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금씩 나를 알아가던 시절
나는 대구에서 시골로 내려가 중학교를 마치고, 다시 대구로 올라왔다.
차이라면 이번에는 아버지를 시골에 두고, 어머니와 남동생까지 함께 올라왔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이사를 반복하며 자란 아이답게,
나는 새로운 시작 앞에서 담담했다.
고등학교는 ‘뺑뺑이’ 배정이었는데,
묘하게도 중학교 때와 같은 재단의 샛별 H여고로 가게 되었다.
우연치고는 제법 운명적인 선택이었다.
그 학교는 이후 내 삶의 방향과 진로와 감수성등 적지않은 부분에 영향을 끼쳤다.
자서전을 쓰며 삶을 되짚다 보니,우리가 알 수 없는 미래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이렇게 미리 깔아둔 복선 같은 사건들이 조용히 맞물려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사람의 인생에는 우연을 가장한 어떤 흐름,
혹은 신의 섭리라 부를 만한 계획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자연스레 믿게 된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여고 교복 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고등학교 교복은 위아래가 죄다 검은색이었고,
머리 모양도 학년별로 정해져 있었다.
1학년은 단발, 2학년은 양쪽 묶음, 3학년은 양쪽 땋은 머리—
마치 규격품 인생의 견본처럼.
그런데 H여고는 달랐다.
3년 내내 단발머리였고, 교복은 곤색 계열이었다.
신발은 ‘마이고무’라는, 지금 생각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운동화였지만
일단 끈이 없는 단순한 디자인의 운동화여서 좋았다.
가방은 빨간색을 들 수 있었다.
나는 그게 그렇게 좋았다.
그래서 3년 내내, 꿋꿋이 빨간 가방을 들고 다녔다.
지금 돌아보면, 그 가방은 취향이라기보다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조용히 말하는 표식이었던 것 같다.
H여고는 가톨릭 재단이라 교리 수업이 있었고,
금요일이면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미사를 드렸다.
꽃으로 장식된 제단 앞에서
“주여 임하소서 내 마음에—
암흑에 헤매는 한 마리 양을—”
하고 노래를 부르다 보면, 괜히 마음이 말갛게 씻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시간들이 훗날 내가 기독교 신앙으로 들어가는 데
작은 씨앗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종교는 늘 그렇게, 소리 없이 스며오는 법이니까.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뚱뚱하고 인상 좋은 수녀님이 가르치시던 불어 수업이었다.
수녀님은 젊은 시절, 결혼식 날 뒷문으로 도망쳐 나와
수녀가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력을 가진 분이었다.
이후 프랑스로 가 수녀 수업을 받았고,
그 덕분에 불어를 가르치셨다.
수업 시간에는 불어 수업 못지않게
자신의 ‘소시적 연애 이야기’가 더 자주 등장했다.
물론 수녀님의 연애란 게 얼마나 드라마틱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숨도 안 쉬고 들었다.
입담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말이 안 통해 노(老)수녀와 한국말로 욕하며 싸웠다는 이야기,
매일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 밥 잘 먹고 똥 잘 누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 시작한다는 고백까지—
수업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훗날 사범대 외국어계열 면접에서
“왜 불어를 전공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나는 주저 없이 고등학교 수녀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학과장이 웃으며 말했다.
“아, 그 서○○ 수녀님?”
세상은 그렇게, 생각보다 좁았다.
시골에서 다시 도시로 올라온 첫 학기 성적은 중간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점차 학반 상위권으로 올라갔다.
H여고의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가을마다 문집 전시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국화 향기가 가득한 교정에서
학생들이 각자 쓴 글을 모아 한 권의 문집으로 엮어 전시했다.
학교 개방일에는 학부모는 물론,
어디서 나타났는지 남학생들까지 와서 사인을 해 주었다.
어설픈 글이었지만,
괜히 더 공들여 쓰게 되었다.
국어 시간에는 글을 쓰고, 미술 시간에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니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 그 시절에도 많은 신규 학교들이 오직 명성을 위해
입시 성적에만 집착했었는데 우리 학교는 달랐다.
나는 그 여유롭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지금 내가 글을 쓰는 것도,
그 시절 국화 향기 속에서
내 마음이 활자가 되어
내 말로 나를 드러내고,
비로소 나 자신을 알아가게 해주었던
그 경험이 나를 글쓰기로 이끌어왔을지도 모른다.
1학년 담임은 총각 수학 선생님이었다.
여고의 총각 선생님—그 자체로 인기 요인이었지만
안경에 꺼벙한 인상, 게다가 수학 담당이라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나이 많은 영어 선생님이 더 좋았다.
2학년이 되어 추천제로 반장을 뽑았을 때
나는 뜻밖에도 부반장이 되었다.
키가 작은 내가 앞줄 대표,
키가 훤칠한 반장은 뒷줄 대표였다.
우리가 함께 교무실에 가면
선생님들은 늘 웃으며 말했다.
“꺼꾸리와 장다리 왔네.”
앞과 뒤가 자연스럽게 이어진 반은
의외로 잘 굴러갔다.
나는 공부를, 반장은 분위기를 맡았다.
담임은 내게 성적 유지를 신신당부했지만
나는 중학교 때 한 번 해본 1등 이후
성적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머리 싸매고 1등 하느니,
주말의 명화를 다 보고
느긋하게 공부해서 2~3등 하는 게 더 좋았다.
1등 아이들은 늘 긴장 속에 사는 것처럼 보였고,
그게 괜히 안쓰러웠다.
나는 적당히 잘하고, 적당히 즐기고 싶었다.
여고 2학년의 수학여행은
지금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억이다.
기차가 터널에 들어가는 순간
담임을 골려주자는 장난이었는데,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너무 정확하게—정말 너무 정확하게—
선생님의 뺨을 때려버렸다.
기차가 다시 빛으로 나왔을 때
나는 선생님과 정면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그 황당함과 당혹감이라니.
그 일 이후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 안에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마성 같은 것이 숨어 있다는 걸.
누구나, 언제든 돌발적인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걸.
그 깨달음은
사람을 덜 단정 짓게 만들었고,
조금 더 이해하게 만들었다.
고3 때 다시 담임이 된 그 선생님은
내 질풍노도의 시절을 끝까지 지켜보며
묵묵히 나를 보살펴 주셨다.
고마우신 선생님
이제 돌아보면,
그 시절의 실수도, 엇나감도
나를 단정히 만들기보다
나를 사람답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빨간 가방을 들고 다니던 그 여고 시절은
내가 나를 조금씩 더 알아가던
가장 솔직한 연습의 시간이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내가 아니라
나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묻고,
알아가던 시간
내가 나를 이해하는 법을
처음 연습하던 가장 솔직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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