서
향후 몇 년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란을 준동한 자들을 철저히 발본색원해서
엄중히 처벌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사람 안에 있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그들은 좀비처럼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우리는 그간의 역사를 통해서 봐 왔다.
https://www.youtube.com/live/JcL4YoWXbxU?si=QLmc0F7y6ZDapY82
제 목소리로 듣고 싶은 분들은 33분 30초부터 잠시 나옵니다
나는 일전에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작금의 현 시국에 관한 나의 글을 정치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구독 해제하시는 분들이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3~40명 안팎이 될 텐데 정말 나는 그분들의 선택에 대해서 괜찮고 개의치 않는다.
다만 그런 분들의 제한된 사고나 사유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가진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사유를 자유롭게 표출하는 것인데 자신의 심장에 가까운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니 남 눈치 볼 것 없이 아프면 아프고 슬프면 슬프다고 해야 한다.
그걸 무슨 진영의 흑백논리고 아 저 사람은 진보고 나는 보수인데 한다면 그런 분들은 굉장히 고정관념, 틀에 박힌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어디서 잔뜩 가스 라이팅을 당했거나 언론이 거르지도 않고 마구 방출하는 뉴스들에 대해서 스스로 검증할 능력이 없는 거라 본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현실 너머로도 상상의 세계를 열어둬야 할 것이다.
언제나 지금 살고 있는 현재나 이 사회보다 더 나은 더 아름다운 더 완전한 세상을 꿈꾸며 절대적 진선미나 플라톤의 이데아적인 것을 추구해 가는 것이 있을 때 창작예술의 의미가 있다 본다.
그러니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바로 개인이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우리의 그런 소망이나 꿈을 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7년 전에 지리산 자락에 전원주택을 짓고 정말 소로처럼 살고 싶어 했다.
헨리 소로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수필가다.
그는 하버드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평생 일정한 직업에 정착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숲 속에서 은거하며 살다 갔다.
그런 그는 짧은 생 동안 탐욕과 관습에 쩔은 국가와 사회에 저항해서
자연 속에서 인생의 진실을 살아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그의 방식으로 항의했고, 인두세 납부 거부로 투옥도 당했다.
그는 숲 속에서 조용한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나는 원주민을 학살하고 땅을 뺏은 미국이지만 그나마 소로가 있었기에 미국의 양심이 살아있다고 여긴다.
에머슨과 함께 그의 초월주의 철학은 나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니 대표작인 《월든》과 함께 《시민 불복종》을 남긴 그를 단순한 숲 속의 은둔자로 볼 수 있을까?
그가 주로 거한 공간은 숲 속이었지만 그의 글과 관심은 ‘사람’과 그가 몸담은 ‘사회’에 있었다.
내가 불문학을 전공하며 80년대 대학에서 공부할 때 프랑스 작가 까뮈와 장 폴 사르트르는 양대 산맥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실존주의 철학이 주요 학습 테마였다.
행동하는 지식인이란 별명을 가진 사르트르는 앙가주망(Engaement)의 철학적 배경을 지닌다.
불어로 참여란 뜻을 가진 앙가주망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그의 핵심 사상이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며,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단순히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자유다.
즉 말해서,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표현하고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리고 인간은 완전히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타인과 사회 속에서 살아가니 자신의 선택은 단지 개인적인 자원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차원에서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개인이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 책임을 무시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앙가주망이다.
결국,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을 요구한다.
단순히 철학적 또는 정치적 견해를 말로 표현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그 견해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식민지 해방 운동, 베트남 전쟁 등 여러 정치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냈고, 이러한 활동은 그의 철학적 신념을 행동으로 실천한 대표적인 사례다.
현대에 와서 앙가주망은 철학적 개념을 넘어서, 개인의 정치적·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개인이 사회적 정의, 인권, 환경 문제 등 다양한 공공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참여를 의미한다.
나는 월든의 작가 소로처럼 큰 목소리를 내는 글을 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전원생활만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5도 2촌으로 시골과 아파트를 오가며 내 삶을 관조하고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마음 가는 데로 살아갈 뿐이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는 나뿐이라는 ‘나쁜’ 생각이 아니라 우리라는 보다 더 큰 나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 본다.
그러니 내가 몸 담고 있는 주변이 어수선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내가 정치인인가요? 왜 목소리를 내야 해요?' 하는 덜 떨어진 말을 하는 어린 가수는 정말 어려도 한참 어린 중생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다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기에 한강 작가의 작품에 전 세계가 공명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 일도 일어나는 것이다.
꽃을 가꾸고 살든 시를 읊조리며 살든 다 각자 선택이고 다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생명과 질서와 조화를 깨트리는 자나
그런 일 들에 있어서는
남의 일 보듯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그리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