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활과 동아리 활동 (10)

― 내성적이었던 나는 외향인이었을까

by 김별

고삐가 풀린 계절


친구와의 약속을 어기고, 나는 대구의 국립 사범대 외국어계열에 입학했다.

그 순간부터 내 삶은 고삐 풀린 망아지 쪽으로 급선회했다.


1학년 교양과정은 말 그대로 쑹덩쑹덩.

수업은 종종 빠졌고, 대신 동아리는 무려 다섯 개를 섭렵했다.

연극반, 야학반, 영어회화 써클….

관심은 많았고, 집중은 늘 분산되어 있었다.

남자친구도 하나 생겼다.

공부는 선택 사항이었고, 경험은 필수 과목이었다.


81학번인 우리는 본고사 스트레스 없이 대학에 들어온 세대였지만,

그 대신 ‘졸업정원제’라는 느릿한 압박을 등에 업고 살았다.

군사정권의 *3S 정책 아래,

“적당히 놀되, 데모는 하지 말 것”이라는 사회의 무언의 당부를

우리는 맥주와 음악, 써클 활동으로 성실히 이행했다.


연극반 선배들은 여전히 막걸리를 마셨지만

우리는 맥주 세대였다.

사범대생의 체면을 지킨다고 야학반에도 발을 들였지만

데이트와 다양한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다만 1학년의 의무처럼 여겨지던 농촌 봉사활동에는 참여했는데,

그곳에서 나는 사귀던 남자친구와 ‘이기성’을 두고 대판 싸웠다.


그는 나를 이기적이라 했고,

나는 나를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차이를 설명하기엔 우리는 너무 어렸고,

집단의식은 늘 개인보다 컸다.


결국 그는 군대도 가지 않으면서

나에 대한 시위로 삭발까지 감행했고,

힘들고 복잡한 상황은 오래 끌지 않는

나는 당연히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2학년이 되면서 전공은 불어로 굳어졌고,

나는 불어회화 연합서클에 들어갔다.

대구의 다섯 개 대학이 함께하던 그 써클은

내 숨통을 트이게 했다.


모임 장소가 반월동 **알리앙스 프랑세즈였던 덕에

나는 시내를 제집 드나들 듯 오가기 시작했다.

국립대의 회색 공기를 벗어나

알리앙스 프랑세즈의 창문 너머로 보이던 시내의 불빛은

젊음이 허락한 작은 자유처럼 느껴졌다.

말 잘하는 선배들 덕분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모임후 저녁 식사에는 함께 소맥도 마셨다.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땐 몰랐다.

우리가 오랜 동지를 거쳐 8년 뒤 부부가 될 줄은.

우연은 늘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인생은 늘 이렇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슬쩍 끼워 넣으며 흘러간다.


돌아보면 대학의 시간은

지식을 쌓기보다 나를 흩뜨리는 연습이었다.

그리고 그 흩어짐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나의 결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대학 3년의 동아리 활동은

전공 수업보다 훨씬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소설을 함께 읽고, 말을 주고받고, 웃으며 토론하던 시간들이

언어를 ‘과목’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감각’으로 바꿔주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존재는 ‘3K’ 선배들이었다.


같은 학교 김씨 성에, 키 180 안팎, 군 제대 후 복학.

우리는 그들을 정치계의 3K에 빗대 그렇게 불렀다.

다방에서 함께 공부하며 농담을 주고받던 시간은

공부라기보다는 청춘 실습에 가까웠다.


그중 한 선배를 은근히 좋아했다.

동성동본이라 어렵겠다며 웃어넘기긴 했지만

눈 오는 날 둘이서 동성로에서 중앙공원까지 걷던 기억이 난다.

눈을 뭉쳐 던지고, 손이 시리다며

그의 바바리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던 장면까지.


그의 별명은 ‘카츄사’.

멀리서 보면 외국인 같았고,

가까이서 보면 내가 방에 걸어두고 보던

배우 폴 뉴먼의 우수가 겹쳐 보이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인연은 늘 예기치 않은 각도로 빗나간다.


4학년 어느 날,

친구와 선배가 함께 있는 장면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셋 다 어색하게 웃었고,

나는 먼저 자리를 떴다.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마음만 혼자 바쁘게 요동쳤다.


그 후 선배는 결혼했고,

나는 유학 중 들어왔을 때 서울에서

다른 회원들과 다시 그를 만났다.

술김에 “가끔 이불 뒤집어쓰고 운다”던 그의 말이

오래 남았다.

삶이 힘든 건지, 마음이 약한 건지

나는 끝내 묻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선배들과의 인연을 등에 업고

나는 써클 회장이 되었다.

말을 이끄는 자리,

사람들 앞에서 숨 고르며 대화를 이어가는 경험은

이후 유학생활의 예행연습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대학 1학년의 나는

한 사람에게 올인하는 삶이 맞지 않는다는 걸 배웠고,

2학년 이후의 나는

시내와 학교를 오가며

떠들고 웃고 배우는 방식으로 나를 확장시켰다.

어머니는 늦게 귀가하는 나를 ‘식은밥 제조기’라 불렀지만,

그 시절 나는 나름대로 날개짓을 하며

비로소 숨 쉬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고등학교까지가 울타리였다면,

대학은 나의 보폭을 실험하던 시기였다.

공부도 했고,

사람도 만났고,

무엇보다

내가 어떤 결의 인간인지

몸으로 알아가던 시간이었다.


어릴 때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고,
항상 생각이 말보다 먼저 왔다.
그런데 대학 시절의 나는
이상하리만큼 사람들 속에 있었다.


다섯 개의 동아리,
여러 만남들,

끝없는 대화.
그것은 외향성이 아니라
어쩌면 나를 이해하려는 우회로였는지도 모른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내 생각의 윤곽이 또렷해졌다.
말을 주고받으며
나는 비로소 내가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에서 물러나는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개인성이 존중되지 않는 집단적 의사 결정에

쉽게 동의하지 않으려했고,
획일적인 판단 앞에서는 자주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앞장서기도 했지만
옆에서 관찰하기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불어회화 써클에서의 시간은
그런 나에게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의견은 강요되지 않았고,
유머와 언어가 대화를 이끌었다.
나는 그 안에서
말해도 안전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 시절의 활발함은
성격의 변신이기도 했지만
일종의 자기 탐색의 방식이었다.
마치 내면이 조용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가끔은 시끄러운 길을 택하기도 하는 것 처럼.





*'3S 정책'~ Sports ,Sex, Screen 군사정권 시절 대학생들을 비롯한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돌리기 위해 시행되었다고 보여지는 정책들. 당시 정부는 프로야구,축구 등 프로 스포츠 리그를 출범시켜 국민적 관심을 유도했고, 통행금지 해제, 성인 영화(에로 영화) 양산 등 성 풍속 관련 규제를 완화했고, 컬러 TV 보급 확대와 함께 대중문화 및 영상 산업을 장려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로마 시대의 '빵과 서커스' 정책처럼, 국민들의 불만을 스포츠와 오락으로 해소시켜 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들려는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알리앙스 프랑세즈(Alliance Française)~ 1883년 프랑스 파리에서 설립된 기관으로, 전 세계 130여 개국에 지부를 두고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프랑스 문화를 전파하는 비영리 재단법인이다.








#자서전 #자전적에세이 #본고사 #81학번 #선배 #알리앙스프랑세즈 #불어 #전공 #동아리 #써클 #첫눈 #대학 #청춘

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