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끝에서 만난 인연, 그리고 가족이라는 세계로
1988년, 석사학위를 마치고 나는 겨울 방학을 맞아 부모님을 뵙기 위해 3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귀국을 알고 있던 사람은 단 한 명, 대학 시절 써클 후배뿐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도착하던 바로 그날 아침, 그 후배는 선배였던 지금의 남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선배, 혹시 알아요? 오늘 00언니 나온다던데요.”
그 한마디에 남편은 하던 일을 멈추고 김포공항으로 달려왔다. 당시 그는 지점토로 전등과 장식품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손을 씻을 겨를도 없이 나왔다고 했다. 실제로 그의 손에는 아직 작업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편지 한 통, 연락 한 번 없이 각자의 시간을 살다 다시 공항에서 마주하다니.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정확했고, 필연이라 하기엔 너무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우리는 공항 근처 다방에 잠시 앉아 그간의 시간을 건너뛰듯 안부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는 내 무거운 가방을 들어 서울역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렇게, 3년 만의 재회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며칠 뒤, 남편은 공장에서 지점토를 만들기 위해 모아둔 신문지를 펼치다가 우연히 모교의 교사 채용 공고를 발견했다. 마감이 임박한 광고였다. 그는 곧바로 대구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성적 서류를 부탁했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학교에 들러 서류를 떼어 보내주었다. 그는 기한 안에 서류를 제출했고, 모의 수업까지 무사히 치른 뒤 교사로 채용되었다.
그 무렵 우리는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 몇 차례 데이트를 하며 다시 만났다. 이제 교사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하게 된 그는, 다시 만난 나와 미래를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고, 그때부터 우리의 연애는 편지로 이어졌다. 편지 한 통이 오가는 데 보름이 걸렸고, 전화비는 그의 한 달 월급에 맞먹었다. 그래도 마음은 멀어지지 않았다.
1989년 겨울방학, 그는 나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로 왔다.
파리와 런던, 그리고 내가 머물던 툴루즈를 함께 여행하며 우리는 오랜 친구이자 동지였던 관계가 연인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그리고 6개월 뒤, 1990년 여름방학에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해 8월, 뜻밖에도 교사 발령이 났다. 국립 사범대 미발령자들을 한꺼번에 발령하는 정부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남편과 부산 태종대를 걷고 있을 때 교육청에서 전화가 왔고, 나는 망설임 없이 발령을 받겠다고 답했다. 전공인 불어가 아닌 부전공 영어 교사였지만, 이미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던 나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둘이 함께 교사로 일하면 경제적 독립으로 살아갈 수 있겠구나, 그 생각만으로도 미래는 충분히 단단해 보였다.
돌이켜보면 내가 결혼을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데에는, 유학 시절 겪었던 크고 작은 ‘결혼의 복선’ 같은 경험들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일남 팔녀 중 일곱째이자 외아들이었고, 연로한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조건은 그때의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외국인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점만으로도 결혼의 이유는 충분했다.
결국 나는 9월 1일자로 출근하며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버지께는 원격으로 논문을 마치겠다고 말씀드렸지만, 5년 만의 귀국과 곧바로 시작된 직장생활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프랑스에 남아 있던 내 짐은 후배들이 정리해 보내주었다.
결혼과 동시에 임신, 그리고 출산. 나의 시간은 그때부터 급류처럼 흘렀다.
자유로운 유학생에서 외아들 며느리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시댁 동네에서 대구까지 이어지는 긴 출퇴근길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지치게 했다. 퇴근 후 소파에 누워 이유 없이 눈물이 흘렀고 곁에는 말없이 안타까워하던 남편의 얼굴이 있었다.
시댁동네에서 십 년을 살며 두 아들을 낳았다. 아이들은 시어머니께서 돌봐주셨고, 남편은 마산으로 나는 대구로 출퇴근했다.
딸 아홉을 낳고 얻은 아들이었던 남편, 그리고 그 손주 둘을 품에 안은 시부모님의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장날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나서던 어머니의 뒷모습, “니 분풀이 했다”는 주변의 농담 속에는 긴 세월의 고단함과 위로가 함께 담겨 있었다.
삶은 쉽지 않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쌓아갔다. 시부모님의 병환과 이별, 잦은 가족 모임, 비디오카메라로 남긴 생일 풍경들…. 지금도 아이들 생일 비디오를 보면, 그 안에는 아이들의 웃음뿐 아니라 우리의 젊은 목소리와 분주했던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돌아보면, 공항에서의 그 만남은 단지 재회가 아니었다.
유학의 끝에서 시작된 또 다른 여정, 가족이라는 세계로 들어가는 조용한 입구였다.
우연처럼 다가왔지만,
결국 그 이후 내 삶을 이끌어간 것은 그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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