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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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혼자여행이 부럽다는 말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다. 혼자 다 하려니 외로울 새도 없고, 어쩌다 향수와 감상에 젖을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그런 시간은 스스로에게 가장 풍성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어딜 가나 박물관 코스를 빼지 않는 나는 이번 호주여행에서도 최소 미술 갤러리를 포함해서 7~8군데를 들렀다. 다 포스팅하면 아마도 엄청 지루할 것이다 ㅎㅎ
그래도 대충 올려둔다. 후일 시간이 지나고 나서 또 다른 정보 업로드와 함께 나의 기억의 회생과 함께 역사 문화 퍼즐 맞추기를 위해서라도.
멜버른 박물관
멜번은 호주의 유럽이라 할 만큼 역사나 문화가 깊은 곳이다.
No expectation, no disappointment, 기대가 없는 곳에 실망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간 탓인 지 기대치엔 못 미쳤다.
그냥 아래층에 공룡등이 있고 위층에 간략한 호주역사와 기념품이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내가 본 중 가장 단출한 전시였는데 인터넷으로 미리 표를 예매하고 가서 조금이라도 싸서 덜 억울하게 여겨졌다.
Australia 대신 영원 Eternity를 새겨 넣은 것이 인상적이다, 아마도 호주여 영원하라란 의미일 듯 ^^;
물방울이 모여 대양을 이루듯 순간이 모여 영원을 이룬다는 글귀도 좋다.
나라로는 신생국이지만 대륙으론 6만 5천 년 역사를 간직한 호주니 가는 박물관마다 공룡같은 고대 생물에 대한 전시는 기본이다. 부활방학 시즌이라 공룡뼈와 각종 나비, 곤충등 전시관에 아이들과 그들에게 보여주려는 부모들이 몰려있었다.
호주 원주민에 대한 전시실이 따로 있다.
호주는 그 에버오리진에 대해
경의와 존중을 표하고
후손들은 선조들에 대해 증언하는
영상, 사진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갖는데도 투쟁이 필요했고 시간이 걸렸다
에버오리진들이 사용했던 도구와 장신구들
호주 원주민은 500개의 부족연맹체가 다른 언어와 문화, 법률을 가지고 대륙에 존재했다
나는 동물 애호가는 아닌데 바닷속 생물이나 물고기 보는 것을 좋아하는 지라 숙소에서 가까운 아쿠아리움에 갔다. 부활절 휴가기간이라 어린아이들이 많았는데 아이들은 상어도 보고 펭귄도 보니 좋아서인지 소릴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입구부터 매표줄은 길어도 매번 입장권은 인터넷에서 미리 구매하면 바로 들어가니 편했다.
그렇게 나도 아이처럼 신기한 척하면서 다 보고 나와 아침 일찍 갔기에 간단히 요기를 하려고 카페에 앉았다. 그런데 바로 옆에 두 딸을 데리고 온 인도인 같은 부부가 있었는데 갑자기 다섯 살 되어 보이는 딸이 괴성을 지르며 울었다. 한참을 그리 우는데도 엄마란 사람은 가만히 있었고 딸은 아빠에게 안겨서 계속 우니 나도 짜증이 났다. 보통 유럽인들은 아이들이 공공장소에서 고함을 지르거나 소란스러운 행동을 하면 바로 즉시 제재를 한다.
오늘 특히 수족관에서도 그런 광경을 나는 여러 번 보았는데 겉보기로 인도인 같아 보이는 이 부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딸이 바로 앞에 있던 동전 넣고 하는 인형 뽑기를 시켜달라고 떼를 쓴 거였는데 5분 이상 남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아이 통제를 하지 않는 걸 보면서 나 자신 인종차별주의자는 결코 아니지만 그들에 대해 좋은 감정이 나지 않았다. 공공 예절의식이 부족한 지 큰 소리로 자기들끼리 떠드는 중국인에게 눈살 찌푸렸는데 지금 인구 폭발로 세계 1위인 인도인은 당연히 호주에도 아주 많은데 이런 모습을 보니 좋게 여겨지지 않았다.
거대한 악어상 위에 올라타고 사진 찍는 아이들, 부모들이 더 좋아서 아이를 앉히면 어떤 아이들은 울고 ㅎㅎ
생명체는 역쉬 동적인 모습이 감동이다~~비록 갇혀있지만...
아이들도 펭귄을 직접 보는 게 신기한 지 표정이 즐겁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민자 박물관을 보러 갔는데 문이 닫혀서 못 보았다.
그런데 수족관을 보고 나서 박물관이 거기서 가까워 바로 걸어갔다. 이곳은 솔직히 멜버른 박물관 보다도 내게 더 많은 정보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반나절 전체를 투자해도 아깝지 않은 곳이었고 나이 든 직원들은 더없이 친절했고 그곳의 화장실은 개인 화장실 안에 손 씻고 나올 수 있는 세면대까지 있어 더 기억에 남는다.
물론 호주의 화장실은 유럽처럼 돈 받고 그런 거 없이 다 무료다.
*이민자 박물관 1층 갤러리에는 2025년 8월 29일까지 열리는 임시 전시회 "Joy"와 2025년 5월 18일까지 열리는 "Notre-Dame de Paris: The Augmented Exhibition"이 있었다. 그냥 소실된 노트르담 재건에 관한 사진, 영상이 아이패드로 설명을 들을 수 있게 하면서 잘 전시되어 있었다.
호주의 대략적인 이민 역사를 훑어보면,
최초의 이민자들은 영국에서 온 죄수들로서 군인과 행정관들이 그들을 데려왔다.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많은 도시 공장 노동자들과 빈민들과 함께 크고 작은 범죄자들로 포화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바다 건너 미국으로 죄수들을 보내기도 했지만 미국이 1774년 독립하고 더 이상 그들의 식민지가 아니니 그 후 호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 후 1830년대에는 자유 정착민들이 상당수 유입되기 시작했고 이는 원주민들에게는 엄청난 혼란과 고통의 시작이 되었다.
1840년대부터 오늘날까지의 호주의 이민 정책은 크게 네 시기로 나눠 볼 수 있는데 물론 시기들 사이에도 중복이 있고, 각 시기 내에서도 정책의 변화는 다양했다.
1. 1840-1900: 죄수 수송은 중단되었지만, 호주 식민지는 여전히 영국의 정책에 따라 운영되었다.
19세기에는 대부분의 이민자가 영국에서 왔고, 유럽 대륙에서 온 이민자도 소수였다. 사탕수수농장의 일꾼으로 끌려온 태평양 섬나라에서도 온 이민자가 있었지만 1900년에는 전체 인구의 3% 미만만이 비유럽계 또는 원주민 출신이었다.
영국의 호주 식민지들은 19세기 중반 죄수 수송이 중단된 후 자체적인 이민법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법은 1850년 후 골드러시 기간 동안 영국외 대규모 다른 인구 유입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2. 1901-1945: 흔히 White Australia, '백호주의 정책'으로 알려진 호주 이민 제한법은 영국외 국가의 이민을 제한했다.
백인 호주 정책은 1901년부터 1975년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때까지 시행된 인종차별적인 국가 정책이었다. 이로서 호주는 영국과 유럽계 인구가 증가하면서 근면하고 숙련된 백인 노동력을 위주로 번영하는 신생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비유럽계 이민자들에게 유럽 언어로 50 단어 받아쓰기 시험을 치르도록 요구했으며, 이후 이민국 직원이 선택한 언어로 시험을 치르도록 변경되었다. 상당수의 이민자들이 이 시험 때문에 호주 입국이 거부되거나 아예 입국을 거부당했다. 그러다 1950년대에 이르러 호주 인구의 감소로 인해 이 법안은 폐지되었고, 1966년 이후 인종보다는 기술에 따라 이민이 이루어졌다.
3. 1946-1972: 2차 대전 후 인구 손실로 이민 정책에서 영국 이민자가 여전히 선호되지만, 인구 증가를 위해 유럽 대륙 출신 아일랜드, 이태리 같은 다른 나라 이민자도 허용된다.
호주는 '수백만 명 더 수용할 수 있는 공간' 이어서 1945년과 1970년 사이에 약 300만 명의 이민자가 호주에 도착했다. 호주의 이민 프로그램은 인구 대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가장 큰 규모는 이스라엘)가 되었다.
이민자 2명 중 거의 1명은 영국 출신이었지만 국가 안보 강화와 전후 경제 발전을 위해 유럽 전역에서 이민자들이 유입되었고 1970년대 초에는 아시아계 이민자도 증가했다.
1958년 이민법은 마침내 인종 관련 언급을 삭제하여 차별 없는 정책의 문을 열었다.
4. 1973-현재: 백호주의가 철폐되고 유색인종에 대한 다문화주의로 이민 정책이 확대된다.
1970년대 초 이후 호주의 이민 수준과 구성은 극적으로 변동했다. 유럽 이민자 수는 감소한 반면 아시아 및 중동 국가 출신 이민자는 증가했다. 2011년에는 중국과 인도가 영국을 제치고 호주의 주요 영주권 이민자 유입국이 되었고, 2015년 이라크, 시리아, 미얀마,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많은 난민이 유입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정치적, 가족관계등 다양한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과 고국을 떠나
호주로 이주해 왔다.
이민과 국가 정체성
2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이민의 역사와 더불어 호주는 국가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왔다. 호주는 영국 문화의 남부 전초기지인가? 아니면 그 정체성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우선하는가?
'전형적인' 호주인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전형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인가?
이민 역사와 국가 건설을 식민지화의 험난한 현실과 원주민에게 미치는 지속적인 영향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하나의 국가 정체성이 여러 복잡한 문화적 정체성을 포괄할 수 있는가? 하나의 국가 정체성이 가능하거나 바람직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민자 선택은 인구 증가, 노동력 개발, 세계적인 인도주의적 요구에 대응하는 것과 같은 문제와 함께 정부와 특수 이익 집단이 어떤 국가를 만들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항상 영향을 받아 왔다.
피난처로서의 호주
사람들은 취업 기회와 가족 재결합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호주로 이주해 왔다. 유럽 정착 이후 호주는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왔다. 그래서 이곳에는 보트피플이었던 베트남 사람들도 많다.
2016년 호주 정부는 '호주는 다문화, 다인종 국가이며, 이는 호주의 음식, 생활 방식, 문화적 관습과 경험에 반영되어 있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에게는 영국 문화 전통에 뿌리를 둔 단일한 호주 정체성에 대한 열망이 여전히 매력적이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스페인, 포르투갈과 함께 발전된 해군 기술을 바탕으로 제국주의의 욕망으로 앞다투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태평양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확장했다. 이들은 금, 은, 담배와 설탕 같은 원자재와 기독교 종교 개종과 식민지 시장 경제 구축을 위해 전진했다. 식민지 토지를 강탈하여 자신들의 공동체에 정착하거나, 부를 착취하고 지역 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경우가 허다했고, 식민 통치는 통치 체제의 도입부터 지역 통치자에게 정부를 위임하는 것까지 다양하게 이뤄졌다.
다양한 이민자들의 목소리
이민자 찰리 다프라노
1937년 이탈리아 도착, 10대 이주민
1937년, 저는 아버지와 함께 시드니 로드 브런즈윅에서 구두 수선집을 운영하던 삼촌 댁에 가기 위해 호주로 왔습니다. 가족을 데리고 호주에 오려고 아버지와 함께 호주로 왔습니다. 일요일 밤에 도착해서 월요일 아침에 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1996)
로버트 솔터,
오스트리아 유대인 난민, 1938년 도착
[호주 비자 신청서]를 보낸 지 열흘쯤 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로 진군했고, 그 후 오랫동안 캔버라에서 답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나치가 진군했을 때 모든 사람, 특히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꾹람 베트남 난민, 1978년 도착
그리고 1978년 우메 후 그녀의 옆 호스텔
1976년 우리는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1977년 민과 저는 열기구를 만들까 말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떠나고 싶어 안달이 났던 것입니다. 민은 절대 저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죽으면 함께 죽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와파 파후르
무슬림 레바논 이민자, 1970년 도착
멜버른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모스크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랍 무슬림들이 개인 주택에서 모이는 것이 인기가 있었고, 항상 사람들을 따뜻하게 환영했습니다. 무슬림 공동체는 아직 작았습니다. 같은 민족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영어는 거의 또는 전혀 없었습니다.
마스미 히라가 잭슨, 일본 이민자, 1985년 도착
1984년, 저는 캔버라 대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습니다... 몇 년 전에 만난 멜버른 거주자인 호주인과 결혼했습니다... 저는 50세였고, 남편과 상의하며 10년짜리 학업 계획을 세웠습니다. 50대에는 공부와 연구에 전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2년 후, 남편이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이 흥미진진한 삶은 갑자기 끝났습니다.
불 불코치, 수단 난민, 1996년 도착
살려면 떠나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게 제가 아는 전부였습니다... 짐을 쌀 시간도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챙길 수 있는 것만 챙겨 나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이나 음식 없이 떠났고, 강이나 다른 곳을 찾기만 바랐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찾지 못했고, 결국 어떤 사람들은 도중에 죽었습니다.
옆집에 누가 있지?
저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닙니다. 모든 인종, 특히 백인을 사랑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로마 가톨릭 신자도 좋아합니다. 배리 험프리스[데임 에드나 에버리지 역], 호주 코미디언, 2003
우리는 관대함과 사회의 다양성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하지만 옆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기차나 교실에서 우리 옆에 앉으면 어떨까요?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불편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잘못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저를 내버려 두세요.
저는 그저 익명으로 남고 싶을 뿐입니다.
도시의 거리를 걷다 보면 우리 자신이 다름에 둘러싸여 있음을 깨닫습니다.
또 다른 이방인을 느끼는 흑인 이주자들과 그들 이야기도 전시되어 있었다
호시어 레인(Hosier Lane)
멜버른 도심(Flinders Street Station 근처)에 있는 이 골목은 스트리트 아트와 그라피티로 유명해서, 전 세계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작품을 남기는 공간이다.
사진 속의 하트들과 강렬한 색감, 포스터들이 이곳 특유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낙서에 대한 욕구는 무의식 잠재의식과도 연관이 있고 배설충동 욕구해소와도 연관이 있지 않을 지...
무언가 긁적여보고 자신의 목소리나 감정을 타인이 보는 곳에 나타내는 것도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보여준다. 유난히 하트표시가 많은 것도....생존에는 본질 심장, 사랑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플린더스 역앞에 오가는 행인들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