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라는 이름의 작은 세계 (9)

책상 아래의 세계, 복도 너머의 나

by 김별


유치원을 빼고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12년 학제,

그 길고도 지루한 터널의 마지막에 마침내 다다랐다.


나는 고3이 되었고, 나는 다시 부반장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반 반장은 늘 1등을 놓치지 않던 아이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그 친구는 차분하기가 절의 스님급이었고, 목이 유난히 길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아이가 소리 내 깔깔 웃는 걸 보지 못했다.


고3이 되어서도 나는 KBS 외화 시리즈 《월튼네 사람들》과 《MBC 주말의 명화》만큼은 사수했다. 주말의 명화는 무려 40년 넘게 방영된 장수 프로그램이었고, 월튼네 사람들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방영되었다. 주말의 명화가 흑백 화면과 시그널 음악으로 시작되면, 나는 괜히 침을 삼키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건 거의 의식(儀式)에 가까웠다.


《월튼네 사람들》은 1930~40년대 미국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대가족의 성장 드라마다. 책임감이 넘치는 아버지와 인자한 어머니, 서로를 감싸 안는 가족 간의 유대감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대공황 이후 힘든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나는 드라마에서 가족 간 신뢰와 애정, 격의 없는 대화가 주는 따뜻함이 특히 좋았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미국의 개방적이며 자유롭고 편한 소통과 문화에 대한 환상을 키웠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도덕적 혼란을 마주하면, "아, 옛날이여"라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월튼 가족이 보여준 소박한 가치와 인간미가 있던 미국의 과거와 지금의 대비가 마음 아프기도 하고 그 시절의 미국이 그립다.




캔디 만화, 옥상 탈출, 그리고 아카시아 향기

그 무렵, 학교에서는 책상 아래로 숨겨 읽던 *캔디 만화가 또 하나의 세계였다. 우리는 서로 돌려보며 푹 빠졌고, 급기야 남자 주인공 인기투표까지 벌였다. 알버트, 앤서니, 테리, 스테아를 두고 마치 자기 남자친구인 양 열을 올렸다.


아카시아 향이 짙던 5월의 어느 밤, 나와 친구 하나는 야자 시간을 틈타 옥상으로 도망쳐 올라가 쑥덕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일탈도 아닌데, 그땐 왜 그렇게 가슴이 뛰었는지 모르겠다.


우리 3학년 교실 창밖으로는 성모당 묘지가 바로 보였고, 그 너머에는 김대건 신부가 세운 대건고등학교가 있었다. 같은 재단이라 거의 이웃 같은 학교였다.





성모당으로 도망친 오후


어느 날, 국어 시험 성적이 떨어진 학생은 번호순으로 나와 손바닥을 맞는다는 ‘사건’이 벌어졌다. 국어 선생님은 젊고 잘생겨 인기가 많았는데, 별명은 ‘섬모맨’이었다. 여름에 단추를 두 개쯤 풀면 가슴털이 살짝 보인다고 누군가 붙인 이름이었다. 딱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출석번호 1번이라 제일 먼저 나가게 된 것이었다. 나는 “야만적인 체벌은 거부합니다”라며 맞기 싫다고 했고, 예상치 못한 나의 반응에 당황한 선생님은 갑자기 출석부로 내 머리를 내리 치셨다.


순간, 머리보다 마음이 더 무너졌다. 나는 그대로 교실을 뛰쳐나왔다.


비밀의 화원 같은 문을 지나 묘지를 건너 성모당으로 갔다. 그렇게 하루를 배회하듯 보내고, 종례 후 가방을 찾으러 교실에 갔더니 담임선생님이 교무실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은 국어 선생님이 출석부로 머리를 친 건 미안해하신다며, 그래도 부반장인 내가 그렇게 맞선 건 아쉽다고 하셨다. 나도 완전히 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성적으로 학생을 체벌하는 건 아니다는 말은 해야 했다. 결국 서로 사과하고 일은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고3 시절은 흘러갔고, 다행히 성적은 문과 TOP 10을 유지했다. 절친 경애(가명)와 나는 꼭 서울로 같이 가자고 반쯤은 다짐이고 반쯤은 주문 같은 약속을 했다.


경애는 시골에서 올라와 혼자 자취하던, 머리가 비상한 친구였다. 사실 내가 그날 국어 선생님께 대들었던 데에는, 경애가 시험을 잘 봐 칭찬을 받았고 나는 그렇지 못했던 속상함도 한몫했다. 질투인지 시기심인지, 마음이 뒤틀린 상태에서 체벌 이야기가 불을 붙인 셈이었다.





좋아한다는 마음의 물리학


경애와는 자취방과 우리 집을 오가며 속을 털어놓는 사이였다. 웃지 못할 추억도 많다. 문과였던 내가 물리 선생님을 좋아해서, 경애와 함께 물리실 청소 지원을 하러 다녔던 일도 그중 하나다.

경애는 질문을 준비해 가서 선생님과 깊은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그 대화의 50%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선생님 곁에 더 머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했다.


곱슬머리였던 나를 선생님은 ‘꼽실아’라 부르며 귀여워하셨고, 나는 혼자 괜히 특별하다고 착각했다. 마른 체격에 뿔테안경, 외국인 같은 윤곽. 별명은 ‘뼈다귀’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도서관 담당이기도 했던 선생님은 은근히 여고생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혼자 알 수 없는 배신감도 느꼈다.


진짜 좋아했던 걸까. 대학 졸업 후 유학 서류를 떼러 모교에 갔다가 멀리서 선생님을 보고 화장실로 도망쳐 숨은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날 분홍색 바바리에 분홍 구두까지 신고 갔으면서 말이다.

생각하면 그냥 인사하면 될 일을, 왜 그리 도망쳤는지 나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난다.


경애와의 약속대로 예비고사를 치렀고, SKY 중 한 곳은 갈 수 있는 성적이 나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을 서울로 보내는 걸 꺼리셨다. 군사정권 시절, 데모에 휘말릴까 걱정하신 것이다. 대신 지방 국립대에서 불어를 전공하고, 원하면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제안하셨다.


수녀님의 영향으로 프랑스에 대한 꿈이 있던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사범대 외국어 계열로 진학했다. 경애는 서울의 전액 장학생 학교에 갔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시 재수해 서울대 인문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데모에 휘말려 1년 만에 제적, 다시 시험을 쳐 모 대학 법대 수석·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는 소식이 대구 일간지 신문에 실렸다. 경애다운 이야기였다.


그렇게 각자의 길로 흩어졌지만, 그 시절의 나와 친구들, 텔레비전과 만화책, 웃기고 아찔한 사건들은 시간의 강바닥에 깔린 아름다운 조약돌이 된 거 같다. 그러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조용히 추억의 파편으로 반짝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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