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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백년지대계

‘경쟁은 야만이다‘

by 김별


옛 부터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했다. 농사를 짓는 데는 1년의 계획이 필요하고 나무를 심는 데는 10년의 계획이 필요하다면 사람을 키우는 데는 100년의 큰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바꿔말하면 교육은 국가와 사회 발전의 근본 초석이기에 '백년 앞을 내다보며' 할 정도로 교육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소위 일류대학을 나왔다는 자들이 앞 다퉈 나라를 진창에 빠트리고 큰 도둑 괴물이 되어 뉴스를 도배하는 작금의 상황을 보노라면 나도 교육현장에 섰던 한 사람으로서 더욱 개탄스럽다.


역사학자 전우용씨의 말을 빌어본다.


추악(醜惡)의 뜻을 모르겠으면,

윤석열을 보면 됩니다.

간교(奸巧)의 뜻을 모르겠으면,

한덕수와 최상목을 보면 됩니다.

비루(鄙陋)의 뜻을 모르겠으면,

국무위원들을 보면 됩니다.


고시에 합격해서 최고위층에까지

오른 자들의 덕목이란 게,

고작 추악과 간교와 비루입니다.

...


햇볕 드는 곳을 찾아 기민하게 움직이는 건

‘짚신벌레’가 사람보다 더 잘합니다.


최고위 엘리트 집단을 '벌레' 같은 자들로 채워 놓은 나라에선,

교육은 '사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벌레' 만드는 일이 됩니다.


추악하고 간교하고 비루하게 살아야 성공하는 세상,

벌레처럼 살아야 출세하는 시대를 끝내야,

‘사람의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벌레’ 같은 자들에게 ‘벌레 같은 놈’이라고 욕하는 것도,

자기의 ‘인간성’을 지키는 한 방법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소위 쥐들의 경주 처럼 한 줄 세우기 경쟁을 시켜서

결국 추악하고 비루하게 살다가는 엘리트로 만드는 것이

그들의 교육 목적이 되어서 되겠는 지!


쥐들의 경주에서는 이겨도 결국 쥐일 뿐인 것을~!

나도 30년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교육이 이런 입시경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건강하고 건전한 배움은 이뤄지지 않는다 본다.


더 배운 자가 몽매한 자와 약자들을 이끌고 보듬고 가는 것이 진정한 배운 값을 하는 것이다.

더 가진 자가 헐벗은 자들에게 자비와 선행으로 베푸는 것이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이 아니던가?

나는 두 아들을 입시경쟁과는 무관한 대안 고등학교를 보냈다.

지금 30대 초반인 두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둘 중 하나는 대기업에 다니고 결혼도 했다.


부모가 자녀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생각하는 행복이 자녀가 원하는 행복과 일치하는지는 적절한 타임 라인에서 재고하면서 가는 것이 나중 후회할 일이 적을 것이다.




무모하리만큼 치열한 경쟁을 영어권에서는 쥐들의 경주(rat race)라고 표현한다.

기다란 통 한쪽 끝에 치즈 한 조각을 넣고 반대편에 수십 마리의 쥐를 들여보내면 쥐들은 먼저 치즈를 독차지하기 위해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며 치즈를 향해 죽기 살기로 달려간다.

Rat race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우리 학생들이 처한 현실도 비슷하다. 중학교 때는 외고나 과학고에 가기 위해서, 고등학교 때는 수능시험 고득점을 위해서, 대학에선 더 좋은 학점을 얻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더 좋은 곳에 취직하기 위하여 분투한다. 어쩌면 유치원부터 rat race를 벌이는지도 모른다.


쥐들의 경주에서는 쥐에게 보상이나 음식 등으로 동기부여를 시킨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공부 잘 하면 잘 먹고 잘 산다"가 당연한 가치관으로 학습의 동기부여가 된다면

그런 경주에 성공한 쥐가 어떻게 살아갈 지는 뻔한 일이다.

나 하나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오직 '나뿐'이라는 나쁜 사고가 처음부터 장착된다.




아직 자녀를 교육현장에 두고 있는 학부모라면 반드시 보시길~!

경쟁은 야만이다!!

https://youtu.be/LD-9AP7r7hQ?si=ZuaiRlgIpoXjApzW

https://youtu.be/5UaJywOO6Mk?si=mvGDx4lX9CYZOVO

https://youtu.be/07kju0DzPWY?si=YAR7QKyPe2G9Ossr

한국교육은 학생 인권유린이다 ㅡ독일방송





독일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1919년 바이마르공화국이 시작되면서 국민을 국가의 필요인재로 키우기 위해 그 유명한 바이마르식 주입식 교육을 했다

속성재배를 위한 엄청난 양의 지식을 뇌에 주입하는 주입식 교육에는 비판이나 토론과정이 생략된다

교육과정에서 비판과 토론을 배우지 못한 자들은 지식을 익히고 배우는덴 익숙하지만

'생각'기능은 없어져서 사고과정이 축약된 판단만 하게된다 .

해방이후 우리 대한민국의 교육도 빠른 산업성장을 위해 속성재배식 주입식 교육을 채택했는데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 주입식 교육의 이 원산지다.


주입교육은 빠른 시간내 고도성장을 위한 암기력과 페턴화된 도식 이외에 생각과 사고력은 없다.

이런 교육을 받아 성인이 되면 비판의식도 토론을 해 본적이 없으니 이건 아니다 싶어도 비판자체가 부정적이고 삐딱하다는 의식을 갖게된다.

혹여 주장을 한들 말에 논리가 없어 어버버거리고 좋고 나쁜 감정싸움이 되니 아예 토론은 안하게 된다.

그래서 그럴듯해 뵈는 똑똑한 이를 지지하고 그를 믿고 열광하게 된다.


이런 국민의 정서와 상황에서 나온 인물이 ' 히틀러' 라는 결론이 나자 독일은 교육을 확 뒤집어엎는다.

초등학교 부터 정치 .윤리 .인권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실제정치의 토론을 시킨다 .


<사립유치원에 정부자금을 지원하는 정책이 옳으냐 옳지 않냐 >

이런 현재 벌어지는 정책의 문제사건을 초딩 4학년 애들이 토론을 한다

정답도 해답도 없고 점수도 없다.

오직 객관 타당성있는 논리전개와 해법의 도출이 중요하다.

그 토론의 결과나 문제해결법의 결론은 지방정부에 전달된다.

학교와 지역 주민들의 소모임 에서도 토론은 활발하게 진행된다.

독일에서 가장 인기있는 tv 프로는 드라마나 쇼프로가 아니라 토론프로다.

비판의식과 토론을 활성화 시켜서 과거 히틀러때 처럼 묻지마 감정적 지지자들을 배제한다.

현재 닥친 정치 시사 문제를 아이부터 모든이가 함께 생각하고 토론하는 것은 과거의 죽은 지식을 주입하는 것 보다 신선하고 살아있는 지식이 된다 .

우리의 뇌에 '처'쑤셔넣는것만 그만둬도 뇌는 제대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바로 '생각하기'의 기능이다.


문인은 문학을 하고 . 농삿군은 농사를 짓고 회사원은 회사 다니고 주부는 밥짓고 학생은 열심히 공부만 하고 정치는 직업정치인만 하는 것.

따라서 시인은 정신나간 옹알이같은 시만 쓰고 농삿군 회사원 주부 학생은 모두 자기 코가 석자라서 뉴스에 보여주는 결론만 알고 이상해도 내일이 아니니끄덕이는 것 .

나랑 무관한것 . 설령 내가 내주장을 해 봤자 개짖는 소리니 당장 내 밥그릇에 밥 담을 걱정이나 하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직업정치인들의 바램이고 전략이다.

주입식 교육은 뇌를 단순화 시킨다.
뇌로 생각 보다는 집어넣는 것에 훈련되어
믿을만한 신문과 방송이 재차 언급하면
그 사실의 진위는 알려하지 않고
그 정보가 뇌에 고착화된다.
더욱 무서운 것은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을 믿는 일이다.
사고능력 없이 판단만 하는 머저리 뇌를
가진이들은 쉽게 거짓뉴스에 놀아난다.

~ Jey Choi





쏟아지는 정보를 아는 게 아니라 '이해 해야 생각하는 힘'이 생긴다.

정보의 쓰레기 바다에서 필터링을 하여 제대로 이해하고 통찰하지 못하면 표류하다

비합리,비상식적인 좀비 같은 반응만 할 뿐이다.


그래서 제대로 이해하고 배우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글을 쓴다.

그런데 기득권 지배자들은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의식이 부조리나 억압에 대해 비판하는 의식으로 성장해가면 그들이 통제하며 마구 부려먹기 쉽지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고대 진시황때 부터 근대 문화혁명에 이르기까지 분서갱유, 책을 불태우고 지식인들을 생매장하거나 처형했다.


그리고 그럴듯하게 순수문학이란 걸 만들었다. 그 어떤 정치성향도 시대정신도 없는 무저항, 순진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사랑과 그리움등 지극히 개인적인 감성을 쓴 글들을 순수문학이라며 치켜세웠다.


그런데 정작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가? 문학은 복합적 존재인 인간의 복잡다단한 삶을 총괄적으로 그려낸 영혼의 그림이요 집이다.

그런데 그기에 어떤 정치성도 논리적 사유도 배제된 알멩이 없는 서정과 감상만을 읊조리는 문학이 과연 순수한가? 아님 무뇌한 것인가?

문학의 위대함은 아름다운 진실이다. 그리고 각각의 진실은 시대정신을 반영할 수 밖에 없다. 한강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그래서 작가들이 부조리한 권력과 오용, 남용된 권위의 반대편에 기꺼이 서는 것은 시대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자 응원이며 스스로에 대한 위로다.


진실과 선함이 있지만 결국 아름다움이 승리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진실을 벗어날 수 없다. 오직 가식없는 진실만이 아름다우며 가짜인 거짓은 아름다울 수가 없기에. 그러니 그럴듯한 앵무새 옹알이를 낭만이요 시라 착각하지 말라.



오직 암울하고 어둡더라도
진실에 뿌리를 내린 문장만이
우리 가슴에 빛의 속도로 울림을 주며
공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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